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의 숲, 계절을 잊다.. 생태탐방 곶자왈

글·사진 김기범 기자 2015. 1. 7.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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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조천-함덕 곶자왈 거문오름

▲ 난대와 한대가 어우러진 곳, 빨간 열매 위에 눈이 덮였다. 작은 굴에서는 포근한 김이 올라온다. 노루·오소리·말똥가리… 동물들에겐 한겨울 피난처

제주 조천읍 거문오름의 분화구를 걷던 탐방객들의 발길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난대림이 막 펼쳐지는 곳이었다. 등산복·장갑·목도리까지 꽁꽁 싸매고 온 사람들은 옷가지를 하나씩 풀어헤쳤다. 영하로 내려가진 않았지만 제주 치고는 추운 날씨였던 지난달 22일 거문오름 분화구는 확연히 다른 포근함이 느껴졌다. 후두둑 후두둑…. 내린 눈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이어졌다. 기분 좋게 머리에도 떨어졌고, 수첩에 적은 글씨가 낙수를 타고 번져나갔다. 능선만 둘러보고 내려가는 코스에선 보기 힘든 자연체험이다. 순간 정상부나 능선보다 분화구 내를 돌아보는 탐방코스를 잘 택했다 싶었다.

분화구 곳곳에서는 지표면의 미기후(微氣候)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굴곡을 따라 바로 몇십m 옆 기온도 10도 가까이 차이가 났다. '풍혈'이라 부르는 작은 굴 중에는 아예 김이 올라오는 곳도 있었다. 풍혈은 지층 변화로 생긴 숨골이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을, 여름에는 시원한 공기를 뿜어낸다. 지난해 여름 찾은 제주 한경면의 '환상숲'에서는 에어컨 바람처럼 시원하고 청량한 공기를 뿜어내는 풍혈 앞에서 땀을 식히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제주 거문오름에 있는 풍혈은 지층 변화로 생긴 숨골이다. 한겨울에 김을 뿜어내 눈 덮인 풍혈 주변에선 난대 식물인 양치류가 자란다.
거문오름에서 7㎞ 떨어진 동백동산에는 울창한 난대성 상록수림 사이에 넓고 조용한 습지 먼물깍이 자리해 있다.

한라산의 기생화산 중 하나인 거문오름 분화구는 커다란 말굽을 닮았다. 둘레만 4551m에 달해 백록담(2300m)보다 2배 가까이 크다. 능선 부분엔 1970년대에 조림해 놓은 삼나무숲이 있다. 하지만 분화구 안에는 한반도와 제주의 다른 숲에서도 보기 힘든 식생이 자라나고 있다. 때죽나무·팽나무 등 낙엽활엽수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고, 구실잣밤나무·붉가시나무 등 상록활엽수는 초록빛 생명력을 뽐냈다. 겨울에 열매가 맺히는 식나무는 빨간색 열매 위에 눈이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제주 곶자왈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거문오름의 어원적 해석은 '신령스러운 산'이다. 흔히 '검은오름'으로 잘못 불리기도 한다. 거문오름에서 북쪽으로 용암이 흘러 만들어진 용암협곡은 7㎞ 떨어진 동백동산까지 이어진다. 제주에서 가장 큰 용암협곡이다.

제주의 시민단체와 등산협회 등이 거문오름을 처음 조사한 것은 2002년이다. 당시 조사에선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이 파놓은 갱도와 진지가 원형 그대로 발견됐다. 일본군이 주둔한 오름은 제주에 몇곳 더 있지만, 거문오름은 가장 많은 6000여명의 병력이 진지를 파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행한 곶자왈공유화재단 안미영 사무국장도 2002년 원시의 거문오름을 살펴본 조사단의 일원이라고 했다. 그는 "수풀을 헤치며 조사를 하다 갑자기 사람이 만들어놓은 길을 만났다"며 "길을 따라가 보니 일본군이 머물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거문오름도 그렇고, 해발 300~400m 중산간지역에 있는 곶자왈들은 한라산에 사는 다양한 동물들의 겨울 피난처이다.

이날 선흘2리 세계자연유산센터에서 탐방을 시작해 채 몇 분 걷지도 않은 초입부터 노루가 눈앞에서 펄쩍 지나갔다. 겨울철 한라산의 매서운 추위를 피하고, 먹이를 구하러 거문오름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였다. 거문오름 내에는 노루·오소리 같은 포유류 외에 큰부리까마귀·말똥가리·멧비둘기 등 다양한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큰부리까마귀는 걷다가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쉽게 눈에 띄었고, 매는 하늘에서 선회 비행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안 국장은 "운이 좋으면 때까치가 나뭇가지에 곤충이나 개구리 등을 꽂아 놓은 광경을 볼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사람이 아예 드나들지 않던 시절보다는 숲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고 해도, 거문오름은 여전히 한라산에서 흘러내리는 제주 생태계의 중심이었다.

