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작] 제안된 공간에서 제안하는 공간으로

안진국 2015. 1. 1.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0.

갑자기 나는, 썩은 나무와 잉크 냄새 속에서, 숨어서 길목을 지키고 있는 의미들 가운데서, 소리내지 않고 드리는 기도로 충만해지고 침묵의 열정에 사로잡힌 첫 영성체를 받던 때의 나 자신으로 되돌아간다.(각주1)

1. 좀비/유령 작품

우리가 맞이한 2014년은 홀란드 카터Holland Cotter가 말한 ≪갤러리-산업 복합체에서 길을 잃다Lost in the Gallery-Industrial Complex≫(각주2)(이하 ≪갤러리-산업 복합체≫)에 대한 공감으로 시작됐다. '수상한 돈의 관행들', '페인팅과 추상의 선호로 재모더니즘화', '제한된 범위의 미술', '미술 비평가를 포함하지 않는 미디어', '보수적인 비평의 장려'…… 이러한 동시대 미술의 문제들. 그는 새해를, 지난 미술시장의 산업적 규모 확장이 가져온 기이한 현상에 대한 걱정으로 시작하였다. 줄리언 스톨라브래스Julian Stallabrass가 영국 현대 미술을 '가벼운 고급예술high art lite'이라고 말했던 것이 1999년인데, 그 가벼운 고급예술이 세계화의 혈관을 타고 전 세계를 빠르게 전염시켰다. 그리고 결국 동시대 미술은 자본의 좀비로, 다시 유령으로 변이되었다. 미술작품은 분더캄머wunderkammer(각주3)에나 놓일 희귀 물건이 되어, 고향(근원)을 읽어버린 채, 작가의 서명만 꼬리표처럼 달고, 세계를 떠도는, 비싼 '좀비'가 된 것이다. 매뉴얼화 되어, 세계 도처에 동일 개체를 출현시키는, 또는 '스펙터클'한 소비 촉진의 이미지를 양산하는, 실체 불분명한, '유령'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품의 유랑이 '노마드nomad'(질 들뢰즈)라는 또 다른 의미를 획득했을까? 혹은, 동일 개체의 동시 출현이 매체의 복수화가 만들어낼 '상상의 미술관'(앙드레 말로)을 불러왔을까? '스펙터클'(기 드보르) 해진 외양이 스펙터클한 내용을 담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그 자체로 실패한다. 좀비/유령으로의 변화는 그저 조막만한 영화를 누려보겠다고 미적 담론의 투쟁이 주춤하는 틈을 타서 담론의 광장, 그 텅 빈 광장을 상업적 광신狂信이 메우면서 파생된 기이한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휘발성이 강한 트렌드와 스펙터클한 이벤트 전시가 (여전히) 휩쓰는 지금의 미술은 '유동하는 공포'(지그문트 바우만) 속에서 (기의는 소멸되고) 기표만이 부유하고 있는 듯하다. 텅 빈 상태로 명멸만을 거듭하고 있는 듯하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고 했던가. 다행히도 좀비가, 유령이, 자신의 실체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몰고 온 글로벌 금융위기를 타고 전 세계가 '조용한 대공황'(각주4)으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과열화된 미술시장은 급속히 냉각되었고, 상업 자본이 빠져나간 자리를 ≪갤러리-산업 복합체≫와 같은 진단이 조금씩 메우고 있다. 기이했던 미술 현상에 대한 반성과 복기復碁, 대안적 모색들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 미술작품의 장소 결합적 정체성을 찾아 '문맥context'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주목된다. 피동적으로 전시 공간의 제안을 받아 끼워 맞춰졌던 미술작품이 이제 능동적으로 자신의 노스탤지어적 욕망을 들어내는, 자신의 공간으로 관람자를 인도하는, 그러한 전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과포화(외부적 요인)로 인해 '상품'으로 전락했던 좀비/유령 작품이 자본의 포말泡沫이 사라지자 고향(근원)으로 복귀하려는 이 시도.

여기, 좀비가, 유령이, 겪었던 사건 현장을 담는다. 그리고 밤을 지나 희망의 빛이 스며드는 새벽을 그린다. 과연 좀비는, 유령은, 자신의 실체를 회복할 수 있을까?

(각주1)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p.301.

