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가족에도 안알리고 10년치 월급 기부 .. 결정 쉽지 않았죠"

김세동기자 2015. 1. 7.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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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너 소사이어티 가입 경비원 김방락 씨

대학교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60대 후반 남성이 지난해 11월 25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의 627번째 회원으로 가입,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선사했다. 서울 대학로에 있는 한성대 에듀센터의 경비원으로 일하는 김방락(68) 씨가 그 주인공으로, 경비원으로서는 첫 가입이다. 특전단 소속으로 8년간 군 생활을 마치고 중사로 예편한 뒤 국방부 군무원으로 26년간 일했고 은퇴 후부터 10년6개월간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 씨의 1억 원 기부 사실이 알려진 뒤 넉넉지 않은 사람들의 기부와 기부 문의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관계자가 전했다.

행복한 나눔 바이러스를 전파한 김 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중순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화를 걸어 김 씨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모금회 관계자는 "김 선생님이 언론 인터뷰를 하기 싫어하셔서 전화번호를 알려 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김 씨의 인터뷰 거부 이유가 언론의 관심에 당황한 때문인지, 아니면 선행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야 되겠다' 싶어 다른 루트로 김 씨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낸 뒤에도 1주일쯤 더 뜸을 들이다 12월 22일 김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씨가 인터뷰를 거절하지 못하도록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설득부터 했다. "대단한 일을 하셨는데, 무엇보다 김 선생님의 기부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따라 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게 김 선생님의 기부 뜻에도 맞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인터뷰를 요청하자 김 씨는 "알겠다. 내일 종암경찰서 앞으로 와서 전화하라"고 응낙했다.

12월 23일 서울 성북구 종암동 고려대학교 뒷산 앞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 만난 김 씨는 "사생활이 너무 많이 공개돼 피곤하다"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지 않으려 했다. 할 수 없이 "근처에 카페나 커피숍 아시는 데 없냐"고 물었더니 "그런 데는 가본 적이 없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1억 원을 기부했지만 자신을 위한 일에는 자린고비처럼 아낀다는 김 씨가 카페 같은 곳을 가기 싫어하는 빛이 역력해 더 이상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따뜻한 날씨지만 그래도 겨울인데 아파트 단지 내 자그마한 공원 벤치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쉽지 않은 선택인데, 기부를 결심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시골에서 어렵게 살았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도 많았고 나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밥 먹고 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하게 됐다. (아너 소사이어티에 1억 원을 기부하기) 전에도 기부는 조금씩 해왔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말씀대로 소문을 안 냈을 뿐이다."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 여유 있는 생활이 아니지 않나.

"연금이 나와 기본적인 생활은 문제가 없다. 경비생활 10년6개월 동안 받은 돈을 대충 따지니 1억 원 정도 되는데 이 기회에 주변에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자식들이나 국가를 위해, 나를 위해 노후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란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기부는 가족도 모르게 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000만 원 내시면서, 올해(2014년) 말까지 2000만 원 더 내고, 2015년 말까지 나머지 7000만 원 내겠다고 약정하신 건가.

"현재 약속한 금액의 10%를 주고 연말까지 3000만 원 정도 더 보내주려고 한다. 내년 말까지 완납하기로 했다. 적금 들어 놨는데 통장 만기가 다 차면 완납할 거다. 통장이 열댓 개 되는데, 1∼2년 단위로 계속 돈을 부었다. 경비원 일을 하면서는 처음에 90만 원씩 월급을 받았고 나중에 120만 원 정도로 올랐다."

