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로를 때며 나와 지구가 훈훈해졌다

김은남 기자 2014. 1. 3.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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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를 직접 제작해 사용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도시를 떠난 귀농자들, 단열 환경이 시원찮은 도시 생활자들이 그렇다.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이 주관한 행사장에서 '적정기술'을 추구하는 이들을 만났다.

〈나는 난로다〉 행사장을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자 붉은 벽돌로 지어진 단층 건물이 나타났다. 그 건물 창으로 연통 수십 개가 삐져나온 가운데, 연통마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난로가 주인공인 곳에 왔다는 게 비로소 실감난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자욱한 연기 속에 자태를 드러내는 난로·난로들…. 여기저기 나무 타들어가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리고, 어디선가 고구마 굽는 냄새가 코를 벌름거리게 만든다.

이번에 3회째 열린다는 〈나는 난로다〉 행사 취재를 위해 전북 완주군으로 향할 때만 해도 기자는 내심 시큰둥했다. ‘그깟 난로 좀 보겠다고 그 먼 시골 동네까지 찾아갈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싶어서였다. 착각이었다. 행사가 열린 사흘간(지난 12월6~8일) 이곳을 찾은 관람객은 1만여 명. 인구 8만인 완주를 들었다 놓았다 할 숫자다. ‘농사짓는 중·장년층이 주로 난로를 보러 오지 않겠나’ 지레짐작했던 것도 착각이었다. 관람객 중에는 20~30대가 적지 않았다. 아기를 안은 채 난로 구석구석을 진지하게 살피는 젊은 부부도 볼 수 있었다. 행사를 주관한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 김성원 이사(46)는 “귀농·귀촌을 했거나 준비 중인 사람,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 등이 두루 난로를 보러 온다”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야외 활동을 하며 불을 다루는 재미에 눈뜬 캠핑족도 난로에 관심을 갖는 추세다.

ⓒ시사IN 신선영
왜 난로일까. 일단은 도시를 떠나는 순간 ‘난방=생존’의 문제가 되더라고 한경호씨(46·파랑골 행복난로 대표)는 말했다. 한씨는 본래 예술가다. 자연 속에서 미술 작업을 하고 싶어 7년 전 충북 진천으로 귀농했다. 그런데 귀농하자마자 맞닥뜨린 것이 매서운 추위였다. 어린 아들딸은 덜덜 떨고, 한씨도 도저히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귀농자가 비싼 전기나 가스로 난방을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무 때는 난로를 사들이려 했으나 그 또한 가격이 몇 백만원대로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직접 만들어보자’ 하고 나서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 만든 것이 ‘허접한 가스난로’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실력이 향상되었다. 예술가답게 디자인 감각도 가미했다. 3년 전, 그는 웃는 돼지 형상을 난로 앞면에 조각한 ‘돼지 난로’를 들고 나와 전남 담양에서 열린 제1회 ‘나는 난로다’ 경연대회 대상을 차지했다. 올해는 집에서 기르는 개 형상을 딴 ‘동이 난로’를 들고 특별 출연했다.

농사를 짓는 데도 난로는 긴요하다. 최근 농업용 전기요금이 인상되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농가가 많다. “전기나 가스처럼 화석연료로 만든 비싼 에너지를 농업용으로 쓰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간 정부 정책이 잘못돼 이런 일이 벌어졌지만 앞으로는 나무나 햇빛처럼 좀 더 친환경적인 에너지를 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라고 김성원씨는 말했다. 가정용과 하우스용 두 가지 난로를 이번 대회에 출품한 이학열씨(강원도 원주)는 “하우스용 난로의 경우 밤 10시에 나무를 넣어두면 아침까지 온기가 남아 있다. 나무도 기존 난로에 비해 절반밖에 안 쓴다”라고 자신이 만든 화목난로(장작난로)를 자랑했다.