(각주2) 2014년 1월 19일자 뉴욕타임즈의 첫 체이지인 "Arts & Leisure"에 실린 비평글.

(각주3) 일어 권역에서 '놀라운 것들의 방'을 뜻하는 말로, 16, 17세기 유럽 지식인들과 귀족들이 수집한 물건들을 모아놓은 공간.

(각주4) 시바야마 게이타의 저서『조용한 대공황』(전형배 옮김, 동아시아, 2013)에서 현 시대의 경제 상황을 진단한 용어.

2.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사건 현장 I

아름다운 토르소torso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각주5)에 누워있는 상상해본다. 아름다움은 금세 처참한 비극으로 변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놓인 현대미술, 제한된 공간에서 '문맥'이 잘리고 외피(효과)가 늘어나는 비극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여전히 진행 중인 그 비극.

브라이언 오도히티Brian O'Doherty가 "이상적인 상태, 순수하고 절대적인 상태"로 제시한 '화이트 큐브White cube'는 오늘날에도 미술작품의 발목을 자르고 있다.

(각주5)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프로크루스테스가 자기 집 옆으로 다니는 통행인을 유인해 침대에 눕히고, 신장이 침대보다 길면 수족을 절단하고 짧으면 뽑아 늘여 죽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

모더니즘 이론이 팽배했던 1940~50년대 가장 왕성한 창작을 보였던, 예술의 자율성과 자기 충족성, 순수성의 원리에 비롯되었던, 추상미술. 그리고 그의 세례로 탄생한 무성無性의 화이트 큐브. 이 무성 공간은 벌써 70~80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전시의 주인 행세를 하며, 피 끓는 청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 늙은 청춘에게 태양은 없다.

여기서 질문을 던진다. 미술작품은 진귀하고 희귀한 물품으로 분류되는가?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이 질문에 화이트 큐브는 '긍정'으로 화답한다. 화이트 큐브는 미술작품을 탈문맥화decontextualisation하여 철저히 작품 내부에 한정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15·16세기 유럽인의 진열 공간을 소환하고 있다. 그 당시 유럽 지배층은 취미로 희귀하고 진귀한 물건들을 개인적 진열 공간 ―카비네 퀴리오시테cabinet curiosité, 갤러리gallery, 샹브르 데 메르베이유chambre des merveilles, 분더캄머, 쿤스트감머kunstkammer 등― 에 수집·전시하였는데, 이 공간은 근대적 전시공간의 효시가 되었다. 이 공간에는 과학적 사고에 따른 엄밀한 '분류학taxonomy' 체계가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표피적 속성만을 분류 대상으로 삼아 탈문맥화시킨 방식이었다. 진귀/희귀한 물품의 전시·보관이 이 공간의 주목적이었음으로 합목적적 형식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화이트 큐브는 어떠한가? 화이트 큐브가 순수예술fine art이 성립된 이후, 작품이 가진 도구의 단순성, 표현의 명확성, 관념의 순수성 등을 드러내는데 대단히 유용한 공간으로 평가되지만, 외부적 맥락을 차단하고 미술작품을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의 늪으로 함몰시켜 진귀/희귀한 물건으로 만들어 버린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이것은 결국 순수미술이 발현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근대 유럽 지배층의 진열 공간과 현재의 화이트 큐브가 기능적 측면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다른 예술 장르나 대중문화, 사회 영역과의 위계적 분리를 정언定言 명령화한 모더니즘"(클레멘트 그린버그)의 토양에 화이트 큐브가 세워졌으니 층위는 다르지만 근대의 엄밀한 '분류학'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모습이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미술작품은 진귀하고 희귀한 물품으로 분류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부정'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제기되었던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틀'에 대한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에 화이트 큐브는 미술관 제도와 상업화의 도구가 되어 미술작품을 미학적·신화적 아우라aura로 덧입혀 자본 시장으로 배출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는 혐의를 짙게 받았다.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 '틀'에 대한 화이트 큐브의 자세는 단지 시각적 외피에 있었고, 이것은 곧 상업성으로 귀결될 뿐이었다. 그래서 이 '틀'에 대한 문제 제기는 화이트 큐브를 넘어서 새로운 유형의 전시와 다양한 전시공간을 출현시켰고 다채롭고 복잡한 형식의 예술 ―개념미술, 행위예술, 대지예술, 소수민(족)의 예술 등― 을 등장시켰다. 이 흐름에서 '대안공간alternative space'이 탄생했다. 하지만 여전히 화이트 큐브(혹은 미술관 제도, 혹은 상업성)는 피 끊는 청춘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필 페토Phill Patton가 지적하고 있는 것(각주6)처럼, 1960년대 대안 문화였던 반문화운동counter-culture은 1970년대 후반 주류로 흡수되어 예술로 재활용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1981년 MTV도입으로 대안 문화가 자본으로 전환 가능하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대안공간의 대안이 '탈 상품화de-commodify'에 일정 부분 성공했지만, 완전한 성공에 이르지 못한 것은 물리적으로 화이트 큐브를 온전히 대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시시설로서 대안공간은 건물 내부에 큐브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공간에서 행해지는 사건을 화이트 큐브가 대행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금융공학이 빚어낸 거대 자본은 미술작품이 투자가치의 '상품'으로 존재하기 희망하여 화이트 큐브가 계속 유지되길 원했다. 결과적으로 대안공간의 외연은 급격히 왜소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의 대안공간은 (1997년의 IMF 구제금융 요청 사태로 촉발된) 작가의 예술 활동에 대한 열악성의 보전補塡을 목적으로 생성되었기에 시작 시점부터 시대적 의미를 찾지 못하는 미학적 모호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1999년 첫 대안공간(각주7)이 생긴지 15여년이 지난 지금 그 추진력을 현저히 잃어버렸고, 그들의 대안적인 활동들은 화이트 큐브를 기저로 하는 미술관이나 상업 갤러리에서 흡수하여 훨씬 더 큰 규모로 행해지고 있다. 현재 그들의 미학적 모호함은 적층된 상황이다.

