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지 기준, 소주·라면 수출 길 텄지만 섬유·의류 양보했다

김창훈 2014. 11. 13. 04:4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중 FTA 타결 이후

깜깜이 협상 논란 커지자 정부, 일부 품목 협상 결과 공개

유화·기계·철강·가공식품 등은 제품 만든 국가 원산지로 인정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막판 최대 쟁점이었던 품목별원산지결정기준(PSR) 협상에서 우리는 소주 같은 가공식품 수출길을 텄지만 대신 섬유와 의류, 전자기기 일부 상품에 대해서는 중국측에 양보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체 상품 PSR이 공개되지 않아 협상 전체의 득실을 따지기가 현재는 불가능하지만, 자칫 PSR 때문에 향후 대중국 수출이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중 FTA가 발효돼도 관세철폐 효과를 무효화시킬 정도로 파괴력이 큰 PSR 협상결과를 놓고 의구심이 커지자 산업통상자원부는 12일 품목별 협상 결과를 일부 공개했다.

석유화학제품, 기계류, 철강, 가공식품 등의 PSR은 한국측이 주장한 '세번(稅番ㆍtariff heading)변경기준'이 관철됐다. 이 기준은 수입한 원료의 세번이 완제품이 됐을 때 바뀌었다면 제품을 만든 국가를 원산지로 인정하는 것이다. 판단 기준이 명료하고 원료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가공무역 국가에 유리한 방식이다. 우리 수출기업들은 세번변경기준을 선호한다.

한중 양국은 FTA 협상에서 전자기기 등도 대부분 세번변경기준을 따르기로 합의했지만 일부 민감한 품목은 역내 부가가치기준(RVC)을 적용하기로 했다. RVC가 45%로 정해진 액정표시장치(LCD)는 우리나라에서 창출한 부가가치가 45% 이상이어야 한국산으로 인정받는다.

농수산품 중에서 신선농산품은 해당 국가에서 완전하게 생산된 것만 인정하는 완전생산기준(WO)이 적용되고, 소시지 햄 라면 등 가공식품들은 거의 다 중국 수출이 가능한 수준의 세번변경기준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협상 과정에서 논란이 됐던 대표적 품목이 소주다. 중국수출이 점차 늘고 있는 소주의 경우 PSR 때문에 자칫 수출길이 막힐 뻔 했다. 중국 대표단은 우리나라 희석식 소주는 제조공정상 원료인 주정공정에서만 발효가 이뤄진다는 점을 파악해, 소주 원료인 주정 발효공정을 별도 PSR로 다뤄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이에 윤상직 산업부 장관이 협상 도중 직접 진로소주 임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 후 중국 측 주장대로 합의하면 비관세 장벽이 생긴다는 것을 확인해 소주에 한해 예외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소주의 예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원료를 자국 내에서 조달하는 중국은 PSR 규정을 적극 활용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히든카드로 숨겨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협상 막바지에는 까다로운 RVC와 두 가지 기준을 조합해 판단하는 결합기준을 주장하며 한국측을 몰아붙였다. 석유화학 제품의 경우도 중국은 당초 세번변경기준에 RVC 50%를 합친 결합기준을 내세웠지만 끈질긴 협상으로 겨우 우리가 제시한 PSR이 수용됐다.

산업부는 전체 상품에 일일이 따라붙는 PSR 중 70~80%가 우리 안대로 반영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나머지는 절충안이나 중국 요구대로 결정됐다. 화학섬유 중 일부 상품은 두 가지 기준 중 수출업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기준이, 기계와 전자기기 중 일부도 RVC나 결합기준이 적용됐다.

결과적으로 중국이 결합기준을 요구한 상품 1,010개 중에서는 47개만 결합기준을 따르기로 합의됐다. 한미 FTA(74개), 한유럽연합 FTA(188개)에 비하면 적은 양이지만 중국 요구대로 PSR이 결정된 상품이 무엇인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산업부 측은 "상대국이 있는 FTA 원칙상 전체 상품별 양허 내용은 가서명 이후에야 공개할 수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통상전문가들은 PSR로 인한 충격이 큰 상품이 베일 뒤에 숨어 있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제현정 국제무역연구원 연구위원은 "한중 FTA 협상 성패는 전체 상품의 양허표와 PSR이 공개돼야 따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중 FTA의 치열했던 PSR 협상은 이전 FTA 때는 볼 수 없었던 경험이다. 통상 업무를 총괄하는 윤 장관조차 "14차 협상 하루 전 상품에 대한 쟁점들이 다 해소됐는데 PSR 문제가 타결 직전까지 길어질 줄은 몰랐다"고 실토했을 정도였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