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나마스테] 대하소설 '변경' 후속작 준비하는 소설가 이문열

2014. 7. 14.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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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의 뒷세대 기본 틀로 등장.. 질곡의 1980년대 그려낼 것"

이문열 대하소설 '변경'은 한 작가의 성장소설이자 당대의 사회와 문화, 정치적 배경을 종합적으로 망라한 거대한 '벽화'로 불린다. 가장은 3남매와 만삭의 아내를 남겨두고 홀로 월북했고 남은 이들은 간난신고의 세월을 남쪽에서 견뎌야 했다. 이들 가족이 살아남은 개인사이자 현대사가 다양한 에피소드를 업고 흥미롭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변경'이다.

제목 '변경'은 말 그대로 변두리라는 의미로 미국과 구소련으로 상징되던 두 제국의 끄트머리, 그 변경이 맞닿은 한반도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쪽에 남은 월북한 이동영의 장남 명훈과 차남 인철, 장녀 영희와 막내 옥경의 삶을 각각 따라가는 구성이다. 4·19가 발아된 1950년대 후반부터 '10월유신'이 발동되던 1970년대 초까지가 배경이다.

전 12권으로 이루어진 이 대하 장편은 1986년 집필을 시작해 12년 만인 1998년 완간을 보았다. 출세작 '사람의 아들'이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평역 '삼국지' 같은 밀리언셀러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50만부 넘게 팔려나가던 터에 2003년 이문열은 이 책의 절판을 선언했다. '홍위병' 발언이 도화선이 돼 급기야 그의 책을 불태우는 퍼포먼스가 집 앞에서 벌어진 사태의 충격 때문이었다. 다시 10여년이 지난 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는 이 대하소설을 지난해 6월부터 1000매가량을 고치고 새로 써서 최근 세상에 내놓았다. 처음 집필을 시작한 지 28년 만이다.

이 긴 소설의 첫머리는 인철이 등굣길에 하이칼라 신사복 차림의 남자가 나타나 풀빵집에 데려가 아버지에 대해 묻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하이칼라가 소곤거리듯 "실은… 네 아버지의 오랜 동무란다"고 말할 때 초등학교 5학년짜리 어린아이는 "문득 세상이 고요해지면서 알 수 없는 한기가 온몸에 오싹 소름을 돋게 했다"고 썼다. 아버지라는 말 자체에 짓눌려 잠시 멍해 있던 '철'이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대답한 말은 "저는… 아버지가 없어요"였다. 경찰이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어머니는 대경실색한다. 이 상황에서 아이들 아버지이자 지아비인 그 남자는 유령처럼 그들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일 따름이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밤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도피한다. 남편은 이미 없는 존재로 치부했지만 나타나면 그게 더 큰 재앙이다. 이문열은 소설에서 이렇게 썼다.

'아아, 아버지, 아버지.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된 사진조차 본 적이 없는 그 막연한 추상, 그러나 집안 구석구석 살아서 떠돌며 끊임없이 재난과 불행의 먹구름을 몰고 오던 두렵고 음산한 망령, 정액 몇 방울의 의미로서는 너무 무겁던 내 삶의 부하(負荷)였으며, 알 수 없는 원죄를 내 파리한 영혼에 덮어씌우던 악몽, 깊은 밤 선잠에서 깨어나 듣던 어머님의 애절한 흐느낌과 몽롱한 내 유년 곳곳에서 한과도 같은 그리움을 자아내던 이였으되 또한 듣기만 해도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소스라쳤던 이름의 주인…….'

이문열(66)을 경기도 이천 '부악문원'에서 만났다. 만나러가기 전 전화 통화에서도 그랬지만 목소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체증처럼 남아 있던 작품을 다시 세상에 내놓아서일까. 그는 1998년 '변경' 완간본 초판 서문에 "내가 산 시대의 거대한 벽화를 남기겠다고 공언했고 은밀하게는 그걸로 오랜 세월의 비바람을 견뎌 낼 내 문학의 기념비를 삼을 야심까지 품었다"면서 "지금까지의 내 삶에 축적된 모든 직·간접의 경험, 모든 기억과 사유 중에서 문학적 소재 혹은 장치로 유효하고 또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것은 아낌없이 썼다"고 밝혔을 정도로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아버지로부터는 모두 세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 중 사적인 편지는 마지막 한 통밖에 없었고 앞의 두 통은 아마 공식적으로 (강요에 의해) 쓰인 것 같습니다. 문장이 장중하고 유장한 편이었는데 이를테면 '조국은 나의 실존이다' 같은 대목이 기억나요. 아버지가 직접 쓴 것이라면 내가 아버지의 문재를 물려받은 셈이지요."

