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 "세금 늘려야 소득 재분배, 내수 회복, 양극화 해소 모두 해결"

송창섭 기자 2014. 10. 3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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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가 시동이 켜진 지 반세기가 넘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뛰기 시작한 한국 경제는 세계 산업사(史)에 '한강의 기적'이라는 신조어(新造語)를 만들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중간에 석유파동과 외환위기, 글로벌 신용위기라는 외풍도 겪었지만, 특유의 저력으로 이를 극복했다. 그러나 경제소득이 2만5000달러(1인당 GDP 기준)를 넘기면서 한국 경제는 급격한 노쇠(老衰)의 길을 걷고 있다. 9월 물가상승률이 지난 2012년 11월 이후 22개월 연속 2% 미만에 머무르자 디플레이션(경기와 물가의 동반 하락)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금융·통화 정책을 책임진 한국은행도 저성장, 저물가를 걱정할 정도로 문제가 간단치 않다.경험에서 우러나온 원로의 고언(苦言)은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이코노미조선>이 박승 전(前) 한국은행 총재를 만난 것은 난국을 타개할 만한 혜안(慧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가을의 문턱에 성큼 들어간 지난 10월7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만난 박 전 총재는 "지금은 보수, 진보 모두를 아우를 '대타협'이 필요한 시기"라면서 "지금의 난국을 헤쳐나가지 못하면 일본과 같은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한국은행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러다 성장동력마저 잃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금리인하 등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펴야 한다는 무언(無言)의 정부 쪽 의견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추가로 금리를 낮췄다간, 해외 자금의 이탈세가 커질 수 있다. 가계부채 증가도 걱정된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는 지금, '원로 경제학자'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의 조언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박 전 총재가 걸어온 삶의 궤적이 그렇다. 박 전 총재는 1988년 노태우정부 초대 경제수석으로 공직(公職)에 발을 들였다. 당시는 우리 사회 전반에 민주화 바람이 불던 시기였다.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자유화 물결이 거세지면서 산업 현장에서 근로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이듬해 건설부장관에 취임한 뒤에는 대한민국 주택사에 길이 남을 1차 신도시 개발 계획을 입안(立案)했다. 노태우정부 중반, 공직에서 물러나 학교로 돌아간 박 전 총재가 다시 세간의 중심에 선 것은 지난 2002년 제22대 한국은행 총재에 취임하면서다. 당시 세계 경제는 골디락스(물가 안정 속의 호황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공교롭게도 박 전 총재는 한국 경제의 냉·온탕 시기마다 중책을 맡아 활약한 셈이다. 1988년 대선 직후 초대 청와대 경제수석에, 2002년 김대중정부 마지막 해 한은 총재에 취임한 것도 우연의 일치치고는 의미가 있다.

세계 경제 장기불황 10년 이상 갈 것박 전 총재는 우리나라 경제학계에서 대표적인 성장론자로 꼽힌다. 그래서인지 현재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박 전 총재의 가장 큰 걱정도 '성장세가 꺾이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경제는 지난 1990년부터 약 15년간 고성장 저소비의 장기 호황을 누렸어요. 그리고 그 장기호황은 신자유주의와 중국 경제의 산업화가 이끌었죠. 그런 장기 호황의 거품이 터진 게 바로 2008년 미국 금융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매우 느리고 불안정하게 회복되는 과정이죠. 앞으로 세계 경제는 장기 저성장 국면에 진입할 겁니다. 회복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 걸릴 거예요."

박 전 총재는 그동안 세계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중국 경제의 성장 견인력 약화와 세계적 저출산 고령화로 미국은 3%, 일본은 1~2%, 유럽은 1% 정도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러한 전 세계적 저성장 기조는 우리 경제의 장기 전망마저 어둡게 한다. 박 전 총재는 세계 경제가 저성장 기조를 그릴 경우 한국 경제 역시 연간 3% 정도의 성장세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성장론자인 그가 이토록 한국 경제를 걱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어요. 우선 성장동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른바 '성장위기'죠. 그리고 소득분배 순환이 경색되고 있다는 점도 걱정거리입니다. 쉽게 말해 돈이 돌지 않고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민생위기'예요."

박 전 총재는 최근 불거지고 있는 양극화 현상도 결국 소득분배 순환이 막혀서 생긴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성장 과실을 대기업이 독점하면서 중소기업, 가계소득이 정체돼 있다는 게 박 전 총재의 생각이다.

