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플러스한국대구 맞춤정장의 명인 '매니아' 장성필 대표의 나의 아버지

2014. 3. 12.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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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주신 짜장면 반 그릇

"퍼뜩 일나라!"

아버지가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하늘엔 아직 별이 총총했다. 어머니가 가마솥에 데워주신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고 겨울 외투를 껴입었다. 아버지는 진즉에 가람옷을 입고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수건을 내밀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달빛도 없는 새벽이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울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다시 재촉했다.

"차 놓칠라. 퍼뜩 가자!"

아버지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뒤따랐다. 쌀쌀한 새벽 공기 때문에 콧구멍이 사금파리에 할퀸 듯이 따가웠다. 설을 지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즈음이었다. 길가엔 겨우내 내린 눈이 돌처럼 딱딱하고 굳어 있었다.

# 14살, 영천 임포역에서 먹었던 꿀맛 우동

그날 새벽, 아버지와 나는 40리(16km)를 걸었다. 내 고향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 마일동. 운문면에서도 제일 깊은 골짜기였다. 길이 험해 차도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마을 아이들은 중학교가 멀어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나면 대개 고향을 떠났다. 도시에서 공장에 들어가거나 기술을 배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나도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였다.

어둠이 걷힐 즈음, 영천 임포역에 도착해 우동 한 그릇을 먹은 뒤 부산행 기차를 탔다. 지금이야 지척에 있는 도시지만 1970년대만 하더라도 조미미의 노래 가사처럼 '얼마나 멀고 먼지'하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올 만큼 멀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 부산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나를 이끈 곳은 어느 양장점이었다. 주인이 짜장면 두 그릇을 시켜줬다. 나는 게 눈 감추듯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도시의 짜장면은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짜장이 목구멍을 지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혀에서 바로 몸으로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당신이 드시던 자장면을 내게 내밀었다. 아직 반 이상 남아 있었다. 나는 다시 그릇에 코를 박았다.

"가꾸마. 사장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기술 배아라."

아버지는 내가 그릇을 깨끗이 비우는 것을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셨다. 나는 인사만 꾸벅하고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혼자 남겨졌다는 황망한 기분과 견습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가슴에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황급히 몸을 돌리기 전, 이미 눈물로 촉촉해져 있던 아버지의 눈동자가 이토록 오랜 세월 내 가슴을 후빌 줄은.

다음 날 새벽부터 수업이 시작됐다. 양복점에는 기술자가 세 명 있었고 나는 막내였다. 당시는 기술자들의 횡포가 심했다. 욕설이나 구타는 물론이고 심부름만 3년을 시켰다. 신입은 제일 먼저 일어나 불을 피웠다. 당시만 해도 다리미를 연탄불에 달구었다. 연탄이 없으면 아무 작업도 할 수 없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즈음에 시작한 일과는 11시가 넘어야 끝이 났다. 한창 클 나이에 잠도 맘껏 푹 못자는 것도 힘들었지만 제일 속이 쓰린 것은 사장댁 아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볼 때였다.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나는 사장 아들과 마주칠 때마다 다리미에 데어 흉 투성이인 손을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향수병도 있었다. 하긴 안 그랬다면 더 이상했을 것이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굴뚝같아도 가게 밖은 '외계'나 다름없었다. 돈도 없고 지리도 몰랐다. 고향은커녕 부산도 못 벗어날 판이었다. 꼼짝 없이 갇혀 사는 형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기술은 빨리 배웠다. 내 손재주는 타고난 것이었다. 아버지는 여름이면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을 짰는데, 마을 어른들이 짚을 만지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참, 빠리다(빠르다)!"하고 감탄했다. 어머니는 손으로 하는 일에 두루 솜씨가 좋으셨다. 일단 음식을 잘하셨는데, 마을에 큰 잔치나 제사가 있으면 어머니가 어김없이 불려갔다. 무엇보다 바느질 솜씨가 좋아 동네 어르신들의 수의(壽衣)를 거의 다 만드셨다. 당신들의 손재주가 고스란히 내 몸속에 배었던 것이다.

