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사태선포'까지 간 태국..시위용품팔이가 일상으로



잉락 친나왓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대와 정부 간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 태국 수도권에 21일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작년 11월부터 시작된 시위 정국은 한층 가파른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시위는 사실상 친나왓 총리의 친오빠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세력을 겨냥하고 있어, 정국은 탁신 전 총리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간의 대결 양상을 띠고 있다. 두 세력이 대치하는 사이, 시위는 일상이 됐고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본지 기자가 방콕의 현지 상황을 르포로 전한다. [편집자주]
지난 19일 오후, 태국 수도 방콕의 최대 번화가 중 한 곳인 수쿰빗 지역은 커다란 노랫소리로 뒤덮였다. 토요일 낮 시간인데도 반(反)정부 진영의 셧다운(shutdown·정부 폐쇄) 시위가 한창이었다. 시위대는 지난 13일부터 방콕의 주요 도로를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는 방콕 시내 거리 곳곳을 점거한 상태다. 주요 거리인 살라댕 교차로와 빠툼완 교차로, 라차프라송 교차로, 아속 교차로, 전승기념탑 주변까지 망라했다. 끝 모를 시위가 계속되면서 일반 주민의 일상과 공존하고 있는 모양새다.
시위대는 바리케이트로 아속(asoke) 교차로를 막고 대형 전광판까지 설치해 둔 상태였다. 무대 위에서 유명 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연이어 시위 지도자들이 정부 타도를 외치는 연설을 쏟아냈다. 시위 참가자들은 태국 국기가 그려진 모자를 쓰고 팔찌를 찬 채 연설에 귀기울였다. 연설 중간중간 호루라기를 불고 박수도 치며 분위기를 돋웠다.
◆ 시위의 일상화…시위와 관광의 공존
전광판과 무대 옆으로는 시위 관련 물품과 음식을 파는 장터까지 자리잡았다. 길거리 상인들은 시위대가 모이기 전부터 일찌감치 이곳으로 출근을 해 시위 관련 물품을 팔았다. 팔찌며 머리띠부터 호루라기, 티셔츠, 모자, 귀걸이, 배찌 등 다양했다. 노점 상인들은 시위 참가자를 상대로 자기 물건이 더 싸다며 호객 경쟁을 벌였다.
물품마다 '2014 셧다운' '리스타트(restart·다시 시작하다) 방콕' 같은 구호가 장식돼 있었다. '왕이시여 영원하라(Long live the King)' 같은 문구가 쓰인 물품도 많았다. 태국에서는 국왕이 '살아있는 신'처럼 여겨진다. 반정부 지도자들도 현 정권 퇴진을 요구하면서 국왕의 뜻을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시내에서 만난 택시기사 낫타퐁(31)씨는 "태국 국민의 70%쯤 현 정부를 지지하고 30%만 반대한다"며 "30%의 대부분도 왕을 지지하는 무정부주의자이지 이전 정부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는 이들이 아니다. 하지만 수텝 전 부총리 세력이 이들을 이용해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다"고 했다.
시위 현장에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이곳의 시위 문화마저 관광 상품마저 된 듯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시위 물품과 음식을 잔뜩 쌓아놓고 파는 장터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한 달 예정으로 태국에 여행 왔다는 영국인 션 스톡스(26)씨는 "오기 전에 시위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은 것 같다"며 "이곳만 봐서는 시위 현장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시위대는 밤으로 가까와지면서 커졌다. 곳곳에서 거리 행진이 이어졌다. 길거리나 지하철에 태국 국기가 새겨진 팔찌를 하고 모자를 쓴 일행들로 물결쳤다. 19일 저녁 7시쯤 아속 교차로를 꽉 매운 시위대는 일제히 호루라기를 불며 잉락 총리의 사퇴를 촉구했다.
시위는 해를 넘겨가며 계속되고 있다. 방콕 정부에 따르면 지난달 26일 이후 시위로 인한 사상자 수가 사망 4명 부상 248명으로 집계됐다.