―언론에 보도되면서 기부내용이 알려지고 난 뒤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

"그 전부터 자식들에게 '이제 너희들 결혼도 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력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언제까지 책임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가진 돈은 복지재단에 기부하겠다'라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자식들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결정할 때는 모르게 했다. 여러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고민하면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 그래서 독단적으로 했다. 어려운 결정은 어떤 것이든 혼자 내려야 한다. 여럿이는 안 된다. 기부하겠다는 마음을 미리 이야기했지만 자식들이 안 좋게 생각했을 수도 있을 거다. 우리 딸의 경우 1억도 안 되는 전세를 살고 있고 남편이 조그만 개인사업을 한다. 왜 서운하지 않겠나. 그래서 딸에게 입막음으로 미리 2000만 원을 줬다. 나중에 기부한 사실을 알고 섭섭지 않도록 2∼3개월 전에 준 것이다. 그 이후 통화한 적은 없는데, 속마음은 좋게 생각하기 힘들겠지. 아무래도 자기를 도와줬으면 하지 않겠나. 어느 자식인들 그렇지 않겠나."

―자녀를 1남 1녀 뒀다고 들었다. 어떻게 사나.

"딸은 35세, 아들은 37세인데 둘 다 결혼했고 전세를 살고 있다. 아들은 연세대 수학과를 나와 생명공학 석사와 통계학 박사를 받았고, 지금 삼성서울병원 암병동 연구원으로 있다. 딸도 대학을 나왔다."

―부인 반응은 어땠나.

"처음에는 뜨뜻미지근하더니 나중에는 '잘했다'고 하더라."

―며느리는 '아버님, 잘하셨어요'라고 했다고.

"며느리는 서울대 백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는데, 기부 사실을 알고 나서 '잘하셨다, 존경스럽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렇지만 뭐 며느리가 대놓고 (속마음을 다) 이야기하겠나, 딸 같아야 하지. 아버지가 맨몸으로 시작해서 부모에게 단돈 십 원도 안 받고 이룬 것이기 때문에 자식들도 이해하지 않겠나."

―여유가 있어서 기부한 것 같지 않은데, 실례지만 한 달 수입은 얼마나 되나.

"경비원 월급이 120만 원이고, 공무원 연금은 200만 원 좀 넘고 베트남 참전수당은 22만 원 정도 나온다. 연금하고 참전 수당은 생활비로 쓰고 경비원 월급은 다 기부로 쓴다고 보면 된다."

―집이 33평 아파트인데, 어떻게 장만했나.

"처음에 월세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에 전세로 왔다갔다 하다가 20년 전쯤에 허름한 30평짜리 단독주택을 어렵게 마련했다. 그게 5년 전에 재개발됐다. 33평을 분양받았는데, 2억 원을 더 주고 들어왔다. 내가 노후 준비를 20년 전부터 해와서 재형저축 든 게 7000만∼8000만 원 됐고 군무원 퇴직수당이 또 그만큼 돼서 2억 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기부와 돈에 관한 얘기는 그만하고 개인사로 화제를 돌려봤다. 성장기의 어떤 경험이 이런 기부를 결심하게 된 배경이 됐을 수도 있어 궁금했다. 전북 정읍에서 나고 자란 김 씨는 집안이 어려워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고, 계속 농사일을 거들다가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정읍에서 자랄 때 고생을 많이 했나.

"시골에서 농사 짓고 염소 키우고 소도 키우면서 부모님을 도왔다. 농사라는 게 지금은 자동화됐지만 그때는 다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해서 농사 짓기도 어려웠다. 소작농은 아니고 땅은 좀 있었지만 논밭 팔아 먹기 일쑤였다. 위로 형이 둘 있었는데 둘 다 어릴 때 돌아가셨다. 그 우환도 있고 아버지가 일을 못하고 하니 전답 등도 많이 팔아 먹었다."

―초등학교 마치고 군대 가기 전까지 농사만 지었나.

"서당 선생이셨던 아버지한테서 한문을 좀 배웠다. 정부 인가가 없는 시골 중학교도 다녔다. 그러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군대에 자원해 갔다. 육군 부사관으로 지원했고 특전사에 차출됐다."

―베트남에선 힘드셨을 텐데, 돌아가실 뻔한 적도 있었나.

"실제 전투를 많이 했고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거긴 전후방이 없었다. 나트랑(사이공(현 호찌민)에서 북동쪽으로 320㎞ 북동쪽에 위치한 휴양지 및 어업·군사기지) 옆에 린호아에 주둔해 있었다. 그곳에 백마사령부 수색중대가 있었다. 주로 매복, 수색 등을 했다. 부상은 안 당했다."