(각주6) Julie H. Reiss, From Margin to Center: The Spaces of Installation Art, The MIT Press, 2001, p.131.

(각주6) 한국의 첫 대안 공간은 1999년 홍익대학교 근방에 전시장과 카페를 동시에 운영하던 in the LOOP로 본다.

대안에서 상업을 추출하려는 세력은 화이트 큐브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부정을 긍정으로 치환(대안의 상업화)하여 대안을 새로운 형태의 상업 모델로 변이시키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벽 없는 미술관'(로잘린드 E. 크라우스)은 '경관vista'을 지배 개념으로 화이트 큐브의 벽(통제성)을 무너트리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경관'은 일종의 스펙타클spectacle을 불러 들였다. 하지만 기 드보르Guy Ernest Debord의 말처럼 "스펙타클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스펙타클의 사회』)이기에 결국 보이지 않는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스펙타클이 문제인 것은 예술이나 예술 기관들이 상업적이고 지배적인 자본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압도하는 규모의 스펙타클은 화이트 큐브 밖에서 퍼포먼스로, 설치미술-대지미술로, 미술 이벤트로, 외부 세계의 문맥을 끌어와 예술의 불꽃을 승화시키지만, (자본과 연결되어) 소비를 촉진시키는 '경관'으로 기능하여 미술을 하나의 '이벤트'로 전락시켜 버린다. 일례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당에 전시되었던 <;신선놀음>;(2014.7.8.~10.5.)[도1]은 압도하는 규모의 스펙타클을 보여줬지만,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5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이라는 타이틀이 말하고 있듯, 상업 자본의 후원을 표면으로, 광고를 이면으로 형성된 예술적 놀이동산임을 드러낸다. 결국 상업성에 종속된 대안적 형태는 작품/작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상업적으로 소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불어 스펙타클의 방점은 시각(경관)에 있기 때문에 내용을 차치한 채 매체가 현시하는 효과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는 미술작품과 진지한 관계 맺기를 희생시키면서 대중화(소비화)를 지향하는 자세이다.

<;트로이카: 소리, 빛, 시간-감성을 깨우는 놀라운 상상>;(대림미술관, 2014.4.10.~10.12.; 이하 <;트로이카>;)[도2]는 그 전형적 사례이다.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과학을 예술로 변환시킨 이 전시는 눈앞에 펼쳐진 신기한 '경관'으로 내용을 상쇄시키고 (시각) 효과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과학실험실의 체취와 현상은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두 전시는 시선을 끄는 충격으로 익숙한 신기함을 선사하여 대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소비되었다. 결국 화이트 큐브를 탈출했던 예술이 스펙타클이라는 더 큰 화이트 큐브에 갇혀있는 형국이 되었다.