현재는 세계자연유산센터를 직접 운영하는 주민들이 하루 400명까지만 탐방객 예약을 받으며 거문오름을 보호·관리하고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출발할 때 동행하는 자연해설사는 대부분 주민들이 맡고 있다.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http://wnhcenter.jeju.go.kr/) 홈페이지에서 탐방 예약이 가능하며 입장료는 2000원이다. 무단 출입 시에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된다. 스틱이나 아이젠, 우산 등 땅을 훼손하는 장비도 지참할 수 없다. 정상만 둘러보고 내려오는 코스는 1.8㎞에 1시간, 분화구 코스는 5.5㎞에 2시간30분, 능선 코스는 5㎞에 2시간, 전체 코스는 10㎞에 3시간30분 정도가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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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로 '곶'은 숲, '자왈'은 자갈·바위 같은 암석 덩어리다. 곶자왈은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과 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을 말한다. 제주 곶자왈을 매입해 보전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는 곶자왈공유화재단은 이런 사전적 정의를 토대로 곶자왈을 "화산암괴들이 불규칙하게 널려 있는 지대에 형성된 숲이며, 다양한 동식물이 공존하면서 독특한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는 지역"으로 풀이했다. 제주에 368개 정도 있는 기생화산 '오름'에서 만들어진 용암이 바다로 흘러내리다 만든 독특한 숲 지형인 셈이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연구소 자료를 보면 곶자왈 면적은 110㎢이다. 제주 면적(1825㎢)의 6%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주로 해발 200~400m 안팎의 중산간지역에 위치해 있다. 크게 동부지역의 구좌-성산곶자왈과 조천-함덕곶자왈, 서부지역의 한경-안덕곶자왈과 애월곶자왈이 4대 곶좌왈로 구분된다. 선흘1리의 동백동산과 선흘2리의 거문오름은 조천-함덕곶자왈에 포함된다.

곶자왈은 지표에 내리는 비를 일부 저장할 수 있는 지하수 함양 기능을 갖고 있다. 보온·보습 효과를 통해 난대 식물과 한대 식물이 공존하는 독특한 숲을 형성하고 있다. 해양과 한라산 생태계를 연결해주는 생태축 역할을 하면서 900여종의 식물과 42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곶자왈은 생태적 가치뿐 아니라 숯가마·목축·땔감·약용식물 채취같이 제주 사람들의 생활·문화·경제 터전으로서의 기능도 선사시대부터 담당해왔다.

예약도 못하고 시간도 많지 않지만 제주의 곶자왈을 둘러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동백동산이 알맞다. 동백동산은 1시간이면 충분하다. 경사가 급한 곳이 많은 거문오름과 달리 어린이·노약자가 함께 걷기에도 어렵지 않은 평탄한 길이 대부분이다.

3시간의 거문오름 탐방을 끝내고 오후 4시에 찾은 인근의 동백동산도 계절이 겨울이라는 것을 잊게 해줬다.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빽빽하게 들어선 구실잣밤나무·종가시나무·후박나무가 탐방로 전체를 덮어 그늘을 만들었다. 난대성 상록수들의 울창한 잎사귀 너머로 보이는 햇볕은 봄인지, 가을인지 헷갈릴 정도로 밝고 따스했다. 과거에 동백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과는 달리 동백나무가 널리 자라고 있지는 않았다.

40분쯤 걸었을까. 탐방로 4분의 3 정도 지점에서 만나는 습지 '먼물깍'은 고요했다. 동백동산에서 가장 큰 연못이었다. 원앙·흰뺨검둥오리 등 여러 새들이 노닐고, 길고 긴 나무그늘을 걷던 탐방객들이 햇빛을 만나 한숨 돌리는 곳이 먼물깍이다. 환경부는 동백동산과 주변 선흘1리를 생태관광 모델 마을로 지정했다.

제주 서쪽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한경면의 '환상숲' 곶자왈도 가볼 만하다. 제주 동북쪽에 있는 거문오름이나 동백동산보다 규모는 작지만, 곶자왈 특유의 식생이나 풍혈 등을 보는 데는 손색이 없다. 환상숲은 1993년 이형철씨가 매입한 사유지다. 21년간 이씨와 가족들이 지켜봐온 나무들과 돌 하나 하나에 얽힌 이야기를 듣다보면 1시간 남짓한 탐방 시간이 짧게 느껴진다. 탐방객이 찾으면 이씨 부부와 딸, 세 사람이 번갈아 동행하며 해설을 해준다. 여럿이 함께 둘러보며 공동체놀이를 즐길 수 있는 장소도 마련돼 있다.

<글·사진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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