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67〉 황씨·창원 황씨(黃氏·昌原 黃氏)

2014. 2. 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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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씨(黃氏)는

황씨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등 한자 문화권에 분포하는 세계적인 성씨다. 중국에서는 성씨 인구 순위로 7위에 올라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는 5대 성씨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우리나라 황씨의 연원도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황씨의 유래는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황오제의 하나인 황제헌원(黃帝軒轅)의 후손 중에는 혜련(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요순시대 들어 요 임금이 혜련에게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산서성 서부에 있는 삼호(?胡)지역 명칭을 황국(黃國)으로 바꿔 하사했다. 또 혜련에게는 황운(黃云)이란 이름도 하사했다고 한다. 이 황운(黃云)이 전 세계 황씨의 시조다.

황씨는 현재 중국·한국·베트남·북미 지역에 6000만명 이상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에는 68개의 본관과 64만4294명(2000년 기준)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는 본관은 평해(平海)·장수(長水)·창원(昌源)을 비롯해 우주(紆州)·상주(尙州)·회덕(懷德)·덕산(德山)·제안(齊安)·황주(黃州)·선산(善山)·성주(星州)·경주(慶州)·항주(杭州)·관성(管城) 등 15개다. 그중 창원·장수·평해의 3대 본관이 대부분이다.

창원 황씨는 주로 영남 남해안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장수 황씨는 주로 호남과 중부 지역, 평해 황씨는 동해안과 영동 지역에 각각 거주하고 있다. 또 회덕 황씨는 충남과 경북의 영일과 경주에, 상주 황씨는 경기도에, 우주 황씨는 전북 전주 일원에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남한에 60만명이, 북한에 20여 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황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귀화성씨다. 한씨·기씨·선우씨가 기자조선 때 동래한 기자(奇子)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토성으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에 황씨를 대표적인 귀화성씨로 꼽는 것이다.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는 황락의 유허비. 우리나라 황씨의 도시조인 황락은 후한 광무제의 신하로, 교지국(현 베트남)에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 표류해온 것으로 전해온다.

황씨의 도시조는 신라 초기 중국에서 건너온 황락(黃洛)이다. 황락은 후한의 광무제 4년(신라 3대 유리왕, 서기 28년)에 구대림(평해 구씨 시조)과 같이 교지국(交趾國·베트남)에 사신으로 가던 도중 풍랑으로 표류해 우리나라 동해안(경북 울진군 평해면 월송리)에 상륙하였다. 지금도 그 자리에 유허비가 있다.

당시 신라는 성씨 제도가 정착하지 않았지만, 삼국사기에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 성주인 품일(品日·화랑 관창의 아버지)이 황씨로 기록된 것을 볼 때 신라시대부터 존재해 온 성씨로 여겨진다.

창원·장수·평해에 본관을 삼게 된 것은 도시조 황락의 후손 중에 3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큰아들 황갑고(黃甲古)는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지고 둘째 황을고(黃乙古)는 장수군(長水君)에, 셋째 황병고(黃丙古)는 창원백(昌原伯)에 봉해졌기에 3본관을 삼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신라시대 군(君)과 백(伯)이라는 벼슬이 없었기에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장수 황씨 측이나 일부에서는 3형제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평해 황씨는 기성군의 후손인데, 기성이란 평해의 옛 지명이다. 하지만 기성군인 황갑고 이후의 계대를 알 수가 없고, 고려조에 금오장군 태자검교를 지낸 황온인(黃溫仁)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장수 황씨 시조는 신라의 시중이었던 황경(黃瓊)이다. 그는 경순왕의 사위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북 장수에 터를 잡게 된 것은 황경의 후손이 고려 명종 때 전중감(殿中監)으로 있을 때, 이의방(李義方)의 화를 피해 내려가 터를 잡은 데 연유한다. 그래서인지 고려시대에는 별로 알려지지 못하였으나, 조선시대 정승의 대명사가 된 황희(黃喜) 부자가 영의정에 올라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창원 황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8개 파가 있다. 8계통은 시중공계(토황), 공희공계(당황, 회산군파), 호장공계 등이다. 그중 3대파인 토황(土黃)으로 불리는 시중공(侍中公)계와 당황(唐黃)으로 불리는 공희공(恭僖公)계, 그리고 호장공(戶長公)계 등의 관계는 뚜렷이 밝혀진 바는 없고, 족보도 각기 따로 편찬하고 있다.