3. 포장된 공간; 사건 현장 II + 새벽 I

에머 바커Emma Barker는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것을 접하기만 하면 된다는 유사-종교적quasi-religious 믿음"(각주8)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문맥적 전체성이라는 관념을 지지하는 이들은 미술이 전체적이고 적절하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미술가가 의도한 장소에서 경험되어야 한다"(각주9)는 저스틴 허게스Justin Hughes의 발언도 주목된다. 귤화위지橘化爲枳 ―강남에 심은 귤을 기후와 풍토가 다른 강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 처럼, 미술작품의 이동은 그것이 내재한 의미를 변화시켜 전혀 다른 의미를 낳을 수 있다. 미술작품이 지닌 '(장소적) 문맥'은 다른 말로 그것의 근원적 정체성이다. 하지만 소비 자본은 격리와 시간성의 배제(탈문맥화)를 통해 이동에 따른 의미 변화를 최소화시켜 미술작품의 상품성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따라서 소비 자본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화이트 큐브(혹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의 큰 두 줄기인 '탈 상품화'와 '메마른 문맥sterile context의 회복'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시시설로서의 대안공간이 방황하는 이유는 메마른 문맥의 형식(큐브)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각주8) 에머 바커(Emma Barker), 『전시의 연금술 미술관 디스플레이 』, 이지윤 역, 아트북스, 2004, p.10.

(각주9) Justin Hughes, 'The Line Between Work and Framework, Text and Context,' 19 Cardozo Arts & Ent. L.J. 19 , 2001, p.27.

메마른 문맥의 회복이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미술은 '장소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장소의 정의가 물리적인 입지에서 담론적인 벡터로 전환되면서 (경험 가능한) 메마른 문맥의 회복은 절반 정도 실패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권미원이 장소특정성에 일시적 귀속belongin-in-transience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데서 기인한다.(『장소 특정적 미술』) 그녀가 장소를 현상적, 물리적 공간에서 미술에 의미를 부여하는 제도의 영역으로, 광범위한 사회문화적인 담론의 장으로, 확대하면서 장소특정성의 외연을 넓히고 개념을 열어준 측면은 긍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미적 현상에 대한 담론으로 작품의 메마른 문맥을 회복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다시 말해 (좀비/유령) 작품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미술 체계를 확립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고정성을 이동성에 내어준 열린 개념은 (현상이 담론을 견인하였다 하더라도) 소비 자본이 고정된 장소특정적 작품을 이동 가능한 좀비/유령 작품으로 변화시켜 활용하는데 기여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소비 자본은 장소를 업고 있는 공간을 반겼을 것이다. '연극적 공간'의 서막은 이렇게 오른다.

심리적 측면에서 '공간'과 '장소'는 부등가관계에 있다. 공간은 유동을, 장소는 부동을 내재하고 있는 까닭에, 공간은 공기의 유동이 느껴지고 장소는 지면의 굳건함이 연상된다. 하지만 공간이 장소를 흡수하면서 (실제적 입지를 유동적 담론의 벡터로 전환시키면서) 장소를 포장 가능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공간'은 부동의 '장소'가 가진 사회적·역사적 차원들을 추출해내서 이동성을 확보함으로써 현행 사회경제적 질서(미술관의 소비 촉진, 도시의 재정적 필요 충족)에 활용되는 양상을 보인다. 공간은 포장되어 온전하게 화이트 큐브로 이동할 수 있는 '연극적 공간'이 되어버렸다. 현재 (장소성을 거세한/추출한) 경험 공간으로서의 전시는 '스펙타클'이란 형태로 유랑을 시작했으며(e.g.<;트로이카>;), 어느 장소에서든 매뉴얼에 따라 차이들을 지우고 동시 다발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e.g.<;신선놀음>;). 전시공간(장소성)을 제안하는 미술이 제안된 전시공간을 받아들여 연극을 시작한 것이다.

