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지구별로 떠나는 시간여행
[한겨레] [매거진 esc] 여행
검은모래와 기암절벽 가득한 '화산학 교과서' 제주 수월봉과 차귀도 산책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2010년) 제주도. 섬 전체가 지질공원이다. 동쪽 끝에 성산 일출봉이 솟았고, 서쪽 끝엔 고산 수월봉이 자리잡았다. 일출봉 앞바다엔 우도가, 수월봉 앞바다엔 차귀도가 누워 있다. 일출봉은 해돋이로 이름 높고, 수월봉은 해넘이가 장관이다. 일출봉에서 수월봉까지, 제주도는 거대한 지질학 박물관이다. 두 천연기념물 봉우리는 이 박물관의 대표적 '화산 지질 전시장'이다. 성산 일출봉은 제주 세계지질공원의 대표 명소로 꼽히고, 수월봉은 '화산학 교과서'로 불린다. 두 봉우리는 육상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여타 오름들과는 달리 수중 화산 폭발에 의해 생긴 화산체다. 제주도의 서쪽 끝, 아름다운 수월봉 해안 절벽길과 바람 가득한 차귀도 억새밭길을 걸으며, 제주도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일부분을 들춰봤다.
먼저, 간략한 지질 공부. 제주도에 무수히 솟은 화산 지형들은 약 180만년 전부터 1000년 전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됐다. 같은 화산체라도 육상에서 분화한 화산과 바닷속에서 분화한 화산은 지질이 다르다고 한다. 육상에서 분화한 화산은 현무암이나 송이(공기구멍이 많고 가벼운, 붉은색 암석)들을 쏟아냈지만, 바닷속에서 분화한 화산은 물과 만나 격렬한 폭발을 일으키며 엄청난 화산가스와 화산재(화산쇄설물)를 분출시켰다. 이 화산쇄설물이 날아가거나 흘러가 쌓이며 오랜 시간 겹겹이 퇴적돼 굳어진 것을 응회암이라 부른다. 제주도엔 응회암 구조의 화산체가 네 곳 있는데, 성산읍의 일출봉과 고산리의 수월봉도 그런 곳이다. 수월봉은 1만8000년 전, 현재 수월봉의 앞바다 물속에서 터져나온 화산 폭발에 의해 형성된 응회암 화산체의 일부다.
짙푸른 바다와 사람 없는검은모래 해변시커먼 현무암 무리와끝없는 파도수직으로 일어서서 내달리는거대한 절벽생명체 탄생 이전의 지구를보는 듯하다
도로변에서 보는 수월봉(녹고물오름)은 나지막한 언덕에 지나지 않는다. 높이 77m다. 하지만 이 자그마한 오름을 바다 쪽에서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가로로 그어진 무수한 선들이 켜켜이 쌓인 절벽이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오랜 세월 바닷물에 침식돼 깎여나가 수직 절벽을 이룬 거대한 화산쇄설암층이자 수월봉의 속살이다. 한장동 앞 바닷가에서부터 북쪽으로 고산리 자구내포구에 이르는 4㎞가량의 해안이다. 수월봉 탐방로 팻말이 선, 작은 주차장 옆 계단 밑 해녀의 집(해녀탈의장)이 수월봉 화산쇄설암층 탐방의 출발점이다.
현무암이 잘게 부서져 만들어진 검은모래 깔린 해변을 따라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곧바로 생명체 탄생 이전의 지구 모습을 보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에 빠지게 된다. 짙푸른 바다와 아무도 없는 검은모래 해변, 끝없이 철썩이며 시커먼 현무암 무리와 모래를 되풀이해 씻는 파도, 그 옆으로 수직으로 일어서서 내달리는 누렇고 검은 띠의 거대한 절벽…. 바다에 뜬 배 몇 척과 검은모래에 찍힌 낚시꾼 발자국이 아니라면, 그리고 무수한 퇴적암층의 맨 밑 층리 틈으로 드나드는 말똥게들이 아니라면, 물과 암석뿐인 지구별에 홀로 남은 듯한 느낌을 맛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검은모래 해변과 현무암 무리 흩어진 해안을 주민들은 '한장알(한장동 아래) 해안'이라 부른다. 한장동을 비롯한 고산리 일대는 제주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광활한 평야지대다. '한장'이란 지명도 넓고 큰 들판이란 뜻이다. 한장알 해안 지나면 좀더 웅장하고 다채롭게 휘어진 검은색 절벽을 만난다.
층층이 쌓인 수천 겹의 지층은, 고스란히 살아 있는 '화산학 교과서' 책갈피들이다. 한켜 한켜가 모두 세월의 흔적이다. 수백 수천 겹의 화산재 층엔 굵직한 돌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분화 때 내뿜어진 화산재와 암석들이 흐르고 날아와 박힌 것(화산탄)들이다.