환경 생각하는 ‘난로꾼’들의 축제

그런가 하면 도시 사람에게도 난로는 필요하다. 부산에서 가구상을 하는 박정원씨(62)는 “아내를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 난로를 만들게 됐다”라고 말했다. 단열이 시원찮은 낡은 주상복합 건물에 살다보니 아내가 늘 추위에 떠는 모습이 안쓰러웠다는 것이다. 난로를 직접 만든 지 2개월 되었다는 박씨는 ‘나이아가라’라고 이름붙인 난로를 들고 이번 대회에 나왔다가 관람객이 뽑는 인기상을 받았다. 난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끔 만든 불꽃 창 바로 너머에 ‘사랑’이라는 글씨를 철근으로 만들어 고정시킨 다음, 불꽃이 타들어감에 따라 글씨 또한 발갛게 달아오르게 한 박씨의 ‘닭살 애정행각’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난로꾼’들이 좋은 난로의 조건으로 꼽는 것은 대체로 비슷하다. 나무나 펠릿(압축 목재) 등 땔감을 덜 쓸 것, 연기가 덜 날 것, 불이 잘 붙을 것, 오래 탈 것, 화재 위험이 없을 것 등등. 이름하여 ‘고효율 화목난로’다. 김성원씨에 따르면 저효율 난로의 열 손실은 평균 75%에 육박한다. 고효율 난로 열 손실(평균 36%)의 두 배다. 이마저도 줄이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출품자들은 이런저런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초창기만 해도 출품작 대부분이 단순한 단열 깡통난로(로켓 스토브)였는데, 최근에는 거꾸로 타는 방식의 난로나 바닥에서 오래도록 타는 방식의 난로(베이스버닝 난로)가 많이 보인다. 기술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고 있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이번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흥수씨의 ‘거창화로’.
ⓒ시사IN 신선영 귀농 후 ‘생존’ 차원에서 난로를 제작한 한경호씨(가운데) 등 참가자의 사연은 다양했다.

물론 기후 특성으로 인해 다양한 난로가 발달한 북유럽·러시아 등에 비하면 이들의 기술은 걸음마 수준이나 다름없다. 난로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업체와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주목되는 것은, 이들이 자신의 기술을 기꺼이 공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에 난로를 출품한 30여 명은 자신들의 설계도를 모두 공개했다. 이들 대부분은 김성원씨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흙부대 기술 네트워크(cafe.naver.com/earthbaghouse)’ 회원으로, 평소에도 이곳에서 자기가 터득한 기술과 노하우를 공개하고 검증받는 데 익숙하다.

특허 따지고 이익을 좇는 개인이나 기업과 달리 이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른바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적당기술’ ‘전환기술’이라고도 불리는 적정기술은 주어진 인적·물적 자원을 함부로 쓰지 않고 말 그대로 적정하게 쓰는 기술을 일컫는다. 석유·가스 따위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고 환경을 덜 파괴하려는 기술이기도 하다. 3년 전 ‘나는 난로다’ 행사를 처음 기획한 계기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문이었다고 김영현 유알아트 대표는 말한다. “한국에 에너지 위기가 닥치면 일본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 도래할 것이다. 그런데도 에너지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각성에서 우리 스스로 친환경 에너지를 주제로 한 축제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시사IN 신선영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의 김성원 이사(무대 왼쪽)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단두대 타임’을 가졌다.

이들은 또 공동 작업을 중시한다. 지난여름 한국을 찾은 일본의 적정기술 발명가 후지무라 야스유키 씨(〈3만 엔 비즈니스〉 저자)는 “혼자 만들고 조립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DIY 오타쿠’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진정한 삶의 기술은 뭔가를 함께 나누고 만드는 데서 시작되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나이아가라 난로를 출품한 박정원씨는 “난로를 만드는 사람들과 온·오프라인에서 어울리면서 10년은 젊어진 것 같다. 별것 아닌 관심사나 기술도 서로 격려하고 지지해주니까 신이 난다”라고 말했다.

