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미래] 배곯는 모습에 시청자는 울고 모금은 늘지만.. TV는 고민입니다

김경하·문상호 더나은미래 기자 2014. 1. 14.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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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9달러로 가난하고 연약한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프리카를 구할 수 있습니다!"

백인 여자 연예인이 아프리카의 한 마을을 방문, 소년가장 마이클을 만나 눈물을 훔친다. 아버지는 두 살 때 돈을 벌러 집을 떠났고, 대니시(빵의 일종)의 맛도 모르는 불쌍한 아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던 마이클은 카메라가 걷히자 얼굴에 냉소를 머금으며 한마디한다. "일종의 비즈니스죠." 유튜브에서 60만건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한 이 동영상의 제목은 '잘못된 아프리카 구하기(Let's save Africa!-Gone wrong)'. 지난해 11월 노르웨이의 국제 원조 펀드 '사이'가 제작한 이 동영상은 획일적인 미디어 모금의 콘텐츠를 비꼬면서 네티즌의 공감을 얻었다. 최근 해외에서는 위기 아동의 비참한 모습을 부각해 펀드레이징을 하는 방송 모금을 '포버티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라 부르며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과연 국내의 방송 모금 상황은 어떨지 되짚어봤다.

편집자

"국내 방송 모금의 역사는 '희망TV SBS' 전후로 나뉜다."

수많은 비영리단체의 공통된 목소리다. 1997년 국제구호 기구 월드비전과 함께 '기아체험 24시'를 통해 첫 방송 모금을 시작한 이후 17년 동안 모인 후원액은 1703억원에 달한다. '기아체험 24시'는 1975년 호주에서 시작돼 20여개국에서 실시 중인 세계적 모금 봉사활동으로, 한국에서도 매년 청소년, 대학생, 일반인 1만명가량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다. 대학교 운동장, 실내체육관 등에 모인 참가자들은 방송 당일 24시간을 굶으며 스타의 저개발국 봉사활동 영상을 보고 ARS(자동응답전화) 후원을 하는 방식이다. 첫해 모금액은 19억4000만원.

2008년부터 SBS는 월드비전, 굿네이버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굿피플 등 6개 비영리단체와 파트너십을 맺고 '기아체험 24시'에서 '희망TV SBS'로 프로그램을 단장하면서 방송 모금의 영역을 확대했다. 이슬기 SBS 브랜드전략팀 과장은 "월드비전이 방송을 통해 매해 20억원이 넘는 모금에 성공하면서 비영리단체들의 '동반 성장'에 대한 이슈가 제기됐다"고 했다. 가을에만 방영되던 방송은 2006년부터 봄·가을에 한 번씩 연 2회 방영됐고, 일시 후원뿐만 아니라 정기 후원자 모집까지 대상도 확대했다. 방송 모금의 포맷은 각 비영리단체의 연예인 홍보대사가 해외 빈곤국의 현장을 찾는 모습이 10분 단위로 편집돼 후원을 독려하는 방식이다. 이슬기 과장은 "이틀 동안 방송을 통해 걸려오는 후원전화를 비영리단체들이 함께 응대하고 합의된 배분 기준에 따라 모금액을 배분한다"며 "단체별 시청률에 따라 모금액을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방송 모금액은 6개 비영리단체가 함께 참여한 2008년 161억원, 다음해 109억원을 달성하면서 방송 모금 100억원 시대를 열었고, 2010년에는 300억원으로 최고 모금액을 찍었다. 2012년 233억원을 모금하며 약간 주춤하다가, 지난해 133억원으로 절반가량 줄었다. 하반기 방송 ARS 참여자 수도 1만2000명 정도로 작년 대비 50%가량 감소한 수치다. '희망TV' 방송 직전 KBS는 필리핀 재해 긴급 구호 방송 모금을, MBC는 필리핀 재해 구호 긴급 방송 모금 프로그램을 편성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하락 추세다.

◇'희망TV SBS' 17년간 1703억원… 비영리단체 모금에 파워를 더했다

'희망TV'의 성공으로 인해, 다른 매체에서도 비슷한 포맷의 방송 모금이 속속 등장했다. SBS가 '기아체험 24시'로 방송 모금을 시작한 같은 해에, KBS는 매주 토요일 저녁 '사랑의 리퀘스트'를 시작하면서 정기 모금 방송의 포문을 열었다. 국내 사회복지시설, 전국 76개 협력 병원 등의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지원하는 방송 모금 프로그램으로, 15년 동안 787억7596만원(2012년 12월 기준)의 후원금이 모였다. 2010년부터는 '희망로드 대장정' 프로그램을 출범, KBS도 국내 지원에서 해외 지원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도 2004년 '나눔은 희망입니다' 프로그램을 시작, 케이블 업계에서도 자체적으로 방송 모금에 나섰다.

