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犧牲' 두 글자에 소와 양.. 일찍부터 제물로 바쳐졌던 운명

김태훈 기자 2015. 1. 4.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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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45〉길상과 희생양

양(羊)은 길상(吉祥)의 동물이다. '재수 좋다'는 얘기다. '대낄'쯤으로 읽어야 제 기분이 나는 말, 대길(大吉)이다. 대통령이 좋아하는 '대박'이기도 하겠다. 흥부네 큰 박 터지는 게 대박 아닌가? 새해 모두의 마음과 가정에, 특히 어려운 이웃들에게, 살진 양 같은 행운이 떡하니 들어앉기 기원한다.

문(文)과 자(字)를 구분해 한자의 '문자'를 설명하는 방법이 있다. 형태가 보이지 않는(추상적인) 일[사(事)]과 눈으로 볼 수 있는 물건[물(物)], 즉 사물에 이름을 붙인 것이 '문자'다. 올해의 동물 양(羊)은 문자학의 '첫 문자' 문(文)이다. 상서롭다는 상(祥)은 羊에서 생겨난 자(字)다. 집[면(?)]안에서 자꾸 아들[자(子)]을 낳는 것처럼, 文에서 새롭게 생겨난 글자가 字다. 몇 안 되는 文들과 그 文들을 서로 합쳐 많은 字들을 만든 것이 문자다. 이 대목, 한자 공부를 (쉽게) 정복하는 열쇠이자 지름길이다.

이 동물에서 비롯된 말[字]은 참 많다. 羊이 크면[대(大)] 아름다운[미(美)] 것이다. 물[수(水)]을 뜻하는 부속품 글자인 수(?)와 합치면 바다 양(洋)이다. 착할 선(善)과 고울 선(鮮)에도 양이 들어앉았다. 羊이 나[아(我)]와 함께라면 옳을 의(義)가 된다. '부러워하며 바란다'는 선망(羨望)의 '선'도 양 글자와 (먹고 싶어서) 침 흘린다는 연( )자의 합체다.

羊 글자가 세 개나 들어간 양갱(羊羹)은 양고기 요리가 아니다. 팥 앙금과 한천, 설탕을 섞어 달게 졸여낸 음식이다. '팥묵'이라고도 한다. 갱(羹)자는 새끼 양을 뜻하는 고(羔)자 아래에 다시 羊자 들어간 미(美)자를 붙였다. 좋은, 맛있는 요리라는 강한 뜻이 옮은 이름이겠다. 양은 그런 뜻 때문에 일찍부터 제사(祭祀) 때 신(神)에게 바쳐지는 신세였다. 가장 좋은 것이 당연히 제물(祭物)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 제물이 희생(犧牲)이다. 들여다보니 '희' 글자에 羊이 들어 있다.

강원 평창 대관령 양떼목장을 찾은 어린이들이 양에게 먹이를 주는 체험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또는 그것을 빼앗김'이라고 사전은 희생이란 단어를 풀이한다. '목숨을 바쳐 나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을 생각할 때의 희생이다. 이 희생이 바로 그 犧牲이다. 비유적인 언어의 변용(變容)이다. '뜻이 옮은 얼굴(이름)'인 것이다.

문명의 새벽, 동아시아 황하(黃河) 유역 사람들에게 양과 함께 소[우(牛)]는 제사 때 제단 위에 오르는 '단골메뉴'였다. 犧牲 두 글자에 각각 소 한 마리씩이 들어 있어 그것을 보여준다. 牛가 소의 뜻을 나타내는 부속품 牛(우)로 쓰인 것이다. 두 단어 중 牲은, 구성된 글자로 풀면 살아 있는[생(生)] 소[牛]의 뜻이다. 이 글자도 犧자와 같이 제물의 뜻이다. 그런데 이 글자의 원래 글자에는 소 그림 대신 양이 들어 있었다. 3500년 전의 갑골문이 그것을 보여준다. 중국의 문자학은 원래 양 그림이던 것이 청동기의 글자인 금문(金文)에서부터 소 그림으로 바뀐 것으로 파악한다. 소가 먼저인지, 양이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그 시기 양이 소와 함께 제물로, 희생으로 쓰인 것을 말해 주는 글자의 예(例)다. 소와 양의 글자는 그 그림(글자)의 뿔의 모양으로 구분된다. 희(犧) 글자는 금문보다도 더 나중 시기에 만들어졌다.

