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가기 전에..아래로 흘러 기원이 되는 설악산 수렴동계곡길
강원도 인제, 고성, 양양, 속초까지 걸쳐져 있는 설악산은 한라산과 지리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누군가는 제2의 금강산이라 말하고, 또 어떤 이는 금강산을 넘어서는 절경의 산이라 칭송한다. 내설악과 외설악, 남설악 지역까지 어느 곳 하나 덜 하지 않은 수려한 산세와 기암괴석, 그 속에 굽이치는 계곡과 폭포, 경건한 암자와 사찰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조선시대 그 이전부터 숱한 이들의 이야기를 감싸안은 산, 사시사철 한시도 지루하지 않은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산. 설산(雪山)·설봉산(雪峰山)·설화산(雪華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신성한 기운을 품은 설악산 속으로 향했다.

수렴동계곡 코스
백담사 → 영시암 → 수렴동대피소(난이도 하, 약 5km, 편도 1시간 30분) 백담 출발 대청봉 코스백담사 → 수렴동대피소 → 봉정암 → 대청봉(난이도 중상, 약13km, 편도 7시간) 설악동 출발 대청봉 코스소공원 → 비선대 → 양폭대피소 → 대청봉(난이도 중상, 약11km, 편도 6시간 30분)

수렴동 대피소에서 두 번째 밤
수렴동 대피소에 이르기 이틀 전, 한밤중에 속초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설악동 탐방 지원 센터에서 등산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완만한 코스를 따라 양폭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에 올랐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국립공원의 시설은 어렵지 않게 길을 연결해 준다. 다음날, 멀리 동해까지 내다보이는 대청봉과 중청봉 그리고 소청봉을 지나 수렴동 대피소로 향했다. 설악산에서의 두 번째 밤을 보내기 위해서다. 1000미터가 넘어가는 고지부터는 가을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풍경 그대로 감동이 되어 발걸음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나뭇잎들은 대부분 땅으로 떨어져 겨울 숲의 면모를 보였다. 전날 내린 서리와 아침에 머물던 안개는 햇빛이 비추지 않는 어느 구석에서 얼음이 되어 있었고, 아무리 가파른 고개를 헐떡이며 넘어도 동해를 넘어오는 바람에 몸은 이미 차갑게 식었다. 산은 마치 무엇보다 부지런하다는 것을 뽐내고 있는 듯 했다. 겨울산 같은 황량한 풍경은 산 중턱에 자리한 봉정암까지 내려와 있었다. 야영을 하지 않고 대피소를 이용할 것임에도 가을과 겨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산으로 가자니, 배낭 무게는 묵직해졌다. 추운 날씨에 대비한 보온 장비들 때문이다. 배낭은 무겁고 길은 길기만 했다. 결국, 봉정암에서 수렴동 대피소로 향하는 길에 한시간 정도 야간 산행을 해야만 했다. 숲에 쌓여있는 대피소의 작은 불빛을 보자 온몸의 촉각이 곤두서는 두려움이 사그라들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무사히 오셔서 다행입니다." 대피소에는 보통 일몰 한시간 전까지 도착해야 한다. 절대적 규정은 아니지만, 여러 안전 사고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무언의 약속이다. 그러나 이날의 나처럼 등산 시간이 길어져 밤중에 대피소에 도착하는 경우가 있다. 대피소 직원은 그런 경우 예약자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의 위치와 대피소 도착 예정 시간 등을 물어보고, 조치를 취한다. 하지만 설악산의 깊고 깊은 산세는 나와 직원의 통화를 단절시켰다. 나는 그저 걸어야 했고, 직원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서로를 마주하는 반가움에 인사를 나누고, 따끈한 대피소 자리를 배정받았다. 옆 자리의 다른 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만큼의 '소음'을 일으키며, 짐 정리를 했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두 다리의 근육들은 '살려줘요!'를 외치는 듯 했다. '하룻밤 잠을 자고 나면 살아날테니, 걱정말아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대피소표 저녁 식사(즉석밥에 참치통조림을 부어 비빔)를 즐기고, 자리에 누워 뒹굴거렸다. 산 속에서의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불안이 언제 있던 일인지, 바로 아득해졌다. 밤 9시, 대피소 직원은 취침실 문을 열고 말했다.
"소등하겠습니다."