방송 모금이 양적으로 성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미디어에 노출된 아이의 인권에 대한 이슈도 제기되는 등 시민들의 '기부 피로도'도 함께 커지고 있다. "5분 이상 방송을 보기 힘들다" "눈물을 쥐어짜게 하는 자극적인 장면들을 보는 것이 불편하다" 등 불편함을 호소하는 시청자들도 생겨나고 있는 것. 비영리단체 내부에서도 방송·영상 제작의 기준을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013년 8월,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이하 KCOC)는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방송 촬영 수칙'을 제작해 공표했다. 방송 제작 과정에서 아동들이 일방적인 시혜의 모습으로 비치지 않고, 인권 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전지은 KCOC 정책센터 대리는 "올해는 해외의 방송 제작 가이드를 면밀히 살펴 수칙의 내용을 더 세분한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한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만들 예정"이라고 말했다.

방송 제작진도 고민이 많다.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사람의 감정을 건드려 모금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로부터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도와줬는데 변화는 무엇이냐'는 피드백도 받는다. '희망TV' 제작을 담당하는 SBS 성영준 PD는 "재작년부터는 아동 변화 사례 등 희망적인 내용을 담은 콘텐츠를 강화하고 있다"면서 "아직 저개발국의 현실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는 없기에 그대로의 모습을 풀어내는 것도 제작자의 역할"이라고 했다. 황성주 굿네이버스 나눔사업부 미디어팀장은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에게 영양죽과 영양제를 주고 병원에서 링거를 맞히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1주일 뒤에 급작스럽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며 "외면하고 싶은 사건이 많이 일어나지만 중요한 부분은 현장 왜곡 없이 촬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EBS는 2012년 2월부터 월드비전과 함께 '글로벌 프로젝트 나눔'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매주 금요일마다 저개발국의 소외된 아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기존 방송 모금과 다른 점은 '아이들의 일상'을 그대로 그려내는 '휴먼 다큐멘터리 형식'을 택한 것이다. EBS 이우석 PD는 "2년가량 방송을 제작하다 보니 어떤 콘텐츠가 더 시청자들을 자극하는지 알 수 있다"면서 "현지 문화를 반영해 시사적인 아이템을 다루거나, 아이들이 비호감처럼 생기면 전화 수에서 바로 차이가 난다"며 안타까움을 호소했다. 지난해 전화 응대 활동에 참가한 A단체 관계자는 "열악한 시설의 병원 응급실에서 희귀병·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는 아이가 노출되고, 연예인이 눈물로 후원을 호소할 때 전화가 빗발치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아이들을 위한 '모금', 콘텐츠에 따라 달라지는 '모금 액수'… 딜레마에 빠진 방송 모금

방송사와 비영리단체들은 이제 머리를 맞대고 방송 모금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김민경 월드비전 미디어기업팀 팀장은 "이전에는 '모금'에 집중한 시기였다면, 가장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단체이니만큼 시청자들의 궁금증에 답할 시기가 왔다"면서 "앞으로 변화된 아동 스토리를 적극 브라운관에 담을 예정"이라고 했다. 지난해 하반기 희망TV에서 굿피플은 저개발국의 사회 문제를 드러내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전략을 택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아동 마녀 사냥' 풍습을 미디어로 담으면서, 잘못된 미신으로 아이 2만여명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모습을 조명했다. 굿피플 홍보팀 신유미 담당자는 "참혹한 장면을 덜 노출하기 위해 퇴마 의식도 아이의 팔에 촛농을 떨어뜨리고 눈을 누르는 모습만 촬영했다"면서 "자극적인 콘텐츠를 피해 각별히 신경을 쓴 만큼 내부에서는 만족도가 높았지만 시청자들의 후원 전화로는 끈끈하게 이어지지 않은 것 같다"고 답했다. 황성주 굿네이버스 나눔사업부 미디어팀장은 "요즘 후원자들은 본인의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일회성 모금 행사보다 피드백이 분명한 곳에 기부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인데 "지역사회 개발 프로젝트는 4~5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기에 이를 미디어에 어떻게 담을지 고민"이라고 했다.

SBS 브랜드전략팀 이슬기 과장은 "지금까지 희망TV가 방송 모금에서 '모금'의 역할을 강조했다면 2014년부터 애드보커시(Advocacy·옹호) 역할을 좀 더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초, SBS는 현지의 적정 기술을 다룬 '인간을 위한 디자인' 다큐멘터리를 방영했고 시청률 2.8%를 기록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콘텐츠가 후원자들의 지갑을 열게 할지는 의문이다. 아이들의 인권을 존중하며 방송을 하자니, 자극적인 콘텐츠가 '모금'에는 더 도움이 되는 현실. 비영리단체들이 앞으로 어떤 전략으로 잠재적 후원자들의 마음을 살 수 있을지, 그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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