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욱의 쪽빛보다 푸르게] <20> 창작 집단 '거기 가면' 백남영 교수 일가

장병욱 선임기자 2014. 1. 26. 20:3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 넌버벌 종이 가면극.. 가면 통한 한국성의 발견 넘어 세계로

● 철저한 가내수공업 방식남편이 연출, 아내가 극단대표처남은 웹디자인, 딸은 코디네이션분업으로 직접 가면 만들어● 에둘러 찾은 우리 것2008년 창단극 '반호프' 이후한국인의 얼굴에 대한 고민 시작2011년 '소라별 이야기'로한국적 마스크 연극의 신지평● 장벽 뛰어넘는 다양한 시도만화·샌드 애니메이션과 연계뮤지컬과 결합한 무대 등 도전서울문화재단 기대 공연작 선정도

외모가 경쟁력이 된 요즘은 밝고 빛나며 매끄러운 피부 만들기 시술을 가리켜 아사 필링(asa peeling)이라 한다. asa란 사포의 거친 정도를 나타내는 단위다. 아주 고운 사포(asa 500 이상)로 다듬은 듯한 눈부신 피부를 종이 가면에다 실현시키는 사람들이 있다."표면이 방금 피부과 갔다 온 사람처럼 돼야" 하기 때문이다. 사포질만 사흘 정도 걸리는 작업은 전 과정이 철저히 가내 수공업으로 이뤄진다. 물론 전체 작업 중 극히 일부다.

이들의 명칭은 사람을 묘하게 끈다. 창작 집단 '거기 가면'은 '그 곳에 가면'이란 뜻과 '그 곳의 마스크(maskㆍ가면)'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포개져 있을 것이다. 도대체 거기, 가면과 관계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길래?

엄밀히 말한다면 이들은 가면극 집단이다. 경기도 김포시 장기동 중흥S클래스 자택의 방 하나는 그들만의 가면극을 위한 작업장이다. 대형 모니터가 딸린 컴퓨터 옆에서는 격자처럼 나눠진 벽면 곳곳에 현재 작업 중인 가면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웃고 우는 우리 시대의 갑남을녀들이 금방이라도 말을 건넬 것 같다.

남편 백남영(45ㆍ중앙대 연극학 학과장)씨는 연출 작업을 맡고, 아내 이수은(44ㆍ중앙대 연극학과 강사)씨는 극단 대표다.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인 처남 이재욱(39)씨가 컴퓨터 작업과 웹 디자인 담당. 길고도 정밀한 공정을 필요로 하는 가면 제작 작업에서 그의 손재주는 빛을 발한다. 여기에 딸 서린(12ㆍ푸른솔 초등5)도 한몫 단단히 한다. 마스크 제작 때 채색을 하고 머리카락을 다듬는 등 코디네이션 작업에 2009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팔을 걷어 붙이고 있다. 말하자면 철저한 가내 수공업이다.

이들의 무대는 우리 고유의 가면극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부터 해 온 가면극(mask theater)에 속한다. 현대인의 일상을 담은 '반호프', 한국적인 동화 공간을 형상화한 '소라별 이야기' 등 2008년 창단 이래 이들은 꾸준하고도 개성적인 활동으로 우리 연극에 독특한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들이 개발하고 고수하는 반시대적 작업 방식에서 비롯한다.

먼저 아내 이씨가 도자기 작업 경험을 살려 찰흙으로 두상의 원형을 만들고, 석고로 덮어 얼굴 틀을 완성한다. 그 틀에 석고를 부어 굳힌 뒤 얼굴에 생명을 부여한다. 흔히 자동차 도색 작업 때 차 표면을 고르는 퍼티(puttyㆍ속칭 빠데)를 고운 사포로 서너 번 다듬고풀 먹인 마분지를 세 겹 이상 붙여 말린 뒤 꺼낸다.

학교 수업 때문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도 없다. 한 학기에 고작 한 점 나오는 정도다. 작업에만 전념했더니 서너 주 만에 1개가 나왔다. 말릴 때는 직사광선을 피해야 하는데 말린 뒤 뜯어낼 때 특히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요령도 생겼다. 얼굴을 반분하는 선에다 필름 조각을 꽂아 두고 떼 내는 방식은 경험이 일러준 기술이다.

사람의 얼굴을 감쪽같이 바꿔 친다는 영화 '페이스 오프'와는 무엇이 다를까? 영화 속의 재료는 실리콘이지만 그들의 재료는 단단하다는 점에 가장 큰 차이다. 대리석도 아닌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신라 석공들의 혼이라도 현현한 것일까? 한국에서 최초의 종이 가면극인 이들의 무대는 넌버벌이다. 마스크를 번갈아 쓰고 나와 연기하는 '반호프'의 경우는 3명의 배우가 마스크와 의상을 교체해 가며 25개 배역을 자연스레 소화했다.

잔손질의 연속인 공정은 부부가 실패를 거듭해 가며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으로, 국내에는 없다. 지난해 9월 안동에서 열렸던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소라별 이야기' 공연 후 주최측 부탁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비법을 청중에 공개하기도 했다. 앞서 거창국제연극제, 안동 야외 공연 등에서 이미 벌어졌던 현상이 재현된 것이다. 행사 후 주회 측은 부부에게 감사 메시지를 보내 훗날 더 좋은 만남으로 이어지길 기원했다.

이들의 목표는 가면이라는 보편적 계기를 통한'한국성의 발견'에 있다. 안동 고유의 설화 등 가장 토속적인 이야기를 자신들의 가면 작업과 연계시키는 작업을 통해 더 가까이 다가서는 길이다. 백씨는 자신의 시청각적 경험 전부를 그 일에 집중하려 한다.