제안하는 공간을 제안된 공간이 포섭하는 과정은 이주요의 <;나이트 스튜디오Night Studio>;(아트선재센터, 2013.10.26.~2014.1.12.)[도3]를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전시 이전에 이주요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자신이 살고 작업했던 이태원의 작업실에서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불안감을 작업에 투사하여 '오픈스튜디오'의 형식으로 네 차례나 전시를 열었다(장소특정적 전시).

<;나이트 스튜디오>;는 이 네 차례 오픈스튜디오들의 분신으로, 그 당시 제작했던 작업들이 재제작되어 열린 전시였다. 이것은 장소특정적 작업이 화이트 큐브 안으로 들어간 전형적인 사례다. 그의 오픈스튜디오는 그 장소에서 태어난 미술작품의 문맥을 경험하게 했다. 다국적 주민이 활보하고 무국적 지역이 된 이태원 시장의 북적임을 확인하게 되는 그 곳, 그 낯선 곳을 찾아오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공감하며, 관람자가 작품을 대면했을 때, 작품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 곳에 거주하는 작가의 불안, 부족, 연약함이 작품과 작품의 환경과 뒤섞이면서 깊은 사유의 문으로 인도한다. 작품이 자기 역사성을 가지고 자기 발산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공간은 추출된 (단지 잔향일 뿐인) 외부 문맥과 함께 포장되어 네델란드의 반아베미술관Van Abbemuseum으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Museum fur Moderne Kunst Frankfurt am Main으로, 아트선재센터로 이동되었다. 실재적 장소성이 거세된 공간에 미술작품은 다시 좀비가 되어, 유령이 되어, 놓이게 된 것이다. 결국 장소특정적 미술도 외부로 향한 장소적 문맥 회복의 절반은 실패하고 있는 듯하다.

4. 제안하는 공간을 향해서; 새벽 II +

수식에서 반올림은 느슨한 낙관으로 정확성을 희생시키지만, 절반의 실패에서 반올림은 '불가능하지 않다'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작가/작품이 품은 전시를 제안하는 공간(이하 제안공간)에 대한 기대는 잠재성을 지닌 채 꽃봉오리로 맺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제안공간에도 층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층위를 크게 '결핍', '유효', '충만'이라는 3가지 층위로 분류해볼 수 있을 듯하다.

제안공간에 있어서 핵심은 '작품-장소간 불가분성不可分性'이다. 더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지점은 작품이 놓이게 될 '미래의 전시장소(공간)'에 대한 미술가의 태도이다. '결핍'된 제안공간에서 이러한 미술가의 태도는 전형적이고, 작품-장소간 불가분성은 모호하다. 단지 언어적 의미로 공간을 제안하는 것에 머물고 만다. yBa의 탄생 배경이 되고, 새로운 전시공간 활용 형식의 효시가 된 <;프리즈Freeze>;(1988) 는 결핍된 제안공간의 전형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런던 도클랜드Dockland의 빈 창고를 전시공간으로 제안한 이 전시는 제도권을 벗어나 미술가 자신이 DIY(Do It Yoursef) 형태를 구축하는 모델이 되었고, 이후 작가들이 전시공간을 온전히 점유/제안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구축된 전시 모델(결핍된 제안공간)은 세계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일례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영국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Banksy가 열었던 〈거의 합법적이지 않은 Barely Legal〉(2006.09)의 경우, 전시공간이 단지 창고였고, 거의 홍보를 하지 않았지만 큰 인파를 끌어 모았다. 국내에서 결핍된 제안공간의 사례로는 <;공장 미술제>;[도4]가 대표적이다. 이 전시가 2회(2000)는 샘표 창동 공장을, 3회(2012)는 서천군 장항읍에 있는 금강중공업창고, 어망공장창고, 미곡창고를 전시공간으로 했기 때문이다. (1회와 4회는 기성 공간인 이천아트센터(1999)와 문화역서울284(2014)에서 열렸기에 제외한다.) <;주차장 프로젝트>;, <;골목 프로젝트>;, <;지하철 미술제>; 등의 프로젝트 전시도 사례에 포함된다. 이러한 전시들은 형식적으로 제안공간이지만 필연적으로 내용적 결핍을 수반한다. 미술작품이 좀비/유령 작품으로 변종되는데 힘을 실어준 것은 (미현시화된) 작품이 전시될 장소로 전형적인 공간(화이트 큐브)을 상상하는 미술가의 안일함이었다. 작품은 작가의 안일함으로 진부한 공간에 맞춰지면 진부함을 면치 못하고, 결국 좀비/유령 작품으로 변하게 된다. 따라서 결핍된 제안공간은 작품-장소간 불가분성이 긴밀하지 않으며, 시설로서의 대안공간이 직면한 문제, 즉 화이트 큐브로 흡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불안한 제안에 속해 있다.

