洞 窟, '문명 잉태한' 인류 삶의 터전.. 세상과 연결한 '탯줄'이었다

문명과 지하 공간 / 김재성 지음 / 글항아리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나 SF영화에서 지하 세계는 추방된 자들의 공간이다. 가상의 미래까지 갈 것도 없이 지하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인간 먹잇감을 저장해 두는 곳이고, '양들의 침묵' 속 연쇄살인마 버펄로 빌이 기거하는 어둡고 음침한 공간이며, 액션영화 악당들이 번번이 경찰을 따돌리고 유유히 사라지는 곳이다.
지하 고급 식당가엔 잘 차려입은 중년 부인들이 오가고, 트렌디한 지하 쇼핑몰은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가 된 지 오래지만, 의식과 무의식이 뒤섞인 지하에 대한 대중의 감각은 여전히 어둠과 공포, 기괴함과 음산함, 예측할 수 없는 함정과 위험한 추락에 머물고 있다. 파악할 수 없는 불확실함에 대한 원초적 불안이자 수십만 년간 쌓은 집단적 트라우마일 것이다.
지반공사 분야의 토목공학자가 쓴 '문명과 지하 공간'은 이 트라우마에 도전한다. 역사 이전,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뒤 인류의 지하 공간을 시간순으로 정리하는 문명 역사서로 땅 위 세상, 때로는 천상 세계로 쏠리는 관심의 사각지대 속에서도 지하 공간은 묵묵히 인류 문명을 끌어 왔고, 동시에 문명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별 생각 없이 '지상'으로 한정된 '생활 공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지하로까지 확장시킨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인류의 다양한 지하 공간에 대한 나열식 설명이라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이 책이 반가운 또 다른 이유는 상대적으로 드문 '공학과 인문학의 통섭'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터널을 설계하고 만들면서 "변변한 도구 하나 없던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바위를 뚫었을까" 같은 의문을 숱하게 가졌지만, 매번 지하 공간에 대한 연구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 좌절하다 직접 책을 쓰게 됐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토목공학자이지만 1년에 한 달은 독서를 위한 안식월로 삼아 인문·사회도서를 독파해온 장서가이자 독서가이다. 책은 자연히 저자의 현직인 공학을 한 축으로, 그의 또 다른 정체성인 신화부터 인류학, 역사를 두루 거치는 인문학을 또 한 축으로 삼고 있다.
책의 시작은 페르세포네 신화이다. 지하 세계의 신 하데스가 땅의 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땅속으로 끌고 간다. 제우스의 중재로 페르세포네는 1년 중 3분의 1은 지하에서, 3분의 2는 데메테르와 살게 된다. 페르세포네가 지상에 머무는 동안 곡식과 만물이 자라지만, 지하로 돌아가면 땅은 얼어붙게 된다. 얼핏 보면 '지하=죽음'인 것 같지만, 오히려 인간의 삶이 지상과 지하를 순환한다는 인식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땅속에서 씨앗이 보존되고 움터야 땅 위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공간이 동굴이다. 밖에선 보이지 않고 적의 공격을 피하기 좋은 곳, 비바람을 막아 주고 불을 피우고 먹을 것을 저장할 수 있는 곳. 인류 문명은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동굴에서 진화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동굴이라는 안정된 환경에서 무기와 도구를 고안한 호모 파베르(Homo Faver), 삶을 즐기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자신을 이해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벽화를 그리는 호모 아르텐스(Homo Artens)가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더 이상 맹수에게 쫓기는 사냥감이 아니라 맹수를 쫓는 사냥꾼이 되었을 때 인간은 드디어 어둡고 비좁은 동굴을 벗어나 들판으로 나가게 된다. 이 시점에서 지하 공간에 대한 인류의 인식이 바뀌게 된다. 동굴은 더 이상 아늑하고 따뜻한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음습한 죽음과 부패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 뒤 선사인은 주거 공간을 위해 인위적으로 굴을 만들고, 고대인들은 손 도구로 터널을 뚫고, 로마인들은 수로를 포함해 뛰어난 지하 공간 문명을 이뤄 낸다. 17세기 들어 유럽 운하 개발 붐을 타고 터널 기술은 한층 발전하고, 이를 통해 산업혁명도 빠르게 전파된다. 지하 공간 역사에서 현대는 1960년대로, 이때 비로소 다양한 공법과 장비, 발파기법이 개발돼 지하 공간 개발은 더 이상 조건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된다.
이 같은 기술 발달과 함께 지하 공간은 한때 발전소나 기계 시설을 배치하는 장소에 머물다 이제는 공연장, 경기장, 도서관, 연구소 등 다양한 문화 공간으로 이용된다. 여기에는 기술의 발달뿐 아니라 도시의 인구 집중, 대기 오염 등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로 지하의 장점이 부각된 결과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바위를 깎아 만든 요르단의 페트라, 둔황석굴,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 데린쿠유, 수중터널, 해저터널 등 갖가지 지하 공간을 두루 살핀 저자는 현대 생활 공간의 큰 흐름은 지상과 지하의 통합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 신도시 사업인 레 알(Les Halles) 프로젝트의 경우 도시 기반 시설과 생활 공간을 지하와 지상에 분산 배치해 일상생활이 자연스레 연계되도록 했다. 앞으로는 오히려 지상의 소란스러움 속에 조용하고 아늑한 지하의 장점이 부각되면서 다양한 문화 시설과 연구 시설이 지하에 배치되는 것은 물론 수중도시, 지하도시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한국의 경우 국토 면적의 0.6%에 불과한 서울에 20%가 넘는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 인구 과밀 상황을 고려하면 도시 기반 시설의 지하화는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한 선택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했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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