시중공계는 고려 충렬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黃忠俊)을 시조로 하고 고려 말의 황신(黃信)을 1세조로 한다. '당황'이라 불리는 공희공계는 공민왕 때 중서문화평장사를 역임한 황석기(黃石奇)를 파조로 한다. 그가 노국공주를 수행해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사'에는 그가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적(趙?)의 난'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황(당에서 동래한 황씨)이라는 것은 잘못 전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상주 황씨는 고려 때 상주국(上柱國) 벼슬을 한 황석주(黃石柱)를 시조로 한다. 우주 황씨는 고려 초 중윤(中尹)을 지낸 황경보(黃旻甫)를 시조로 하고, 10세 황거중(黃居中)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본관인 우주(紆州)는 전주의 옛 이름으로 완산(完山)을 말한다. 회덕(懷德) 황씨는 고려조호부전서 황윤보(黃允寶)를 시조로 하며, 덕산 황씨는 고려조 장흥고사(長興庫使)를 지낸 덕풍군 황재(黃載)를 시조로 한다. 제안 황씨는 황석기의 5세손으로 태종 때 제안군에 봉해진 황을구(黃乙耉)가 시조다.

이들 황씨들은 대부분 평해·장수·창원 황씨에서 분적된 본관들이다. 상주와 덕산은 평해에서, 우주와 남원은 장수에서, 회덕과 제안, 황주는 창원에서 분적(分籍)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황인점과 화유옹주의 묘.

창원 황씨는

창원 황씨는 황씨 본관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다. 이들은 황씨의 도시조(都始祖)인 황락(黃洛)의 셋째 아들 황병고(黃丙古)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황병고가 창원백(昌原伯)에 봉해지면서 창원 황씨를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후 세계는 실전되어 알 수 없다.

창원 황씨에는 시조를 달리하는 8개파가 있는데 그중 충렬왕 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황충준(黃忠俊)을 시조로 하고, 공부상서(工部尙書) 정토장군(征討將軍)을 지낸 황신(黃信)을 기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는 시중공계가 있으며, 고려 충정왕 때 도첨의 참리를 지내고 문화평장사에 오른 회산군 황석기를 파조로 하는 회산군계가 있다.

또 호장공계에는 창원에 정착하여 호장을 지낸 황양충(黃亮?)·황존우(黃存祐)·황우용(黃祐龍)을 파조로 하는 3개 파가 있다. 이외에도 황성찬(黃星燦)을 파조로 하는 예빈동정공파(禮賓同正公派)와 황규(黃糾)를 파조로 하는 규정공파(糾正公派)가 있다. 이들 분파 사이의 관계는 아직까지 뚜렷하게 밝혀진 내용이 없으며, 족보도 각기 따로 편찬하고 있다.

이들은 다시 부정공파(副正公派)·현령공파(縣令公派)·전첨공파(典籤公派)·판서공파(判書空破)·사과공파(司果公派)·사직공파(司直公派)·병사공파(兵使公派)·부사공파(府使公派)·호장공파(戶長公派) 등으로 나뉜다. 부정공파는 다시 첨정공파(僉正公派)·의창공파(義昌公派)·판관공파(判官公派)·도정공파(都正公派)·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첨지공파(僉知公派)로 갈라진다. 현령공파는 현감공파(縣監公派)·첨정공파(僉正公派)·주부공파(主簿公派)·군수공파(郡守公派)·직장공파(直長公派)로 나뉘어졌으며, 전첨공파는 봉교공파(奉敎公派)·좌랑공파(佐郞公派)·영춘공파(永春公派)·서담공파(西潭公派)·영흥공파(永興公派)·학생공파(學生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로 갈라진다.

