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의 풋볼스키] 편견 깬 고려인 '미하일 안'을 아시나요?

김성민 2014. 4. 18. 10:4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스포탈코리아] '러시아 미녀', '보드카'. 이들은 러시아를 수식하는 대표 키워드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이 '러시아 축구'다. 최근 유수의 해외 축구 언론을 통해 러시아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출몰하지만 우리는 정작 러시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스포탈코리아'가 준비했다. 매주 금요일 '풋볼스키'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의 최신 이슈와 소식을 독자에게 전한다

러시아 축구의 별칭은 '스보르나야(Сборная)'다. Collection(수집)이라는 뜻이다. 소련 시절 각국의 최고 인재들의 집합을 유래로 한다. 인종과 출신을 구분하지 않고, 최강의 전력을 만들겠다는 소련 축구의 모토였다. 이런 이유에서 고려인 축구선수들도 예외 없이 소련 각 클럽에서 맹활약했다. 드미트리 안 형제, 올레그 박, 비체슬라브 김, 니콜라이 환, 발렌틴 김 등의 선수들이 대표적 예다. 일반적으로 고려인들이 차별 대우를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이야기 할 경우 활약 선수들의 범위는 국한된다. 당시 소련 축구대표팀의 주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선수들이 차지했다. 고려인 출신 선수들에게 대표팀 선발은 '보이지 않는 장벽' 이었다. 소련 체제의 기반 사상이 '평등'이라 하더라도, 은연중에 존재하던 편견을 깨기에는 어려워보였다. 하지만 단 한명의 고려인이 그 벽을 넘었다. 짧은 생에 소련 축구에서 한 획을 그었던 미하일 안의 이야기다.

떡잎부터 달랐던 미하일 안, 한계를 뛰어 넘다

미하일 안은 1952년 11월 19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스베르드로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와 가까웠다. 형 드미뜨리가 축구 선수였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안은 어려서부터 축구를 좋아하게 됐고, 64년에는 마을의 어린이 축구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미하일 안이랑 어린이 축구팀 생활을 했던 현 우즈베키스탄 축구 협회 대표인 루스탐 아크라모브는 미하일 안을 이렇게 추억한다. "미하일 안이랑은 스베르드로브 어린이 축구팀에서 같이 뛰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다른 아이들보다 확연히 차이를 보였다. 물론, 그때는 아직 체력이 많이 부족했고 기술적인 면에서 다듬어야 할 부분이 있었지만 필드를 느끼고 게임의 흐름을 볼 줄 알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뛰어난 선수가 되었고 그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차차 훌륭한 코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1968년 미하일 안은 수 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티토브 전문 스포츠 학교에 입학한다. 그 해에 미하일 안은 소련 청소년 대표팀의 선수로 뽑혔다. 당시만 해도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그것도 17세의 '고려인'이 소련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다는 건 당시로서는 소련 축구계에 엄청난 이슈였다.

19살이 된 미하일 안은 친청팀 FC 폴리토트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우즈베키스탄의 FC파흐타코르로 둥지를 옮겼다. 적응기는 없었다. 미하일 안은 매 경기 동료 선수들에게 결정적인 패스를 해주며 팀에 녹아드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체력 문제에서 약점을 보이기도 했다. 클럽 입단 당시 왜소했던 미하일은 체력적으로 완성되지 못했었다. 하지만 미하일 안의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 능력은 그 단점을 상쇄할 만한 수준이었다.

전성기의 시작, 소련 마크를 달다

파흐타코르로 이적한 후 미하일 안은 소련에서 가장 핫한 미드필더로 자리 잡았다. 당시 소련 연방은 국가를 구분하지 않고, 리그를 운영했는데 현재의 디나모 키예프(우크라이나), CSKA 모스크바(이하 러시아), 로코모티브 모스크바등이 1부 리그의 강팀이었다. 파흐타코르는 지리학적으로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했고, 영향력이 미미했었다.

굳은 땅에서 자라야 더 빛이 나는 법. 미하일 안은 1972년 2부 리그로 떨어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다시 1부 리그로 올려놓으며 전성기를 예고했다. 주 포지션 '하프백' 지금의 '볼란치' 역할을 맡았던 미하일 한은 득점력에서도 절정의 기량을 선보였다. 그는 1974년에는 29경기에 출전 11골, 이듬해에는 27경기에 출전 8골을 터뜨리며 3시즌 연속 팀 내 득점왕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소련 최고의 축구 스타이자 1974 시즌 2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이름을 올렸던 올레그 블로힌조차 미하일 안의 득점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는 것이 전언이다.