'유효'한 제안공간은 통상적인 장소특정적 미술의 형식을 띄면서, 제안공간의 필요사항(작품-장소간 불가분성, 전시장소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서 자유로움을 갖는다. 장소특정적 미술은 기본적으로 '미래의 전시장소'가 설정되어 있고, 그 공간의 역사적·사회적 관계(외적 문맥)가 명확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작품은 그곳에서 장소적 정체성을 발화하며 강력한 존재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공간의 제안은 메마른 문맥의 회복을 가져오는데 유효함을 알 수 있다. 유효한 제안공간의 사례로는 신청사가 지어져서 사용되지 않게 된 구서울역(현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플랫폼 2008>;(2008)이나, 과거 일제강점기에 병원으로 건설되었다가 근현대 군의 기밀업무를 수행하는 기무사로 활용되었던 곳(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플랫폼 2009>;(2009), 해마다 예술가들과 함께 비무장지대(DMZ)가 가진 역사성과 장소성을 고찰하여 작업으로 제작·전시하는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등을 들 수 있다. (이 전시들은 고전적 의미의 장소특정적 미술이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형식의 전시들은 장소의 특성으로 인해 장소가 작품보다 우위를 점유하게 되는데, 이 때 미술가의 자율성은 심하게 훼손될 수 있다. 강렬한 장소성(역사적·사회적 의미)은 미술가를 압박하며 주체성을 갖지 못한 작품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제 좀비/유령이 사라진 그 곳에 장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림자에서 달아나거나 그것에 달라붙어 그것의 실체가 되면 된다. 그림자로부터 도피하는 제안이 '결핍'이라면, 실체가 되는 것은 '충만'일 것이다. '충만'한 제안공간은 그래서 전시공간이 작품을 삼키지 않는, 또한 미술가의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는 공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프랑스 개념주의 미술가 다니엘 뷔랑Daniel Buren의 "작품의 요점은 작품이 생산 되는 장소와 소비 되는 장소 사이 어딘가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느낌"(각주10)은 중요한 시사점으로 작용한다. 그는 작품의 이동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상실되는 '진실truth'(작품의 요점)과, 작품의 제자리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작업실' (안)의 중요성을 언급한다.(각주11) 결국 (각 개체의 성격을 기원에서 찾는) '기원의 오류'를 긍정하더라도, 탄생 장소가 작품의 속성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하지 못한다. 더불어 작품이 탄생지를 벗어났을 때 그 속성이 극도로 빈약해질 수밖에 없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작가의 노동 가치를 온전히 담고 있는 작업실은 제의의 장소이면서 전시의 장소이다.

(각주10) Daniel Buren(trans. Thomas Repensek), 'The Function of the Studio', October: Vol 10, 1979, Autumn, p.56.

(각주11) 위의 책, pp.53~56.

미술가는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작업실의 환경(크기, 분위기,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으며, 작업실이라는 장소를 작품의 문맥으로 연결시키게 된다. 또한 과정 중인 작품을 (혹은 완성 작품을) 수시로 관망하기 때문에 작업실은 하나의 전시공간으로 활용된다. 따라서 '충만'한 제안공간은 작가, 작품, 장소 사이의 정서적·심리적·물질적 문맥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작업실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픈스튜디오' 는 충만한 제안공간의 명확한 전시 형태로 볼 수 있다. 구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의 《화가의 아뜰리에》(1855)[도5]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와는 다른 형식의) 오픈스튜디오는 (근대적 전시공간 이전) 아마도 미술가의 작업실이 탄생하면서부터 행해졌을 것이다. 현재 자유롭게 전시하기 원하는 시대정신과 맞물려 DIY 형태의 전시가 활성화되면서 오픈스튜디오는 더불어 부흥하고 있다. 이제 오픈스튜디오는 세계 곳곳에서 제도권이든(국공립 및 사립 미술창작스튜디오), 비제도권이든 가리지 않고 대안적 전시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특히 오랜 전통을 지닌 영국의 오픈스튜디오는 전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열리고 있다. 또한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형태로 이태원의 '테이크아웃드로잉'의 '카페 레지던시'와 같은 단기 프로그램도 충만한 제안공간으로 주목된다.

