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64〉 서씨(徐, 西), 이천서씨(利川徐氏)

2013. 12. 24.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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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徐, 西)씨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서씨는 '평온할 서(徐)'를 쓰는 성씨와 '서녘 서(西)'를 쓰는 성씨 두 개가 있다. 그중 대부분은 평온할 서(徐)를 쓰는 성씨로 2000년 인구통계조사에서는 69만3954명으로 파악되었다. 그 외 서녘 서(西)를 쓰는 성씨는 2개 본관에 1295명이 살고 있다. 서(西)씨는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성씨이다. 이들은 청나라에서 만주인 서납포(西拉布)와 몽골인 서림(西林)이 있었던 기록이 있느니 만큼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서(徐)씨는 이천서씨를 비롯하여 달성(達城·대구 포함),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당성(唐城), 평당(平當), 복흥(福興), 의령(宜寧), 남양(南陽), 황산(黃山), 염주(鹽州), 군위(軍威) 등 20본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조선시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53본, 일제강점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176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씨는 신라 말기에 아간(阿干)을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고 있는 이천서씨가 종가라고 할 수 있다. 그 외 당성서씨 등 중국에서 건너온 몇몇 서씨를 제외하면 모두 이천서씨에서 분관된 성씨다(증보문헌비고, 조선씨족통보).

서씨의 기원에 대해선 두세 가지 설이 공존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단군시대 제후국의 하나인 예국(穢國) 군장(君長) 여수기(餘守己)라는 설이 있다. 즉, 여수기가 9명의 아들을 두고, 고을을 나누어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 공을 못 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 하여 중인변(衆人邊)을 붙여 여(余)자를 서(徐)라고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다른 설로는 기자의 후손이라는 설이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는 "기자의 40세 손이고 기씨 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 땅인 서아성(徐阿城)에 자리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서(徐)씨의 기원에 대해선 백제왕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앞에서 의자왕의 태자인 부여 융이 당나라로 건너가 살다가 당 고종에게 서(徐)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설이다(만성대동보). 하지만, 최근 부여 융과 여동생의 유적이 중국 장안 근처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씨를 여전히 부여씨(扶餘氏)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렇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백제에서 성씨를 처음 쓴 근초고왕은 여씨로 기록했고, 이후 무왕 때 부여씨로 개칭했다)가 삼국통일이 되면서 성씨를 부여(扶餘)에서 서(徐)로 바꾸고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 실제 발해 대조영의 후손인 대(大)씨가 고려로 망명한 뒤 성을 태(太)로 바꾸고 살았던 것, 또 고려의 왕(王)씨가 조선 건립 이후 성을 전(全), 옥(玉) 등으로 변형해서 살았던 사례를 볼 때, 이 주장의 신빙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경기도 이천의 효양산 기슭에 있는 이천서씨 시조 서신일 묘역. 후손을 점지해준 사슴설화와 함께, 이 묘역도 서신일이 죽은 뒤 사슴이 상주를 이끌고 와서 잡아줬다는 설화가 있다.

◆이천서씨(利川徐氏)는

이천서씨의 시조는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이다. 하지만, 신라 말 극심한 혼란을 피해 낙향하여 아우인 서신통(徐神通)과 함께 한천(漢川·지금의 이천)에 정착했다. 그런데, 이천서씨에서는 파평윤씨의 잉어전설과 같은 재미난 설화가 전해온다. 그 이야긴 다음과 같다.

"서신일이 74세에 부인과 사별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어 다시 부인을 얻었다. 그런데 어느 봄날 화살에 꽂힌 사슴 한 마리를 구해주고 산으로 돌려보냈다. 그날 밤 서신일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낮에 살려준 사슴은 나의 아들인데, 그대의 힘을 입어 죽음을 면했소. 나는 그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재상(宰相)에 올라 영달(榮達)을 누리도록 도우리라'고 말했다."

그 후 서신일이 85세에 아들인 서필(徐弼)을 얻었다. 서필은 고려 광종 때 벼슬이 종1품 내의령(內議令)에 올랐다. 그리고 서필의 아들이 거란군과의 담판으로 유명한 서희(徐熙)다. 또 서희의 아들은 문하시중을 역임한 서눌(徐訥)이고, 그의 딸이 덕종 비인 원목왕후이다.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예언대로 대대로 재상에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서씨 가문에서는 사슴 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

이렇게 형성된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그것은 서신일의 아우 서신통의 아들 서목(徐穆)이 후백제를 정벌하러 가는 왕건을 도와 강을 건너게 해주고, 고려를 건국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원래 이천(利川)이란 지명도 왕건이 강을 건넌 것 때문에 지어졌다. 즉, 주역의 이섭대천(利涉大川·큰 강을 건너니 이롭다) 효사에서 따온 말이다.

