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인디 컬렉션, 아날로그 감성의 로큰롤 밴드 폰부스의 귀환(part3)

최규성 2014. 7. 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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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에서 계속) 탁월한 연주와 작곡능력을 겸비한 리드기타 김태우는 밴드 폰부스 음악의 핵심 동력이다. 그는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인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의 외동아들로 1985년 9월 17일 전남 광주에서 귀하게 태어났다. 두 살 때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해 성장했기에 광주에 대한 기억은 전무하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동생 만들어줄까?'라고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단호하게 '싫어'라고 말했을 정도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한 김태우는 어린 시절 바퀴달린 물건을 좋아해 자동차와 포클레인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특히 전철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너무 좋아 전철 운전기사가 되고 싶었을 정도. 어릴 때부터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여섯 살 때부터 어머니 친구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그는 외할머니 댁에서 오래된 전자 오르간을 연주하던 어머니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다. 그의 할아버지는 광주에서 유명한 작곡가이자 음악선생님이라 한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친척들은 음악을 하는 저를 보면 식구 중에 유일하게 할아버지 피를 이어 받았다고들 말씀하십니다."(김태우)

김태우 어린 시절

김태우의 부모님은 외동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래서 또래 아이들이 강제로 다녔던 웅변, 속셈학원이 아닌 피아노, 미술, 영어회화, 과학교실을 순례하며 수학과학 올림피아드. 만화 그리기. 사물놀이 같은 본인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경험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가톨릭대학교 강당에서 어쿠스틱기타를 들고 나와 노래를 부르는 강산에의 모습에 반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악보를 주는 대로 연습만 했던 피아노 연주에 질려있었습니다. 그길로 학교에서 진행하던 방과 후 기타교실을 신청했습니다. 멋있는 뮤지션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멋있게 기타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컸습니다."(김태우)

부천 소사중에 입학해서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었다. 당시 인기가 대단했던 축구게임 '피파시리즈'의 삽입곡을 듣고 록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서태지, H.O.T., S.E.S. 등 인기가수들의 노래만 들었던 그에게 '피파98' 게임에 삽입된 시원하고 독특한 Blur의 'Song2'와 '피파2000'에 삽입된 Robie Williams의 'It's only us'는 록의 매력에 빠져들게 했다.

"재밌는 것은 그때 소리바다에 피파2000의 삽입곡이 Metallica의 곡으로 잘못 알려졌다는 거죠. 음반가게에 가서 무작정 Metallica의 And Justice for all 앨범을 구입했습니다. 게임에 나오는 It's only us와 전혀 다른 노래들이었지만 어찌나 매력적이던지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정말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김태우)

고등학교 때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업에 흥미를 잃었던 그는 컴퓨터와 친해졌다.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컴퓨터 게임제작과에 입학한 이유다. 기타를 치는 게임제작과 같은 반 친구 심화수가 '너는 핑거링을 잘 하니까 베이스를 한번 쳐보라'는 말에 낙원상가에서 뭔지도 모르고 베이스 기타를 구해와 연습을 했다. 드럼 남웅식의 제안으로 '무대에서 못하면 관객들이 내려가라고 한다.'는 장난스런 의미로 스쿨밴드 이름을 '내려가'로 정했다. 영상연출과 홍광선, 건반 강성화, 더블 드럼 김선혁과 함께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고2 때. 공모전을 위해 팀을 만들어 게임제작을 했다. 당시 기획을 맡았던 그는 제작과정에선 진행과정 체크 이외엔 별 다른 일을 하지 않아 게임에 들어갈 BGM들을 '기타프로'라는 악보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홍광선, 이상민, 김태우 스쿨밴드 졸업공연 당시

김태우 인생 최초의 창작곡이었다. 음악을 직접 만드는 작업에 흥미가 생겨 대학로에 있는 미디 & 컴퓨터 음악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미디와 기타를 배우면서 음악이 인생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실용음악과를 가야겠다는 생각에 실용음악과가 있는 대학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다 '이왕 하는 거, 넓은 곳에서 더 좋은 교육을 받아보는 것이 어떠냐'는 아버지의 권유가 솔깃했고 모의고사를 봤는데 반타작이라는 충격적인 점수로 인해 미국 버클리음대로 진학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한스 짐머 같은 영화, 게임음악 작곡가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김태우)

하지만 록 음악을 듣고 자란 본능과 음악친구 홍광선의 회유로 인해 1년 만에 휴학을 하고 귀국했다. 당시 밴드 폰부스 멤버 중 정식교육 시스템에서 음악을 배웠고 작곡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았던 멤버는 김태우가 유일했다. 자연스럽게 프로듀싱과 곡의 전체적인 편곡 작업을 도맡았으면 음악적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음악적으로 제가 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닐까하는 회의도 들었고 돈을 좀 벌면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밴드를 그만둘까 다시 복학을 할까 갈등을 많이 했습니다."(김태우)

2007년 진로를 두고 고민하는 김태우에게 리드보컬 홍광선이 '너 없으면 밴드가 안 된다. 너 진짜 그만두면 미국 못 가게 공항에서 기다렸다가 미국에 못 가게 여권 찢어 버릴 거야.'라고 했다.

"광선이가 저에게 한 그 유치한 말이 결국 제 발목을 잡아 이렇게 3집까지 활동하게 만들었네요. 정말 다들 힘들어서 밴드가 해체위기까지 갔을 때, 복학하러 떠날까 고민했었습니다."(김태우) 욕심이 많은 성격인 김태우는 음악적으로도 시도해 보고 싶은 게 많다. "앨범을 발매할수록 음악적인 역할이 커지고 있어 '5집 나올 때쯤이면 믹싱도 직접 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지만 그것이 단순히 저를 폰부스의 기타리스트로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음악인 김태우'로서 발전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 같습니다."(김태우)(part4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사진제공. 김태우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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