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프리즘] 유조선 충돌 이후 / 안관옥

2014. 2. 11. 18:5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겨레]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읽은 적이 있다. 소설에서 빅브러더는 공포스런 존재였다. 24시간 사회를 촘촘하게 감시해 누구도 꼼짝하기 어려웠다. 숨막히는 정보통제를 떠올리면서 몸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상황은 이미 현실이 됐다. 빅브러더는 제2의 신처럼 영상으로, 음성으로, 기록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설인 지난달 31일 아침 전남 여수의 국가산업단지에서 기름유출 사고가 났다. 사고 나흘 만에 현장 영상이 공개됐다. 후미진 부두에서 일어난 사고였는데도 카메라를 벗어날 수 없었다. 유조선이 부두로 들어와 잔교와 관로를 들이받는 순간이 초 단위로 찍혀 있었다. 동영상은 너무도 생생해 마치 장면별로 연출해서 찍은 영화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사고는 충격적이었고, 이토록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지에스칼텍스의 원유부두에는 폐회로텔레비전(CCTV) 카메라가 18대 설치돼 있다고 한다. 한 대는 여수해상교통관제센터, 나머지는 지에스칼텍스에서 운영한다. 여수해상교통관제센터의 카메라는 너비 3㎞의 비좁은 수로를 오가는 하루 200여대의 선박과 사고위험이 높아서 특별관제를 펼치고 있는 원유부두 일대를 24시간 360도 회전하며 녹화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영상도 이 카메라가 잡은 장면이다. 지에스칼텍스의 카메라는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를 비춘다. 그래도 사각지대가 없어 부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낱낱이 알 수 있다.

카드회사의 정보유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여수부두의 기름유출 사고가 터졌다. 느닷없이 기름폭탄을 맞은 주민들은 성묘할 겨를도 없이 바다로 뛰쳐나갔다. 선박 1000여척이 기름띠의 확산을 막았고, 인력 1만여명이 갯가의 기름을 닦는 등 혼란이 빚어졌다. 소란 속에 '지에스칼텍스가 1차 피해자'라던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의 목이 날아가기도 했다.

이번 사고는 해상의 오염방제를 책임지고 있는 해경의 실력을 여실히 보여준 시험대였다. 평소 나는 해경을 믿음직스럽게 생각해왔다. 불법 중국어선을 단속하려고 파도가 일렁이는 난바다로 뛰어들고, 조난당한 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성탄 전야의 칠흑 같은 밤바다에 몸을 던지는 해경대원들은 영웅이었다. 해양영화 <가디언>이나 <포세이돈 어드벤처> 등에 나오는 주인공들 못지않게 멋졌다. 지난해엔 항해 중일 때 해경은 하루 세끼(급식비 경찰 5820원, 전경 7350원), 해군은 네끼(장교·사병 8315원)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속이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 때문에 덜컥 의심이 났다. 해경은 유출량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댔다. 초동방제에 실패하고 우왕좌왕했다. 해군이 2차 피해를 유발하는 유처리제를 바다에 뿌릴 때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긴급방제실행계획(매뉴얼)을 제대로 지켰는지, 해상오염 방제작업을 올바로 통제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유조선 충돌 직후의 원유부두 상황이 궁금해졌다. 18대의 시시티브이 장면을 재구성하면 어떨까. 해경의 주장이 아니라, 카메라로 해경은 현장에 언제 도착했는지, 방제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즉시 오일펜스를 쳤는지, 기름 범벅이 된 부상자 구조는 어쩌다 늦었는지 등등 의문이 끊이질 않기 때문이다.

여수 원유부두에선 1995년 씨프린스호 사고 이후 10여차례의 기름유출 사고가 되풀이됐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고를 반복하는 일은 빅브러더의 손을 빌려서라도 이제 끝내야 한다. 다큐멘터리 같은 사고 직후 현장 영상을 해경이 국민에게 기꺼이 공개하기를 바란다. 화면 속에 담긴 해경의 용기와 분투를 보고 영화처럼 감동받고 싶다.

안관옥 사회2부 기자 okahn@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일본 공무원 죽음의 미스터리…"스파이였다" 주장도소치올림픽 강호동 해설 어땠길래…'호불호' 극명히 갈려"눈 치울 삽 동나 발만 동동"…강원도 이번엔 '제설 전쟁'아프리카 무용수 '노예 노동' 시킨 새누리 홍문종 사무총장[화보] 웃음과 탄식…소치의 명장면들

공식 SNS [통하니][트위터][미투데이]| 구독신청 [한겨레신문][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