시위의 발단은 지난해 11월이었다. 잉락 정부가 정치사범으로 분류된 언론인과 정치인에 대한 사면을 추진하면서 친오빠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도 포함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야당인 민주당과 수텝 터억수반 전 부총리가 주도하는 반정부 시위대는 사면이 탁신 전 총리를 위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탁신 전 총리는 2006년 하야한 뒤 권력 남용과 부패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던 중 2008년 해외로 망명했다.
수텝 전 부총리는 아예 잉락 총리 퇴진과 정권 탈환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위대가 폭력성을 더해가면서 군 개입까지 거론된다. 하지만 태국 육군은 정국 불안 해소를 위해 군이 나서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잉락 총리는 오는 2월 2일로 예정된 조기 총선을 강행하겠다고 밝혔지만 수텝 전 부총리 세력은 조기 총선 대신 잉락 총리 퇴진 요구를 고수하고 있다.
◆ 태국 경제적 타격 심각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경제는 짙은 멍이 들고 있다. 관광 수입 비중이 큰 태국으로서는 최대 성수기인 1월에 대규모 시위를 맞아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관광업 종사자들은 타격을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그랜드 이스틴 호텔의 직원 릴리는 "1월은 관광 성수기로 평소보다 투숙객이 90%가량 늘지만, 올해는 오히려 30%가량 감소했다"며 "경제를 생각해서라도 이 명분 없는 시위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주 태국 관광청은 올해 1분기(1~3월) 태국 호텔 이용객이 30~40%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태국 재무부도 지난 16일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을 종전 4%에서 3.1%로 내렸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전 경제성장률 전망은 5.1%였지만 시위가 계속되면서 낮추게 됐다고 재무부는 밝혔다.
급기야 방콕 수도권에 22일부터 60일간 비상사태(state of emergency)가 선포됐다. 태국 정부는 21일 국무회의를 열고 22일부터 60일간 수도 방콕과 방콕 주변 도시에 비상사태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수라퐁 토위착차이쿤 외무장관은 "반정부 시위대를 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비상사태를 선포하면 통행금지와 언론 규제 등이 가능하다.
태국의 경제는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까지 고개를 든 상황이다. 방콕포스트는 20일 태국이 디폴트(채무불이행) 위험에 직면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반정부 시위를 우려한 투자자들이 태국 주식과 채권을 매도해 태국의 부채 규모가 지난해 8월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웰스파고는 지난해 11월부터 태국 주식과 채권 40억달러어치를 매도했다. 골드만삭스와 퍼시픽인베스트먼트매니지먼트 등도 태국 투자 규모를 줄이고 있다. 웰스파고의 로렌 반 빌존 애널리스트는 "지난해 말 국제 채권 펀드에서 태국 투자액을 모두 철회했다"며 "태국의 두 정치 세력 간 골이 매우 깊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고 방콕포스트는 전했다.
산업계의 우려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도요타는 20일 시위가 계속된다면 6억900만달러 규모의 태국 투자 계획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도요타는 태국 최대 자동차 생산업체로, 태국에서 한 해 80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한다. 도요타는 당초 3~4년 내 태국에서 20만대의 자동차를 추가로 생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도요타의 타나다 교이치 대표는 "태국 시위가 계속되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다른 지역을 물색할 것"이라며 "현재 진행 중인 사업을 철수할 수는 없지만, 규모를 늘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관광객 주의…시위 지역 피하고 지하철 활용 추천
태국 현지에서 관광객이 체감하는 위험 수위는 높지 않았다. 시위 중심 지역을 피한다면 대부분의 시내는 고요하다. 또 대부분의 시위는 저녁에 활발해진다. 늦은 밤 외출을 삼가하면 위험한 상황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지난 19일에도 전승기념탑 주변에서 수류탄으로 추정되는 폭발물이 터져 2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현재 전 세계 40여 개국이 태국에 여행주의보를 발령했다.
보통 태국 여행객들은 택시를 많이 이용하지만, 지금처럼 도로 곳곳이 시위대로 막혀 있는 경우에는 지하철이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하다.
한국 외교부는 21일 "시위 주최 측이 잉락 총리가 사퇴할 때까지 이번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며 "폭력사태도 다소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시위 발생 지역과 시위대가 주 거점으로 삼는 지역에 대한 접근을 최대한 삼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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