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이주 150년> ③강제이주 첫 정착지 우슈토베
'버려진 비석, 잊혀진 기억'…기념관 하나 없어
(우슈토베<카자흐스탄>=연합뉴스) 김현태 특파원 =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서도 초원의 칼바람은 살을 파고들었다.
지난 23일 찾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겨울 날씨는 매서웠다. 초기 고려인들이 겪었을 영하 30도의 혹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얼어붙는 콧김과 갈대만 무성한 들판은 그때의 척박함을 짐작케 했다.
옛 소련 시절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1937년 9월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떠나온 고려인들은 우슈토베에 첫발을 내디뎠다. 소련 정권은 연해주 일대에 모여 살던 고려인이 일본의 간첩으로 활동할 수 있다고 우려해 약 18만 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각지로 강제이주시켰다.
"한 달간 화물열차를 타고오며 많이 죽었소. 죽은 사람들은 역에 설 때마다 소련 경찰들이 버렸는데 어디에 묻었는지 아무도 모르오." 12살 때 가족과 함께 우슈토베로 왔다는 고려인 1세 미하일 천(88)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도착해서는 카자크인 집의 창고나 축사 등을 얻어 살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들판에 토굴을 파고 살기도 했소." 그는 말을 이었다.
우슈토베 외곽에 있었다는 토굴촌은 지금은 공동묘지로 변해 있었다. 남아있는 몇 개의 토굴은 갈대에 묻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지난해 5월 카자흐 고려인 협회가 세운 정착 기념비 만이 이곳이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애환이 서린 강제 이주 정착촌임을 짐작케 했다.
잘 정돈된 묘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비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비문엔 '리안나 1930-2006'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고려인 1세의 비석으로 보였다. 버려진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잊혀진 고려인의 수난사를 말없이 중언하는 듯했다.
"들어본 적 없어요." 고려인 3세인 남 스베타(14)는 우슈토베에 살면서도 선조들의 강제 이주와 정착 역사를 모른다고 했다. 그녀는 한국어는 못하지만, 가족들이 말해 스스로를 고려인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추석이나 설 등 한국 전통 명절을 아느냐는 물음에 스베타는 수줍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가족들과 김치, 국수, 김밥 등을 즐겨 먹는다"며 그나마 지키고 있는 한식 문화를 자랑했다.
우슈토베는 크즐오르다, 카라간다 등 카자흐 내 고려인 초기 정착지와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정착지 가운데서도 아직 고려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유일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도 소련 시절 러시아어와 러시아 문화 중심의 교육을 강요한 탓에 한국어와 한국 문화, 고려인 역사 등을 가르치는 곳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카자흐가 옛 소련에서 독립한 후 한국과 수교를 맺은 해에 한글학교가 처음 생겼었지만 이마저도 재정 악화로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2009년부터 우슈토베에서 자비를 털어 한글교실을 운영하는 박희진(69) 선교사는 "고려인들이 모국어를 잃어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 선교사는 "고려인 역사를 알고자 한국분들이 종종 이곳을 찾지만, 남아 있는 게 없다"며 "한국 정부가 나서서 유물과 사료를 모아 작은 규모라도 기념관을 만들었으머 좋겠다"는 희망을 밝혔다.
우슈토베 고려인들도 잊혀진 조국의 문화와 한인의 이주 역사를 알고 싶어하지만 마땅히 배울 곳이 없어 박 선교사의 집은 현지 고려인들의 사랑방이자 한국 문화원 역할을 한 지 오래다.
한때 수만 명의 고려인으로 넘쳐났을 우슈토베에서는 고려인들이 농사를 지으려고 팠다는 수로와 강제 이주의 애환이 서린 낡은 철로만이 그들을 기억하는 듯했다.
'이곳은 원동(극동)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
우슈토베 토굴촌의 정착 기념비에 서투른 한글로 새겨진 이 짧은 글귀가 내년으로 150주년을 맞는 한인 러시아 이주사의 뼈아픈 한 대목을 웅변하는 듯 했다.
mtkh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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