미하일 안은 득점 뿐 아니라 주 임무인 '연계' 부문에서도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당시 소련 전문가들은 미하일 안이 컴비네이션 플레이를 재해석하고,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동료들의 게임을 살필 줄 아는 선수라고 평가했다. 특히 팀 동료인 표도로프와의 연계가 인상적이었다. 미하일 안-표도로프 컴비네이션 플레이는 우크라이나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 루트로 회자 되고 있다. 이런 활약 덕분에 두 선수는 전 소련 연방 축구선수 33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맞물려 미하일 안의 파흐타코르는 소련 리그의 '핫 클럽'으로 떠올랐다.

영향력은 점진적으로 넓어져갔다. 1976년 미하일 안은 U-23 유럽청소년선수권대회에 소련 청소년 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을 이어갔다. 그는 8강 프랑스전, '세계 최강' 헝가리와의 결승전에서도 맹활약하며 우승컵을 안겼다. 당시 투지 넘치는 플레이, 융화력이 뛰어났던 미하일 한은 팀의 주장을 맡았고 동료들로부터 신임을 얻고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미하일 안은 청소년 대표팀을 거쳐 성인 대표팀에도 발을 담그게 된다. 1978년 미하일 안은 이란과의 평가전을 통해 소련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1980 유로 예선 그리스전에서도 활약하며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받았다. 미하일 안의 축구 인생은 그렇게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주변인들이 말하는 미하일 안, 예견치 못한 죽음

미하일 안의 아내 클라라 안 : "미하일의 축구 생활과 그의 활약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얘기할 수 있다. 그는 축구 역사의 새 페이지를 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단지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다.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착하고, 재미있고, 정이 많고, 관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팀 동료 다비드 키피아니(FC 디나모): "나는 미샤 안과 친구였고 같은 청소년 대표팀에서 뛰었다. 해외에 나갈 때 그는 자신을 위해 돈을 일절 쓰지 않고 오로지 아이들과 아내를 위한 선물을 샀다.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안은 딱 그런 사람이었다.(미샤 안은 미하일 안의 애칭이다. 러시아에서는 미하일 이라는 정식 명칭이 아닌 '미샤'와 같은 지소형의 이름을 부르고는 한다.)»

미하일 안이 현재까지도 소련권 국가의 축구팬들과 고려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성품'이다. 그는 배려의 아이콘이었고,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정이 많은 인간이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그라운드 내. 외에서 단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던 미하일 안의 사람냄새는 소련 대표팀의 일원이자, 고려인 축구의 희망이 되기 충분했다.

하지만 불행은 예고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했나? 미하일 안은 예견치 못한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된다. 소련 대표팀 소속으로 유로 예선을 소화한 미하일 안은 1979년 8월 리그 경기를 소화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미하일 안이 탄 비행기는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타 비행기와 충돌해 추락하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미하일 안을 비롯한 소속팀동료 17명을 포함해 승객 178명 전원이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당시 미하일 안은 민스크행 비행기를 타지 않을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미하일 안은 컨디션 문제로 출전이 불가한 상태였는데, 팀 동료들이 경기 후 파티를 하자며 동행을 요구했다. 거절이 익숙치 않았던 미하일 안은 결국 동료들의 요구에 따라 민스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보다는 '남'을 위한 자세를 견지하다 사고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미하일 안이 사망한 1979년은 한국인 최초로 유럽 무대를 밟은 차범근 전 감독이 독일 프랑크프루트에 입단했던 해다. 하지만 우리는 차범근을 기억해도, 미하일 안은 기억하지 못한다. 국적은 엄연히 달랐지만, 한 민족의 피가 흘렀던 해외파의 시초라 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미하일 안의 죽음이 더욱 쓸쓸히 다가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비행기 사고 관련 일지(현지 언론 발췌)

"1979년 8월 11일 드네프로제르진스크 상공에서 ty134a 비행기 두 대가 충돌했다. 그 중 한 대는 타쉬켄트로부터 민스크로가는 비행기였다. 그 비행기엔 총 83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중 파흐타코르의 팀원 17명이 탑승했었다. 또 다른 비행기는 칠랴빈스크로부터 키쉬녜브 행이였고, 6명의 승무원까지 총 89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사건 당일 하바롭스크 관리 센터에선 7명의 디스패쳐가 근무 중이였다. 가장 바쁜 섹터를 맡았던 고참 세르게이 대신 젊은 니콜라이 주콥스키를 교대 근무로 세웠다. 모니터링은 숨스키가 맡았는데, 지침에 따르면 그 일은 세르게이만 할 수 있었다. 이 사고가 100% 인재였던 이유다. 그렇게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의 히어로 미하일 안도 함께.."

사진=파흐타코르 공식 홈페이지

글=김성민 기자

깊이가 다른 축구전문뉴스 스포탈코리아(Copyright ⓒ 스포탈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제보 및 문의 sportal@sportalkorea.co.kr

- 카카오스토리에서도 스포탈코리아를 만나세요! (친구검색 sportalkorea)

Copyright © 스포탈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