# 부모님 돌아가시자 친척들 "애들은 고아원에..."

부산에 내려온 지 1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아버지의 부음이 들려왔다. 그 순간 문득, 부산에 오던 날 먹었던 짜장면의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날 먹었던 별식이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식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내 배 고프다고 반이나 넘게 남겨주신 짜장면을 날름 받아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꼭 1년 후 나는 다시 청도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넓고 황량한 세상에 일곱 남매만 남았다. 큰형님이 군대에 갈 나이였고 그 아래로 작은 형과 누나가 있었다. 내가 꼭 중간이었다. 내 위로는 어떻게든 혼자서 살아갈 것이었지만, 문제는 내 동생들이었다. 막내는 아직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도 되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난 후 친척들이 모여서 동생들을 어떻게 해야 할 지 회의를 했다. 나는 발언권이 없었고 그저 듣기만 했다. 결론은 고아원에 보내자는 것이었다. 숯을 삼킨 듯 입술이 바짝 타고 손이 떨렸다. 톡톡. 내 눈물방울이 장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때 사촌 형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고아원이 무신 소립미꺼! 친척들이 이래 많은데 고아원에 보내마 이 마을에서 우리가 얼굴 들고 살 수 있겠습미꺼. 아들 내가 다 키우꾸마."

"니 아도 서인데(셋인데), 우예 키울라꼬!"

삼촌뻘 되는 분이 형님을 가로 막았다. 사촌 형님이 다시 발끈해서 말했다.

"밥상에 숟가락 세 개 더 얹저가 나나무마(나눠 먹으면) 되는 구마. 저엉 굶을 처지가 되마 온 식구가 같이 굶으마 되고요!"

동생들은 결국 사촌 형님 집으로 갔다.

부산에 돌아왔을 때 기술자들이 내게 말했다. "니 눈빛이 달라졌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제 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형님들도 계시지만 나도 어서 자리를 잡아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밤잠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사촌 형님께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었다.

# 마을에서 제일 높았던 아버지의 땔감 더미

당시는 양복점 경기가 좋았다. 속된 말로 대기업 월급쟁이들은 저리 가라였다. 그만큼 기술자가 대접을 받았다. 스물두 살에 독립해서 가게를 차리자 금방 돈이 모였다. 그 돈으로 제일 먼저 소를 샀다. "헹님, 고맙십더."

소를 끌고 사촌 형님네 마당에 들어서서 방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큰절을 올렸다. 마을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불과 몇 년 전에 아버지 손에 끌려 부산으로 내려갔던 '애'가 6~7년 만에 소를 선물로 사들고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는 소가 큰 재산이던 시절이었다. 그 후로도 종종 용돈을 챙겨드렸다. 형님은 돌아가시고 형수님은 살아계시는데, 아들집보다 내 집에 더 자주 머무신다. "여가 더 편한데 우야노." 그 말씀이 너무 고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그렇지만 부모님이 아직 내 곁에 계신 듯하다. 특히 양복을 매만질 때마다 부모님의 숨결이 내 손 끝에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맵짜고 꼼꼼한 솜씨는 당신들이 주신 게 분명하니까.

생각해보면 장인으로서 평생 지녀야 할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실성도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우리집 땔감 더미의 높이가 언제나 제일 높았다. 그만큼 부지런하셨던 것이다.

요컨대, 부모님은 내가 평생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가르치셨다. 가끔 게을러지려고 할 때마다 일거리를 찾아 쉴 새 없이 움직이시던 어머니의 손과 마을에서 제일 키가 높았던 아버지의 땔감 더미를 기억하곤 한다. 요즘 가게에 아들과 사위가 나와 일을 배우고 있는데, 경영법이나 기술보다 내 부모님이 나에게 보여주신 곡진한 삶의 태도를 먼저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

◆ 아버지 장상호, 어머니 허갑수 - 두 분 모두 경북 청도군 운문면 마일동에서 태어나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았다.

◆ 장성필(1957~) - 대구 최고의 맞춤 정장 전문점 '마니아'를 경영하고 있다.

정리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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