"과거 1975년부터 1997년까지 통계를 보면 경제성장률이 8%면, 가계소득도 8% 늘고, 법인소득도 8% 늘어나는 등 경제가 전반적으로 선순환, 균형성장을 했어요. 그런데 2000~2010년 평균치를 보면 경제가 4% 성장했는데 가계소득은 2%밖에 늘지 않았고 법인소득은 16% 증가했어요. 특히 대기업 소득 증가율은 이보다 훨씬 더 심할 겁니다. 지금은 국민소득 증가의 약 90%가 기업이 독점하고, 가계로는 국민소득 증가분의 10% 정도만 가는 구도예요. 주식시장이 침체하는 근본 원인도 가계소득 감소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기업이 벌어들인 소득이 가계로 원활하게 가지 못하면서 생기는 계층 간 갈등은 두고두고 우리 경제의 성장을 가로막을 불안요소다. 박 전 총재가 재도약을 위해 강력한 구조개혁과 함께 주문하는 것도 소득분배 순환력을 높이는 일이다.

그는 소득분배 순환력을 높이는 해법으로 증세(增稅)를 제시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 경제정책의 가장 큰 딜레마는 증세를 안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막혀버린 겁니다. 현실적으로 지금 증세를 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제가 주장하는 소득재분배, 내수경제 회복, 양극화 해소도 결국 증세만이 유일한 해법이죠. 최근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담세율(擔稅率·소득에서 세금 납부가 차지하는 비율) 20%가 아니고서 복지는 꿈도 꾸지 말라고요. 그런데 보세요. 대통령이 '절대 증세는 안 한다'고 선을 딱 그어놓으니까 최경환경제팀 입장에서는 담뱃값이나 주민세 등을 올리는 거예요. 증세는 안 하면서 돈은 필요하니까 그런 거죠. 한국은행에 돈을 풀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요."

박 전 총재는 "법인세, 소득세, 부가가치세 등을 중심으로 증세를 해, 담세율을 23% 수준까지 올리면 60조~70조원 정도 재원(財源)이 마련될 것이며, 이를 사회 양극화 해소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박 전 총재는 노사관계 등 강력한 사회 구조 개혁을 위해서는 진보세력이, 증세에 대해서는 보수세력이 각각 조금씩 양보하는 '대타협'이 전제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증세의 기본 골격은 고소득층과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이 양극화 해소에 동참하는 이상적인 구조다. 하지만 현 정부의 정책기조로는 쉽지 않다. 증세의 '증'자만 나와도 당장 보수층의 반발이 불가피하다. 강력한 정치적 우군(友軍)의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것을 정부가 시도할 수 있을까.

"제가 말한 증세는 거둬들인 세금을 정부가 먹자는 게 아니에요. 저소득층에게 돌려주자는 거죠. 빈부격차를 줄여 국민소비를 늘리게 만들면 경제성장률은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정부의 역할은 이를 국민들에게 납득시키는 데 있습니다. 빌 게이츠가 자기 재산의 70%를 내놓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지 않습니까.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외계층의 이익을 고소득자가 대변해주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위기로 치닫는다'고요. 피케티의 생각도 이와 같아요. 빈부 격차가 커지면 '자본주의 이거 무너뜨리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나올 겁니다. 우리 부유층과 대기업에게는 지금 빌 게이츠의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국가 중 소득부담율과 사회보장 지출이 가장 낮은, 다시 말해 소득재분배가 가장 취약한 나라 아닙니까."

해외 유수의 경제연구기관들은 한국의 경제구조가 이제 수출 주도형에서 내수 주도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점과 관련해 박 전 총재도 생각이 같다. 그리고 현 경제팀의 초이노믹스(최경환 경제부총리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공감을 표시했다. 박 전 총재는 1960~70년대처럼 자본이 투자처를 찾아가는 식의 고도성장기 투자 주도형 성장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는 데 인식을 함께 했다. 그가 '정부가 증세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의 밑바탕에는 '선진국형 경제체제를 마련해야 하는 한국 경제도 앞으로는 투자가 아닌 소비가 경제성장을 주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런 측면에서 초이노믹스의 핵심 정책 중 하나인 사내유보금 과세에 대해 적극 찬성한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박 전 총재는 지난해 6월28일 서울 역삼동 리츠칼튼 호텔에서 열린 사단법인 '창조와 혁신'의 조찬포럼에서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은 '불임소득'이며, 우리나라의 저성장의 요인인 만큼 과세를 통해 소득재분배 재원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해 국내 경제학자로는 사내유보금 과세를 가장 먼저 주장했다.