이제 눈앞에서 좀비가, 유령이 자기의 실체를 찾아 고향으로 회귀하는 모습이 희미하게 그려진다.

5. 중력과 은총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홀로 맞이하는 새벽은 아름답지만, 쓸쓸하다. 돌아왔지만 반겨주는 이가 없다면, 외로움만 남는다. 인간은 아래로 잡아끄는 삶의 중력과 위로 상승시키는 구원의 은총 사이에 존재한다.(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작품은 아래로 잡아끄는 시선의 중력과 위로 상승시키는 숭고의 은총 사이에 존재한다. 작품이 현시화되는 순간, 작가와 작품은 '인정 투쟁'(악셀 호네트)을 시작하며, 인정 요구가 무시/묵살되는 순간, 존재근거를 상실해 간다. 따라서 어떤 층위의 제안(하는)공간이더라도 전시된 작품이 사람들의 시선에서 외면된다면, 존재성이 흔들린다. 제안공간은 상시적 전시공간이 아닐 가능성과 접근성이 떨어지는 위치에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고, 전시를 알릴 수 있는 네트워크나 자본도 빈약하다. 그래서 많은 관람자의 시선이 그곳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화이트 큐브와 스펙타클이 너무 많은 시선으로 무거운 중력에 휘청거린다면, 제안(하는)공간은 너무 큰 예술적 숭고의 은총으로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비현실적일 수 있다. 중력과 은총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

이 문제의 온전한 해답은 없다. 하지만 가능성은 보인다. 특정 지역에 존재하는 작업실들이 동시에 오픈스튜디오를 열어 많은 시선을 끌어오는 경우가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2008년에 문래예술창작촌에서 열린 '프레 오픈 스튜디오'를 들 수 있다. 이 오픈스튜디오는 20여 개의 작업실이 참여하여 시선을 모았다. (제도권의 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행하는 오픈스튜디오도 주목된다.) 영국의 사례는 우리를 흥분시킨다. 영국에서는 미술 축제처럼 지역 작가들이 함께 정기적으로 오픈스튜디오를 개최한다. '브로클리 오픈스튜디오Brockley Open Studios'(1992년부터), '브라이트 앤드 호브 아티스트 오픈하우스Brighton and Hove's Artists Open Houses'(250여 개의 작업실 참여), '콕핏 아트 오픈스튜디오Cockpit Arts Open Studios'(165여 개의 작업실 참여), '케임브리지 오픈스튜디오Cambridge Open Studios'(1974년부터, 200여 명의 작가들 참여), '그린 도어 아트 트레일Green Door Art Trail'(50여 명의 작가들 참여) 등 많은 오픈스튜디오 그룹들은 매년 전시공간을 제안하며 많은 시선을 불러오고 있다.

변칙도 존재한다. 전시 장소를 이원화한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3: 보더라인>;,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4>;가 그 한 예이다. 이 프로젝트는 DMZ 접경지역(강원도 철원군)만을 전시 장소로 시작하였으나[도6], 2013년부터 아트선재센터(서울)에서 동시 진행함으로써[도7], (화이트 큐브의 지원을 받았지만) 더 많은 관람자의 시선을 제안공간에 닿게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렇듯 제안하는 공간의 가능성은 성장하고 있다.

전시공간은 미술작품의 무덤이 되기도 하고 자궁이 되기도 한다. 새하얀 관 속에 있을 때 시체가 되고, 탄생의 근원에 있을 때 새 생명이 된다. 하지만 점점 제안된 공간은 대안이 보여주는 파격적 행보를 받아들이고, 제안하는 공간은 주류의 전시방식과 홍보양식을 베껴온다. 대척점에 있는 전시공간이 혼성모방을 한다. 무덤과 자궁이 결합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결합은 불사의 초인을 탄생시킬 것인가? 사산아를 낳게 할 것인가? 우리는, 아니 나는, 아직 (어쩌면 앞으로도) 그 결과를 알 수 없다.

다만, 제안하는 공간을 응원하고 있을 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