창원 황씨는 조선시대 총 40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그중 문과에 78명, 무과에 24명, 사마시에 274명, 역과에 11명, 의과에 6명, 율과에 8명, 주학에 1명이 있다. 2000년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창원 황씨의 인구는 전체 7만8894가구에 25만281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황인점(창성위)과 화유옹주의 묘를 이장하며 출토된 부장품. 조선 후기 궁중과 사대부의 생활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창원 황씨의 연혁과 인물

창원 황씨의 주요 인물을 살펴보면 시중공계와 공희공계, 호장공계에서 고르게 인물을 배출하였다.

시중공계에서는 문하시중을 지낸 시조 황신의 아들 황거정이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면서 가문의 기틀을 닦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황재(黃梓)·황인검(黃仁儉)·황인점(黃仁點) 3부자가 유명한데, 아버지인 황재는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부제학과 대사헌을 역임하고 영조 때 진주사 서장관과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인 '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찬하였다. 큰아들 황인검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둘째 아들 황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하여 부마(창성위)가 되었으며, 정조 때 동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호장공계에서는 황사우(黃士祐)·황응규(黃應奎)·황섬(黃暹)의 3대가 유명하다. 황사우는 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호조·예조·이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황응규는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르고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또 황응규의 아들 황섬은 소북파의 영수였으며,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처남으로 부제학과 대사헌을 지냈다. 하지만 계축옥사 이후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공희공계에서는 파조인 황석기의 아들 황상(黃裳)은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과 왜구를 토평하여 여러번 공신에 올랐으며, 문하찬성사와 서강도원수를 지냈다. 황석기의 현손인 황형(黃衡)은 성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평안도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황형의 아들 황기(黃琦)는 중종 때 직제학과 대사간을 거쳐 도승지와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또 황형의 증손인 황신(黃愼)은 율곡(栗谷) 이이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대신들을 논박하다가 좌천되었으나, 후에 공조와 호조판서를 지냈다. 황신의 아들 황일호는 병자호란 후 인조가 명나라와 모의하여 청나라를 복수하려던 계획이 탄로나자 끝까지 자신이 주도했다며 참수를 당했다. 그 외 조선 중기에 학자로 유명했던 황근중(黃謹中)과 황경중(黃敬中) 형제도 가문을 빛냈다.

이 밖에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황구하(黃龜河),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황사영(黃嗣永)이 있다. 순조 때의 명문장, 명필로 이름을 떨친 황기천(黃基天), 고종 때의 학자 황재영(黃在英)과 명의(名醫)였던 황필수(黃必秀) 등도 공희공계 인물들이다.

황우석 박사는 한때 세계적 과학자로 추앙을 받았으나, 연구비 유용 혐의 등 초대형 과학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반대파의 음해로 인한 희생양"이라며 황 박사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창원 황씨 근현대 인물

창원 황씨의 현대 인물로는 정관계에서는 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황인성(전 국무총리)씨를 비롯해 황우여(국회의원·새누리당 대표) 황성수 황명수 황철수 황성균 황은환 황산성(이상 국회의원)씨와 황영시(전 감사원장) 황인수(국방부차관) 황인성(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등이 있으며,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황우석 박사를 비롯하여 황병준(중앙대 부총장) 황수영(동국대 총장) 황대석(한양대 상경대 교수), 황선필(MBC 사장)씨 등이 있다. 또 재계에서는 황래성(태창기업 대표회장) 황경로(동부제강 사장) 황설(신원산업 사장) 황창기(수출입은행장), 황창익(전 충북은행장)씨가 있다. 그 외 소설 '소나기'로 유명한 소설가 황순원과 북한 최고위층 탈북자로 유명한 황장엽씨는 창원 황씨에서 분관된 제안 황씨이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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