대회가 열리는 사흘 동안에도 참가자들은 저녁 시간마다 ‘단두대 타임’을 가졌다. 출품된 난로를 놓고 참가자끼리 신랄하게 상호 비평을 하는 시간이다. 대회 첫날인 12월6일, 단두대에 오르기를 자청한 이는 이번 대회 홍일점 참가자인 박명선씨(경기도 파주). 화가로서 자신의 작업장을 좀 따뜻하게 해볼까 싶어 난로에 관심을 가졌다가 거의 ‘난로 폐인’ 수준에 이르렀다는 박씨는 단아한 디자인에 오븐 기능이 돋보이는 여성용 난로 ‘꽃순이’를 들고 이번 대회에 참가했다. 사회를 맡은 김성원씨가 “여기는 여자라고 봐주는 법 없다”라고 분위기를 잡았다. 실제로 이어진 것은 날카로운 지적들. “꽃순이 하단부 용접 부위에서 균열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애초 설계도대로라면 난로 아랫문을 열었을 때 역류 현상이 생길 것 같다” 따위 비판에 박씨는 항변하기도 하고 수긍하기도 했다.

ⓒ시사IN 신선영 ‘난로 닥터’로 자원봉사를 한 진일수씨.
ⓒ시사IN 신선영 ‘난로 닥터’로 자원봉사를 한 진일수씨는 이번 대회에 직접 만든 맥주병 온수기를 들고 나왔다.
‘산업혁명 이전에 우리가 갖고 있던 감각’

김영현 대표는 “이런 상호 토론 내지 상호 학습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곤 한다. 현장에서 진화하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는 진리가 적정기술에서만큼 잘 통하는 데도 없다. 난로를 만드느라 익힌 기술은 구들을 놓고, 흙집을 짓고, 햇빛을 이용한 열풍기·온수기를 만드는 일 등에 다양하게 응용된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이를 통해 ‘산업혁명 이전에 우리가 갖고 있던 삶의 감각’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난로 고수’로 통하는 진일수씨(50)도 시작은 벽난로였지만 지금은 소파 겸용 물탱크, 햇빛온수기 따위 별별 것을 다 만든다. 이번 대회에는 직접 만든 맥주병 온수기를 들고 나왔다(행사장에는 난로 전시관 외에 적정기술 전시관도 따로 운영되었다). 집에 굴러다니던 빈 맥주병과 고물상에 버려진 흙 묻은 배관을 이용한 친환경 온수기로, 햇빛을 받으면 샤워할 만한 수준(40℃)으로 물이 데워진다. 진씨는 “학교 다닐 때 대류현상 안 배운 사람 있나. 문제는 이걸 몸으로 익히는 거다. 머리로 배운 지식은 금방 잊혀도 손으로 익힌 기술은 오래간다. 여기에 영감만 덧붙이면 얼마든지 응용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그는 ‘난로 닥터’로도 활약했다. 집에서 탈이 난 난로를 가져오면 무료로 고쳐주는 구실을 맡은 것이다. 그는 “못쓰게 됐다고 바로 버리려 들 게 아니라 조금만 손보면 얼마든지 쓸 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자원을 아끼고 재활용하기. 이는 적정기술의 기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적정기술을 연구하고 전파하려는 조직이나 단체도 여럿 생겨나고 있다. 〈나는 난로다〉 행사를 주관한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이 대표적이다. 지난 4월 창립한 이곳에는 적정기술 연구자·귀농자 등 40여 명이 조합원으로 참여 중이다. “요즘 난로 등 적정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 완주군처럼 이런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지자체도 생겨나고 있다. 여기서 교육받은 이들을 자기 마을로 돌려보내 더 많은 사람에게 에너지 자립 기술을 전파하는 것이 협동조합의 목표다”라고 김성원 이사는 말했다.

김은남 기자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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