―특전사에서 예편하시고 군무원으로 근무하셨다고.

"공수부대에서 8년간 있다 중사로 제대했고 사회에 나와서 5∼6년 동안 노가다(막노동) 판도 다니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국방부 군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26년간 근무했다. 9급으로 취직했다가 사무관 대우받고 정년퇴직했다. 그 이후 바로 한성대 경비원으로 채용돼 현재까지 하고 있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론 군무원 시험을 보기가 어려웠을 텐데.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군에서도 무슨 책을 보든지 간에 계속 공부를 했다. 군무원 시험을 앞두곤 신문도 보고 책을 많이 읽었다."

―한성대 에듀센터 근무는 어떻게 하시나.

"하루 24시간 근무하고 맞교대해 하루 쉰다. 오늘 근무하고 나왔다. 아침에 들어가서 다음날 아침에 나온다. 경비는 대부분 그렇다. 한 달에 절반 일하고 절반 쉰다지만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 낮에 좀 자야 하는데, 아파트도 시끄럽고…."

―여행을 다니시기 어렵겠다.

"여행은 한 번도 못 갔다. 제주도도 못 가봤다. 우리 아들은 외국을 10개국 이상 갔는데 나는 외국이라고는 군대 때 월남(베트남) 간 것밖에 없다. 군무원 재직 당시 해군참모총장이 현역까지 합쳐 근무가 30년 넘었다고 휴가를 5일 줬는데, 그때 안동에 다녀온 것을 빼고는 놀러 간 게 없다. 안동 가서 하룻밤 자고 나머지는 집에서 쉬었다."

―쉬는 날은 뭐하나.

"공원에 가서 놀고 사람들 만나고 한다. 동창회도 나가고 그런 식으로 쉰다. 나름대로 즐기고 산다."

―최근에 중·고등학교를 마치셨다고.

"신설동 진영 중·고등학교를 2년 전에 졸업했다. 어렵게 주경야독으로 했다. 졸업장이 없는 게 한이 됐다. 중·고등학교를 4년 만에 졸업했다. 거기는 학교에 적응 못 해서 나온 어린 학생도 있고 나이 80이 넘은 사람도 있는데, 공부 열의는 말도 못하게 좋다.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라서 무척 열심히 한다."

―취미는 없으실 것 같다. 운동은 하시나.

"아침 운동을 15∼20분 매일 한다. 여기서 길음역까지 15∼20분 정도 거리를 매일 걸어 다닌다. 피티체조하고 아령도 든다."

인터뷰를 끝내기 전에 처음 주제로 돌아가 다시 한 번 기부를 결심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설명을 들어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속물이어서 그런지 잘 안 와 닿아서 다시 여쭙는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건가.

"사실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면 좋다고 할 텐데…. 신문 같은 데 보면 돈 때문에, 부모 유고 시에 1000만 원 가지고도 자식들끼리 싸우고 재판까지 간다. 우리 애들이야 그러지 않겠지만, 내가 내일 모레 일흔이다.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생각을 했다."

―기부와 관련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가진 사람들은 부를 쌓기만 한다. 주변 친구들도 '땅 투기 했네, 뭐 했네' 자랑만 할 뿐, 쓸 줄을 모른다. 거지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고 했다. 내가 (1억 원 기부) 결정을 내릴 때 힘들었다. 가진 것도 많지 않은데 쉽지 않지. 그러나 나 같은 경비원이 하면 좀 울림이 되고 돈 있는 사람들이 조금 베풀지 않겠나 싶어 결단했다. 다행히 내 기부가 알려진 뒤에 새로 아너로 가입한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 심정 안다고, 그 중에는 없이 사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들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나서 남을 돕겠다고 하면 절대 아무것도 못 준다. 쓸 거 다 쓰고 남는 걸로 남을 돕는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김세동 기자 sdg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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