부친은 사적인 편지에서 북에서 결혼해 낳은 5남매에 대해서 언급하며 형제로 생각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작 어머니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김영삼정권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때 그가 방문단의 작가로 포함돼 방북을 준비할 무렵 어머니가 그를 부르더니 "니 이번에 가서 너 아버지 만나면 원망 안 하다고 전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몇 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소설에 기술되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야 작가의 픽션이겠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 정조는 그가 처한 환경을 뚫고 나온 실제 바탕색일 수밖에 없다. 그는 소설 속 장남 명훈의 입을 빌어 이렇게 선언한다.

'터무니없는 원죄의식에 억눌려 무슨 일이든 반공(反共)의 부적만 내밀면 소스라쳐 움츠러들었다. …어떤 죄도 최소한의 생존조차 요구할 수 없을 만큼 크지는 않다. 하물며 그 죄란 것이 단지 피로 물려받은 원죄, 아시아적 전제왕조의 잔해에 끈질기게 남은 연좌의 사슬임에야.'

경기 이천 '부악문원'에서 만난 소설가 이문열. 그는 "80년대 없는 오늘을 상상할 수 없듯이 60년대 없는 80년대는 허구일 뿐"이라고 '변경'의 서문에 썼다.

이문열은 서울대 사대를 다니다 자퇴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소설처럼 '원죄의식'을 극복하고 문학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길을 발견한 셈이다. 그가 문학을 선택한 구체적인 이유도 '변경'의 편지 한 대목에 생생하게 드러난다.

'나는 조금씩 국외자, 일탈자로서 살아가야 할 앞날이 아득해지기 시작하였소. …그때 문학이 나타났소. 나는 거기서 한 구원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소. 국외자, 일탈자이면서 시대와 절연되지 않고 살아갈 길이 거기 있다고 본 것이오. …헤롯의 하관(下官)이 되기를 포기한 변경의 얼치기 지식인에게 남은 길은 열심당이 되거나 성전(聖殿)에조차 좌판 펼치기를 서슴지 않는 장사치가 되는 길밖에 없겠지만, 이도 저도 못해 하는 선택이라고 해도 좋소.'

로마 제국의 변경에서 왕 노릇을 하던 헤롯. 2000년도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한 제국의 변경에서 그와 다르지 않은 체제의 하급 관리가 되느니 반대편인 열심당으로 뛰거나 천민자본주의에 편승하는 길만이 살아남는 방편이었는데, 문학이 구원했다는 얘기다. 그가 하고 싶은 문학이란 다시 소설의 대목을 빌리면 "다만 자신을 위해 복무하며, 충돌하는 계급 이익과 사회적 정치적 헤게모니 쟁탈전을 조정하고 제어하는 임무"라고 했다. 그가 매진해온 문학이 실제로 이런 임무를 감당하고 있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이문열은 2001년 그의 책 장례식이 지역감정으로 오도돼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이번 '변경' 재간본 서문에도 '디지털포풀리즘의 첨병들과 가망 없는 진지전을 벌여야 했던 그 우울하고 참담했던 봄날'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SNS로 상징되는 디지털시대의 '광장'은 즉각 판단하고 대답해야 하는 위험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서 "인터넷으로 인해 '광장'의 상시화가 이루어졌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광장에 접속해 발언하는 게 좋은 소통방식으로만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1960년대야말로 1980년대와 이어진 뿌리"라면서 "이제 1980년대를 본격적으로 소설로 써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두꺼운 책 3권 분량, 200자 원고지 3000∼4500매 정도로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변경'의 뒷세대가 기본 틀로 등장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문열은 1999년 아버지를 만나러 중국에 갔다가 사망소식만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오이디푸스처럼 의식 속에서는 이미 20대에 아버지를 살해했다지만 소설 속 어머니의 대사는 여전히 애잔하다.

"아이고, 이것들아 내 새끼야… 어디서 어떻게 지냈니? 혁명이고 건국이고 정말로 정말로 몸서리난다. 제 한 몸으로 못 갚고 너희까지 이꼴로 만들었구나. 꼭 거지새끼 꼴이구나."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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