촉촉하게 작렬하는 가을길
대피소의 새벽은 빠르게 시작된다. 해가 뜨기 전에 등산을 시작하는 이들도 있고, 출발 전 아침식사를 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 가운데 나는 얼굴까지 모포를 뒤집어 쓰고 단잠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곧 대피소는 부산스러워졌다. 가을비가 오셨기 때문이다. 아래부터 올라오던 등산객들은 비를 피해 대피소로 몰려 들었다. 커피 한 잔 마실까 생각하며 취사실로 향했지만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들어차 있었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떨어진 낙엽에 물빛이 아른거릴만큼 내리던 비는 오전 9시경 그쳤다. 사람들은 길을 이어가기 시작했고, 나 역시 느릿느릿 짐을 챙겼다. '더 머물고 싶다. 설악산에 더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 수렴동 대피소에서 산행 초입인 백담사 입구까지는 1시간 30여 분이 걸린다. 그 거리를 두고 수렴동에서 하루 머문다는 말을 듣고 설악산을 많이 다닌다는 누군가가 뭐하러 그곳에서 잠을 자냐고 물었다. 나는 그저 설악산 어느 곳에서건 머물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능한 한 오래. 하지만 이런 희망은 마음일 뿐이다. 설악산의 매력을 느껴보았으니, 이번엔 답사라 생각하고 다음에 다시 설악의 정기를 받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대피소를 뒤로 했다.
아침에 내린 가을비는 온 숲을 촉촉히 적셔놓았다. 구름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미는 햇빛이 비출 때면 나뭇잎들은 저마다의 단풍색을 반짝였다. 전날 밤엔 볼 수 없었던 가을날의 단풍길이다. 정상에서부터 내려오는 초겨울의 기온은 아직 이곳까지 미치지 못했다. 수렴동 계곡을 따라 나무가 우거진 숲길이 이어져 있다. 수렴동 계곡은 깊은 골짜기의 그것과 생김새가 다르다. 목이 상당히 넓고 자갈밭이 펼쳐져 있어, 자칫 강줄기로 오인할 만한 풍경이다. 단풍놀이, 가을 소풍을 나온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웃음꽃을 피우고, 가지고 온 식사나 간식을 나눈다. 꽃과 단풍 앞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천진난만한 아이의 미소를 띄운다. 그 모습은 실로 환하게 미소짓게 하고 마음 훈훈하게 만드는 자연스런 또 하나의 풍경이다.

천만년 이어질 수천의 기원
백담사로 향하는 길 1.2km 지점에 백담사의 부속암자인 영시암이 있다. 영시암은 조선시대 때, 속세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어느 선비의 각오가 담겨져, '화살 시(矢)자'를 사용해 활 시위를 떠난 화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현대에는 '영원토록 배푸는 암자'라는 의미로 불리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암자에 도착해 맑은 샘물로 목을 추기고 경내를 둘러보니, 주변 텃밭에서 갓 수확한 무를 하나씩 봉지에 담는 보살님이 계셨다. 누구나 한 통씩 무료로 가져갈 수 있었다. 이렇듯 영시암에서는 종종 제철 채소들을 오고가는 중생들에게 나누어 준다. 니 또한 가져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서울까지의 멀다면 먼 길이 욕심을 버리고 감사의 마음만을 품게 해 주었다.
영시암을 지나 계곡은 계속 이어졌다. 멀리 설악산의 봉우리들과 공룡 능선 등이 들쑥날쑥한 모습으로 하늘과의 경계를 구분짓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라 구름은 많았지만, 간간히 비춰지는 파란 하늘에 마음도 편안해졌다. 무엇보다 땅을 보고 걷지 않아도 되는 흙길에 모든 시름을 사뿐이 밟으며 걸을 수 있어 좋았다. 넓게만 바라보던 풍경에 눈이 익숙해지자 계곡 양 옆으로 펼쳐진 자갈밭 위에 쌓여진 낮은 돌탑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그 옆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돌탑들이 마치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시선을 사로잡았다. 도대체 이게 얼마나 될까? 작은 산 위에 촘촘히 박힌 나무들을 헤아리는 것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말 많은 이들이 각자의 희망과 추억으로 이곳에 낮지만 깊은 탑 하나씩을 세운 것이다. 돌탑의 행렬은 백담사까지 이어진다. 그 모습이 단풍과 어울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을 펼쳐보였다. 백담사는 대청봉에서 사찰까지 100개의 웅덩이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시대 진덕여왕 때 한계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후 수 십 차례 소실되었다가, 1957년 현재까지 이어지는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외설악의 신흥사와 함께 설악산 양대 사찰로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곳이다. 백담사를 둘러보고, 사람들의 바람 소리와 계곡의 물소리를 뒤로 했다. 어느새 내 마음도 어떤 작은 기원을 하늘과 산과 계곡을 향해 빌고 있었다.
백담사 입구에는 백담분소가 있는 용대마을까지 오고가는 셔틀버스가 다닌다. 7km에 이르는 길을 걸으면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되고, 버스를 이용하면 20여 분이 걸린다. 단풍놀이 온 사람들과 함께 버스에 올라, 설악산 단풍 길을 조금씩 벗어났다. 산자락의 단풍은 예보대로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기에는 더없이 좋은 순간의 풍경이었다.
'곧, 다시 만나자.' 설악산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설악산국립공원관리공단
http://seorak.knps.or.kr 강원도 속초시 설악산로 833번지(설악동) / 033-636-7700 / 입장료 3500원(성인) / 주차 4000원(3시간) 백담탐방지원센터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대중교통설악동 소공원 : 서울 → 속초고속버스터미널 → 소공원주차장 (20분, 7, 7-1번 시내버스) 백담분소 : 동서울 → 백담버스정류장(2시간 10여분) → 백담사입구(20여분, 셔틀버스, 2300원) [글과 사진 김애진(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451호 (14.11.04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티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