1. 박 전 총재가 2006년 3월31일 오후 한국은행 별관 강당에서 이임식을 마친 후 임직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2. 지난 2004년 10월 국회 재경위의 한국은행 국감에서 박승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의원들에게 답변하고 있다.

(사진 : 조선일보DB)

초이노믹스, 취지는 공감하지만 부동산으로는 한계다만 부동산을 활용한 내수 경기 부양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현재 한국 경제는 돈을 아무리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있다"면서 "통화당국인 한은에게 돈을 풀라고 요구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걱정스럽다"고 진단했다. 박 전 총재의 걱정은 지금의 통화확대 정책이 '잃어버린 20년'을 겪어야 했던 일본의 전철을 답습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일본은 경기침체를 재정확대로 해결하자 주식, 부동산 등 소위 자산시장에 거품이 생겼으며 이는 추후 거품 붕괴로 이어지면서 일본식 장기 불황의 단초가 됐다.

박 전 총재는 부동산을 통한 경기부양은 가계부채나 부동산 거품과 같은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금 정부 정책이라는 게 빚내서 집 사라는 거 아닙니까. 소득은 늘지 않는데 빚은 많아지니 소비가 줄고 그래서 내수가 침체됐는데 되레 빚내 더 집을 사라니요. 안 그래도 한국은 집값이 세계적으로 비싼 나라 아닙니까. 오히려 내리도록 해야죠. 집값 상승은 일시적으로는 좋지만 길게 보면 국민경제를 어렵게 하는 겁니다. 지금은 돈이 없어서 집을 못 사는 거예요. 집값이 올라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한국은 저출산, 고령화 등으로 이제 구조적으로 집값이 꺾이게 돼 있어요. 집값이 안정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집을 안 사고 전세를 택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전세가격 상승은 주택시장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고 봐야 합니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집값을 올린다면 그건 우리 후손들이 누려야 할 소득을 미리 앞당겨서 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후손들의 내 집 마련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죠. 그런 면에서 금단(禁斷)현상과 똑같아요. 담배 끊는 고통이 힘들어 '한 대만 더 피고 끊는다?' 이게 지금의 부동산 정책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집값은 오르기 시작하면 금세 오릅니다. 이제 담배(부동산 부양정책)는 확실히 끊어야 해요."

- 박 전 총재는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지금보다 내려가면서 우리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이라고 걱정했다.

남북 협력, 미국 뉴프런티어 정책과 맞먹는 효과달러화 강세와 엔화 약세는 우리 경제의 또 다른 걱정거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호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러는 사이 수출기업들의 경영난은 갈수록 커지는 모습이다. 박 전 총재는 "달러화 강세가 앞으로 2~3년간 계속될 것이며, 미국의 양적완화(QE) 정책을 계기로 일본의 엔화 약세는 오래가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박 전 총재는 중국 경제에 대해서는 적잖은 우려를 표시했다.

"지금 중국 경제는 구조적인 전환점에 따른 성장통을 앓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약 7.5%씩 성장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 10년 뒤에는 아마 성장률이 5%대로 내려갈 겁니다. 지금과 같은 시스템으로는 중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지금 중국을 대표하는 기업은 죄다 국영기업 아닙니까. 그런 모습으로는 힘들죠. 그렇다고 중국이 내수 중심으로 돌아서는 것도 걱정거리예요. 아시다시피 1990년대 철강, 조선, 시멘트, 기계, 화학 등 중간재 산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사양(斜陽)산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들 업종이 살아난 이유가 뭐겠습니까. 중국 때문이죠. 중국은 경공업, 농업, 한국은 중공업으로 역할이 분할돼 왔었는데, 이게 겹치기 시작한 겁니다. 삼성전자의 대항마로 샤오미(小米)가 거론되는 거 보세요. 결국 현재로선 더 첨단산업으로 뚫고 나가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중국투자를 줄이고 중국과 차별화되는 산업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박 전 총재는 노태우정부와 김대중·노무현정부 시절 공직자로 활동한 탓에, 경제관도 균형감이 있다는 평가다. 소득재분배를 주장하면서도 대기업과 제조업 중심의 성장은 계속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장기 저성장의 침체를 딛고 나가는 데 남·북한 간 경제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박 전 총재는 북한의 값싼 노동력과 남한의 자본, 기술력을 결합시킨 남북 경제합작(合作) 모델에 대해 "미국의 대공황을 이겨낸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정책과 같은 효과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제민주화 정책과 관련해서도 기업의 진입을 가로막는 식의 강제적 방법보다는 경제성장 과실의 혜택을 국민 모두가 똑같이 누리게 하는 이른바 성장 과실의 균점(均霑)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도록 지원해주되, 이를 혼자만 독식하기보다 국민 모두에게 나눠주도록 하는 조정자다.