지난 2006년 베를린에서 열린 한국 문화주간 당시 중앙대 연극학과와 국악대가 한지를 입고 연주하는 광경이 그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던 이유다. 한편 아내는 한지를 응용한 마스크의 가능성을 계속 천착해 가겠다?운을 맞춘다. 아내에게 매체로서의 종이는 늘 관심이었다. 대학원 시절부터 작품에 꼴라쥬 형식으로 한지를 응용했던 그에게는 공연 후 남은 것들을 모아 새로운 재료로 변신시킨다.

부부의 출발점에는 독일의 가면극이 있다. 보쿰대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아내는 원래 미술의 관점에서 연극에 관심이 있었다. 마스크 연극은 훌륭한 계기인 셈이다. 남편은 피나바우슈가 재직 중인 에센 폴크방 국립예술대에서 공부하며 연극을 알게 됐다.

독일에서 처음 접한 마스크 연극은 그들에게 충격이었다. 일체 대사가 생략됐으나 마임과는 분명 달랐다. 나아가 공연장 분위기 또한 상상하지 못 했다. 와인 공장을 개조해 만든 독특한 무대였다. 사실주의적 연극이 대종을 이루던 한국의 연극에 어떤 신호탄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주변 교포들로부터 아이 학교 가기 전 귀국하라는 주변 교포들의 충고도 있었지만 백씨는 2007년 먼저 귀국, 1년 동안을 극단 창단의 준비 작업에 전념했다. 얼마 후 대구 계명대 연극예술과 전임 교수직을 맡게 됐다. 당장 연기에 뛰어들고 싶었으나 학교로 가라며 극구 만류하는 선배들의 충고를 받아 들인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모교인 중앙대 교수 채용 공고에 응했다.

백씨에게는 새로운 연극 어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학생 수가 독일보다 두 세배는 많던 계명대 재직 중에는 신체 훈련, 마스크 등 독일에서의 수업 경험을 그대로 전하려 의욕에 넘쳤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한국적 상황, 특히 정치 경제적 문제에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연극은 잘 가르치지만 결국 연극은 연기 교육이 아니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종종 인생의 고민을 털어놓는 학생들에게 적절한 조언으로 답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절절이 체감한 것이다. 뒤늦게 원룸 자취로 뛰어든 교수 초년병은 유명한 대구 막창을 안주로 학생들과 소주 마시며 삶과 예술을 논하고 있었다. 그가 떠난다는 소식에 어떤 학생은 울기도 했던 기억은 그의 마스크 연극 무대에 삼투돼 있다.

2008년 중앙대 연극학과 교수로서 그는 '비사실주의 연기'등 전공 과목을 지도하면서 그 학교 최초로 마스크 연기론을 강의했다. 프랑스의 전통적 연극론인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마스크 연기론과 즉흥 연기론으로 1학기를 보낸 뒤, 2학기는 마스크 제작 실기였다.

한편 아내 이씨는 2007년 귀국, 대구시립대에서 마스크 제작 등을 가르치며 대구시립극단과 마스크 연극 '공씨(孔氏)의 헤어 쌀롱'을 올리기도 했다. 독일서 공부 중 미용실의 에피소드를 희화시켜 구상해 둔 작품이었다. 그 무대를 본 동생 재욱씨는 이미지가 너무 서구적이라며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높은 코에다 인중도 없는 모습은 우리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말이었으나 당시로서는 최선이었다. 창단작으로 올린 '반호프' 이후 한국인의 얼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고, 2011년의'소라별 이야기'로 한국적 마스크 연극이라는 신지평을 펼쳐 보였다. 에둘러 찾은 우리 것이었기에 더욱 소중했다.

때마침 판타지 3D 게임 게임 소프트 회사의 프로그래머로 있던 재욱씨가 '3D 맥스' 프로그램으로 도움을 주었다. 입체 조형물을 3차원으로 돌려 보는 이 기술로 마스크가 살아 있는 듯한 영상으로 구현됐다. "누나가 구상해 둔 모형을 석고 마스크의 형상으로 시각화해 내는 작업이죠." 회화 작업의 평면성을 극복, 훨씬 감각적인 모델링이 가능했다. 아날로그의 맛이 배인 3D 프린팅 기술이 머지 않아 실현된다면 더욱 정교한 제작과 수정 작업이 가능해 질 것으로 그는 기대한다. "길어야 3년 안에 보편화될 거에요."

이들은 먼 데를 보고 있다. 마스크 전용 극장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3D 스캔 기술로 제작한 마스크를 판매하는 전용 숍도 구상 중이다. 만화는 물론, 최근 각광 받는 샌드 애니메이션과의 연계 가능성도 충분한 것으로 이들은 내다본다. 또 정부의 차세대 예술 지원 사업도 염두에 두고 있다. 실제로 지난 23일 서울문화재단으로부터 기대 공연작으로 선정된 거가가면의 무대는 마스크 제작으로 지원을 확보해 둔 상태다. 나아가 작품의 성향과 맞는 극장을 물색, 공연장 상주 단체 지원도 생각 중이다.

아동극도, 청소년극도 아닌, 모든 연령이 공감할 수 있는 가족극이 가면을 매개로 현실화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등 고전작의 무대화, 뮤지컬과 결합한 무대 등에도 이들은 도전할 생각이다. 다민족 시대로 들어선 한국이 언어 소외 등 정서적 장벽을 가장 자연스럽게 뛰어넘을 수 있는 형태의 무대는 아닐까?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 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