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후손'이라는 주홍글씨..역사의 비극

2014. 8. 2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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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80]유령처럼 떠도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 상처만 입은 기부행위…"우리는 이웃을 위한 온정도 색안경을 쓰고 본다"

2008년 11월 13일 '사랑의 열매'로 잘 알려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창립 1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기부 내역을 공개했다.

이 때 떠오르는 스타 '문근영'이 2003년부터 2008년까지 8억 5천만원을 기부해 개인 기부로는 가장 많이 온정을 베풀었다고 밝혔다.

그때까지도 연예계를 중심으로 이러저런 기부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역시 문근영'이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다음 날 보수논객이라는 지만원이 엉뚱하게 '문근영 띄우기'는 좌익과 빨치산이 벌이는 심리전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기괴한 사상논쟁으로 비화됐다.

지만원은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문근영의 선행은 칭송할 만하지만 좌익과 빨치산은 이를 계기로 '위대한 천사 문근영이 빨치산의 손녀라는 것을 연결하여 빨치산은 뿔 달린 사람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지화하려는 심리전'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벌어진 논쟁을 통해 한국전쟁이 끝난 지 55년이나 지났으나 지금까지도 그 상처와 좌우대립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논쟁의 역사적 배경은 문근영의 외할아버지가 전쟁 당시 빨치산의 일원이었고, 체포된 뒤 오랜 기간 수감생활을 한 장기수란 점이다.

무덤에 묻혀 있는 류낙진이 자기로 인해 외손녀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봤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문근영이 연예인이 되겠다고 졸랐을 때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출연료를 받으면 어려운 이웃과 북한 동포를 돕는데 쓰겠다'면 허락하겠다던 그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문근영 말고도 집안 어른의 좌익활동 때문에 고초를 겪은 유명인사는 부지기수다.

문인들만 해도 시인 고은, 소설가 이문열·김성동·김원일·김원우 형제 등 많은 분들이 있다.

정치인들 중 2002년 민주노동당 대선후보였던 권영길이 '빨치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 권우현은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1954년에 경남 산청에서 총살됐다.

노무현 역시 당내 경쟁자들로부터 '빨치산의 사위'라서 대선 후보로는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우리 사회에서 빨치산이라는 굴레가 세대를 넘어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데 얼마나 효과적인 무기인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류낙진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입산해 회문산,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2년 체포된 뒤 20년 넘게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광주지역 재야인사들로 구성된 '류낙진 선생 석방추진위원회'의 석방운동에 힘입어 1999년 광복절특사로 가석방됐다.

류낙진이 감옥에 있는 동안 남동생 영선 씨가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에게 사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가정이 풍비박산되자 류낙진의 아내, 그러니까 문근영의 외할머니 신애덕 여사가 겪은 고통은 어떠했는지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공무원으로 맞벌이하는 문근영 부모 대신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연예계에서 스타가 된 외손녀를 따라다니는 '매니저'를 하고 있으니 인생의 아이러니다.

류낙진은 2005년 4월 1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유골은 경기도 파주 보광사 경내 '통일애국투사묘역'에 안치됐다.

그러나 한달 후인 5월 5일 반북. 보수단체 회원들과 파주지역 노인회 등 130여 명이 몰려와 묘비를 동강내버렸다.

이들이 밝힌 훼손 이유는 빨치산에게 통일애국투사라는 호칭을 붙이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빨치산 출신은 살아서는 고문과 감옥이고, 죽어서도 무덤에 편안히 누워있지 못하는 세상인 셈이다.

그러면 류낙진이 몸담은 빨치산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역사 속에서 사라졌나?

◈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 빨치산 투쟁으로 전환하다

남한에서 빨치산 투쟁이 벌어진 것은 1948년 2월 유엔이 38선 이남에서라도 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후 2.7구국투쟁, 제주도 4.3사건, 여수순천사건 같은 좌익이 주도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이 격화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리산·태백산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잇따른 군경의 토벌작전에 밀려 세력은 점차 약화됐다.

국방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남한에 잔존해 있는 빨치산은 지리산 이현상 부대 100명을 비롯해 460명 정도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무너져가던 빨치산 투쟁은 1950년 9월 인민군의 전면 후퇴를 계기로 다시 격화된다.