지난 2월 박 전 총재는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 원서(原書)를 구입해 정독했다. 자본주의 기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선동(煽動)서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 책에 대해 그는 어떤 느낌을 갖고 있을까.

"눈이 침침해, 끝까지 꼼꼼히 읽은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피케티의 이론을 높이 평가합니다. <21세기 자본론>은 정치적 선동서적이 아니라, 순수한 이론서예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가리켜 누가 선동서적이라고 합니까. 이론서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18세기 이후 가장 성공한 체제라고 하는데, 동시에 결점도 많지 않습니까. 피케티는 그걸 지적한 겁니다. 다만 현실화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르겠죠. 그렇지만 언젠가는 '종합순자산 과세제도'와 같은 피케티 이론을 현실화시키는 나라가 나올 겁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레닌이 실천한 것처럼 말이죠."

박 총재의 아호는 청도(靑稻)다. 전북 김제 출신의 그는 푸른 김제 평야 들녘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땀내, 농촌의 흙내 그리고 푸른 벼 냄새를 잊지 못해 아호도 '푸른 벼'라는 뜻의 청도로 정했다.

평생 세계 경제의 변화상을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이코노미스트의 길을 걸어왔지만, 물질만능주의는 철저하게 배척한다. 평소 그는 "물질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특히 공인이라면 재물에 관해서는 남보다 한 발 뒤로 물러서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때문에 한국은행 총재 시절 자식들에게 재산을 한 푼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물질에 대해선 엄격하게 선을 그어왔다.

물질과 정신 간 괴리가 세월호 참사 원인그 역시 지난 4월 발생한 세월호 사건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박 전 총재는 세월호 사건을 "물질과 정신 간 괴리로 생겨난 공동체 의식 부족이 만들어낸 참사"라고 진단했다.

"지금 우리는 물질은 선진 단계인데 정신은 후진 단계에 있어요.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 이게 바로 후진적 생각이죠. 그리고 이건 삶의 질이 쌀이나 옷으로 결정될 때 생겨나는 생각이죠. 이 시기에는 사유재(私有財·Private Goods)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만드는 삶의 질은 사유재가 아니라, 환경, 의료, 사회보장, 문화와 같은 공공재(公共財·Public Goods)가 만드는 겁니다. 공공재시대에는 나 혼자만 잘살 수 없어요. 함께 잘살아야죠.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밥과 옷 등 사유재시대의 의식구조에 머물러 있어요. 이게 바로 세월호 사건으로 나타난 겁니다. 물질은 압축성장이 가능하지만, 정신은 그럴 수 없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그동안 물질의 압축성장은 이뤄냈지만, 정신은 못 따라갔다는 반성이 듭니다."

인터뷰를 끝마치고 서재를 둘러보니 책상 바로 옆 벽면에 걸린 액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2006년 3월 한국은행 제주본부 직원들이 함께 만들어 준 액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한국은행과 한국은행 직원을 가장 사랑한 총재님, 한국은행 독립성과 위상을 높이기 위해 가장 몸부림친 총재님,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심 없이 고뇌한 총재님2006년 3월31일 한국은행 제주본부 직원 일동"

박 전 총재가 내심 흡족한 얼굴로 액자를 쳐다봤다.

▒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는…1936년 전북 김제 출생, 54년 전북 이리공고, 61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74년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 61년 한국은행 조사부 조사역, 1976~2001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88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89년 건설부장관, 99년 한국경제학회 회장, 2002~2006년 제22대 한국은행 총재, 저서 - <경제발전론>(박영사·1976년), <한국경제정책론>(박영사·1983년), <한국경제의 역동성은 위기에서 나온다>(한국은행·2006년),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회고록)>(한국일보사·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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