절벽의 맨 아래쪽 층리 틈에선 물이 흘러나오는 걸 관찰할 수 있다. 물이 고여 흘러나오는 이유는 그 밑에 '고산층'이라는 화산재 점토층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해설사 이명숙(60)씨는 "고산층이 고무장판 역할을 해 물이 흘러나오게 되는데, 이런 층은 고산리 등 제주도 서쪽 지역에서만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 지역에선 이 흙을 파 그릇을 굽고 기와도 구웠다고 한다.
한지머리 돌아 수월봉 정상 아래쪽 '밋삐장알 해안'이 이어지고, 이어서 '엉알'(높은 절벽 아래) 해안길이 이어진다. 한지머리 쪽에서 엉알해안길까지 탐방하려면 썰물 때를 택해, 해설사의 안내를 받는 게 좋다. 탐방로도 따로 없고 안내판도 없는 바윗길이다. 한장알 해안을 보고 돌아나와, 수월봉 입구(교차로)로 이동한 뒤 엉알길의 화산쇄설암층과 일제강점기 진지동굴 등을 보며 자구내포구까지 1.5㎞를 걷는 것도 방법이다.
수월봉 등 고산리에는 국가 지정 지질 해설사 7명이 대기하고 있다. 해설사들은 수월봉과 차귀도의 지질을 꿰고 있는 분들이다.
차귀도는 고산리 자구내포구 2㎞ 앞바다, 누운섬(와도) 바깥쪽에 자리잡은 무인도다. 1970년대까지 8가구가 살았지만, 간첩 침투를 우려해 소개령이 떨어지면서 무인도가 됐다. 지난 2010년 세계지질공원에 이름을 올리며 개방(2011년 11월)되기까지 30여년간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던 섬이다.
지실이(감자)바위(범바위·병풍바위), 매바위(독수리바위), 쌍둥이바위(쌍봉·썩은여) 등 몇개의 작은 섬을 거느렸다. 차귀도 본섬은 시누대가 많이 우거져 옛날엔 죽도라고도 불렀다. 넓이 0.16㎢에 불과한 섬이지만, 약 1.5㎞ 길이의 탐방로를 따라 돌며 느끼는 감동의 파고는 높고 크다. 억새와 띠 무리 깔린 완만한 언덕들과 그림 같은 등대, 그 사이 들판에 남아 있는 무너진 돌담과 연자방아, 변소 등 삶의 흔적들, 바닷가의 웅장한 화산쇄설암층 등 각양각색의 풍경들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매섭게 몰아치는 바닷바람을 뚫고 걸을 수 있게 해준다. 차귀도의 퇴적층 토양은 붉은 송이들과 검은 화산재들이 뒤섞인 모습이다. 과거 섬이 컸을 때 육상 폭발이 일어난 뒤 크고 작은 수중 분화가 이어졌고, 수월봉 쪽 화산재도 날아와 덮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민들이 심어, 울창한 숲을 이뤘었다는 해송들은 다 말라죽은 지 오래고, 들끓었다는 토끼·노루도 사라진 지 오래다. "무인도 시절, 군 특수부대원들의 생존 훈련이 일주일·열흘씩 이 섬에서 자주 이뤄졌는데, 그 뒤 동물들이 자취를 감췄다"는 게 고산리 주민들의 말이다.
차귀도에 전해오는 전설. 중국 송나라 때 호종단이란 자가 제주에서 큰 인물이 날 것을 우려해 제주도에 와서 지맥을 끊고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한라산의 수호신이 매로 변해 나타나 배를 침몰시켜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 해서 차귀도(遮歸島)가 됐다는 전설이다. 차귀도는 이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고, 세계지질공원으로 보호받는 섬이 됐다. 주민들 처지에서 보면 이름 그대로, 다시 돌아가 살 수 없는 섬이 된 셈이다.
>>>수월봉·차귀도 여행정보
가는 길
제주공항에서 한경면 고산리 자구내포구까지 승용차로 약 1시간. 자구내포구에서 수월봉 입구 거쳐 해녀의 집 입구까지 차로 약 5분 거리. 중간 도로변에 구석기·신석기시대에 걸친 유적인 고산리 선사유적지가 있다. 뱀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던 당산봉(당오름)의 거북바위에 오르면 광활한 고산리 들판(차귀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수월봉에서의 해넘이 감상은 차귀도 쪽으로 해가 지는 여름철이 더 근사하다. 겨울엔 자구내포구나 당산봉에서 좀더 볼만하다.
먹을 곳
자구내포구에 수용횟집(064-773-2288), 성안가든(064-773-1943) 등 해물 요리를 내는 식당들이 많다. 제주시 연동 삼성혈해물탕집의 푸짐한 해물탕도 먹을 만하다.
여행 문의
차귀도 탐방 뱃삯은 왕복 1만6000원. 자구내포구 뉴파워보트 (064)738-5355. 고산1리 사무소 (064)773-1943, 고산리 해설사 모임 김홍길 회장 010-3694-2643.
제주/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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