9.28수복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노동당원,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설쳐대던 남한 좌익은 전선의 후방에서 본격적인 유격전쟁을 벌인다.

이들의 규모는 국방부 공식 추정에 따르면 양구. 평강. 곡산. 양덕 일대에 약 1만 명, 오대산·소백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 일대에 약 1만 5천 명으로 모두 2만 5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이 후방에서 파괴활동을 벌이자,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0월 15일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국군 제3군단을 창설해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전선에서 3개 사단을 빼냈으니 결과적으로 빨치산 투쟁이 인민군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다.

국군은 주로 겨울을 택해 조직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가장 주안점을 둔 작전은 빨치산의 식량 공급선을 원천적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주민을 대대적으로 소개하거나 '식량배급제'까지 실시해 빨치산을 아사 직전으로 몰아갔다.

설상가상으로 1951년 봄부터 산중에서 재귀열이라는 열병이 유행해 수많은 빨치산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군경은 토벌작전 와중에 엉뚱하게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했다.

국군 11사단은 1950년 11월부터 1월 사이에 전남 함평군과 장성군, 광산군에서 민간인 258명을 집단학살했다.

그것도 성에 안 찼는지 11사단은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 들이닥쳐 1951년 2월 9일부터 사흘동안 죄 없는 민간인 719명을 사살했다.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359명이 16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이와 소년. 소녀였다.

도대체 이 전쟁은 총만 들었다 하면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구분하지 않고 총질을 해댔으니 죄없는 무수한 양민들만 희생된 셈이다.

전쟁 중 서울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은 소설가 박완서 씨는 이렇게 고백했다.

"욕먹을 소리지만 이런저런 세상 다 겪어보고 나니 차라리 일제시대가 나았다 싶을 적이 다 있다니까요. 아무리 압박과 무시를 당했지만 그래도 그 때는 우리 민족, 내 식구끼리는 얼마나 잘 뭉치고 감쌌어요? 그러던 우리끼리 지금 이게 뭡니까? 이런 놈의 전쟁이 세상에 어디 있나요? 같은 민족끼리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형제 간에 총질하고 부부 간에 이별하고 모자 간에 웬수지고 이웃끼리 고발하고 한 핏줄을 산산이 흩뜨려 척을 지게 만들어 놓았으니…"

◈ 남북이 버린 '빨치산'…살아남은 자만 고통 속에서 스러져가다

1952년 2월 8일 종료된 토벌작전에서 빨치산은 사살 7,000여 명에 포로 6,000여 명이라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빨치산을 지도하고 그들이 추앙했던 박헌영 부수상 겸 외상이 북한에서 숙청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박헌영을 따라 월북한 남로당파 대부분이 처형을 당하거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휴전이 임박하자 김일성은 패전에 대한 속죄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늘 거북스럽게 여겨온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파를 희생양으로 올렸다.

박헌영에게는 미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 남한 내 민주세력의 파괴, 북한정부의 전복이란 세 가지 죄목이 씌여졌다.

그리고는 박헌영을 지도자로 옹립하고 있는 남한 내 빨치산들을 내치기로 결정했다.

휴전협상에 참가한 유엔군 측 대표단도 이상한 기류를 발견했다.

한 관계자의 회고를 들어보자.

"북한은 기나긴 협상동안 한 번도 남한의 빨치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 측에서 지리산과 소백산맥 일대에 남은 유격대 천여 명을 안전하게 보내줄테니 데려가라고 제안한 적이 있다. 남한의 치안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북측은 이 제안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휴전협상에는 상대방 후방에 남은 물자와 장비의 철거, 전사자의 시체 발굴과 이송에 관한 조항까지 있었으나 분명히 생존해 있는 빨치산에 대해서는 끝내 단 한 줄의 합의사항도 없었다"

남과 북 모두 빨치산을 버린 것이다.

마침내 1963년 11월 12일 최후의 빨치산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 총상을 입고 체포되면서 빨치산 투쟁은 한반도에서 사라졌다.

지리산 일대에서 4년간 토벌대를 이끌고 빨치산을 소탕했던 차일혁 총경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물었다.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봐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지리산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군경과 빨치산들에게 물어보라. 너희들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혹은 공산주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자 몇 명이나 있겠는가?"

CBS노컷뉴스 임기상 선임기자 kisangli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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