성경의 '스케이프고트'(scapegoat)는 희생양(犧牲羊)이라고 번역한다. 속죄양(贖罪羊)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신에게 바쳐져야 했던 동물이 양이었다. 이런 대속(代贖)의 제물로 동양과 서양이 같은 양을 썼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황금가지'(1890)를 쓴 영국 인류학자 J G 프레이저는 이런 대속의 의식(儀式·ritual)이 인류의 공통의 의식에서 생겨난 것으로 관찰했다. 그 책은 지구촌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형태의 의식을 관찰한 기록을 보여준다. 한국(조선)의 경우도 언급되어 있다. 어디에서 살던 겨레라도 시초에 비슷한 생각과 행동양식을 보이는 것, 인류학 또는 민족학의 궁리 대상이다.

이 착하고[善] 의롭고[義] 아름다운[美] 이미지의 동물 양은 12년마다 띠 동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양띠가 보통 온화하고 순종적이며 평화로운 성품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것도 이런 양의 일반적인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성이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다혈질의 존재이기도 하다. 양도 그렇다고 한다.

강상헌 평론가·우리글진흥원장 kangshbada@naver.com

희생(犧牲)의 '생'자의 첫 모습인 갑골문. 지금 글자에는 왼쪽 부분이 소 우(牛)인데 원래의 갑골문은 양(羊)이다. 양 위쪽 그림은 생(生)자의 갑골문이다. 이락의 저서 '한자정해'에 실린 삽화다.

문(文)과 자(字)라는 서로 다른 뜻의 두 글자가 '문자'라는 말로 합쳐져서 글자[한자(漢字)] 모두를 이르는 개념어가 됐다. 개념어란 추상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로, 글자로 붙잡는 것이다. 말과 글이, 또 글자가 공기와도 같이 당연한 것 같은데, 한 켜 벗기면 이렇게 개념적이고 추상적이다. 개념(槪念)이나 추상(抽象)이란 단어는 일본말에서 유래했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중국보다 구미(歐美)에 먼저 대문을 열고, 그 문물을 받아들이며 의욕적으로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다. 한자로 만든 학문, 기술 등의 그 말들은 당시 우리의 기준이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 숫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지금도 많이 쓰인다. 3국 모두 문화의 바탕을 원래 한자로 꾸렸다. 고대 일본의 문자문화는 우리의 영향을 받은 바가 적지 않다. '한자'라고 부르는, 사람을 뜻하는 뜻글자인 인(人)자는 'ㅅ'이나 'p'처럼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바탕글자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뜻을 가진) 단어다. 현대 중국어에서의 발음은 대충 [렌]이고, 한국어에서는 [인]이다. 일본어에서는 읽는 방식에 따라 [잉] [징] [히토] 등으로 소리 난다. 인간, 인사, 인물 등에서 '人'이 없다면, 이 언어들은 말짱 '허당'(虛堂) 아닌가? 국수주의(國粹主義)의 편협함을 벗어야 비로소 사물의 바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한 가지 사례다. 말글, 즉 언어는 세상 여러 사물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공자님의 정명론(正名論)이기도 하다. 한국어의 중요한 요소인 한자(어)의 기초 개념을 이해하는 도구로서도 양(羊) 글자의 가치는 이렇게 유용하다. 양과 같은, 그다지 많지 않은 문(文)들을 알면 한자의 틀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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