이천서씨의 분파로는 서념(徐恬)을 파조로 하는 문한공파(文翰公派), 서선(徐選)을 파조로 하는 공도공파(恭度公派), 서윤(徐玧)을 파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派), 서보(徐輔)를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서광(徐珖)을 파조로 하는 예빈공파(禮賓公派), 서익(徐翼)을 파조로 하는 부령공파(副令公派), 서학종(徐鶴踵)을 파조로 하는 참봉공파(參奉公派), 서첨(徐詹)을 파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 서릉(徐稜)을 파조로 하는 절효공파(節孝公派), 서유(徐愈)를 파조로 하는 양경공파(良景公派), 서척(徐陟)을 파조로 하는 창사공파(倉使公派), 서진(徐晉)을 파조로 하는 교리공파(校理公派) 등이 있다.

현재 중국 계통의 당성서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씨는 이천서씨에서 분적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고려시대에는 이천서씨가, 조선시대에서는 달성서씨(대구서씨 포함)가 대표적인 명문가 중의 하나였다. 이천서씨는 조선시대에 10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문과가 24명이고 무과 33명, 사마시 44명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이천서씨는 총 5만3407가구에 17만207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서희의 묘. 이천서씨 시조 서신일의 손자이자 서필의 아들인 서희는 우리나라 역대 외교관 중 가장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천서씨의 연혁과 인물

이천서씨는 고려 건국에 협력함으로써 고려시대를 주름잡았던 대표적 명문가의 하나이다. 시조 서신일의 아들이 정민공 서필이며, 서필의 아들이 바로 거란군을 외교담판으로 물리치고 강동6주를 회복한 서희 장군이다. 서희는 과거에 급제해 광평원외랑을 거쳐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송나라에 가서 중단된 국교를 트고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가 됐다. 성종 12년, 거란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서경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고 했지만, 서희는 이에 반대하며 국서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거란과 싸우지 않고 그들을 철수시켰다. 이듬해 평장사(平章事)로서 출정해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땅인 강동6주를 회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낸 그는 병을 얻어 개국사에서 숨을 거뒀다.

서희의 맏아들이 서눌(徐訥)인데, 그는 성종 때 과거 급제하여 형부시랑이 되어 송나라에 다녀오고, 국자제주(國子祭酒)에 올랐다. 그의 딸이 왕비(원목왕후)가 되자 덕종의 검교태사가 되고, 문하시중에 올랐다. 고려 인종 때, 서눌의 증손인 서공(徐恭)은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평장사에 올랐으며, 담력이 크고 지략과 무예에 뛰어나 큰 명성을 떨쳤다.

특히 내의령 서필 이후 평장사 서봉, 내사령 서희, 문하시중 서눌, 좌복야 서유걸, 장야서령 서유위(徐惟偉), 원목왕후, 형부상서 서준방(徐俊邦), 문하시중 서수(徐琇), 판삼사사 서정(徐靖), 병부상서 서존(徐存), 좌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 좌복야 서진부(徐振扶), 평장사 서성(徐成), 동지추밀사 서순(徐淳), 판삼사사 서공(徐恭) 6대가 연이어 재상에 오르는 고려 최고의 문벌 귀족가문이 됐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좌복야 서효리(徐孝理), 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판도판서 서진(徐晉), 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 서릉(徐稜), 대광내의령 서린(徐鱗),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문하찬성사 서영(徐穎), 판내부사사 서진(徐璡), 평장사 서충(徐忠), 서윤(徐玧), 밀직사 서원(徐遠),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문하시중 서신(徐信), 병부령 서수(徐秀), 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호조전서 서의(徐議) 등 수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학자로는 서시랑도 서석(徐碩)과 박사 서선(徐禪)이 이름이 높고, 예빈시윤 서찬(徐瓚)의 둘째 아들인 서견(徐甄)은 안향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공양왕 초에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이외 고려의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등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개국원종공신에 오른 사재감 서인비(徐仁庇), 사재령 서원기(徐元奇)를 비롯하여 태종 때 익대좌명공신 예조판서 서유(徐愈)가 유명하다. 또 세종 때 우군도총제를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된 서선(徐選)과 연산군 때 대사간을 역임한 서지(徐祉), 대사성 서강(徐岡)도 뛰어났다. 서강은 세조 때 예문관 직제학으로 '잠서주해(蠶書註解)'와 '손자주해(孫子註解)'를 편찬하였고, 서지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이조판서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에는 함흥 전투에서 공을 세운 서경충(徐敬忠)이 있고, 호조참의 병참지원에 공을 세운 서사적(徐思迪)은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올랐다. 그리고 이순신과 함께 출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수군첨절제사를 지낸 서덕룡(徐德龍) 등도 유명하다.

그 외 서득천(徐得天)과 서사원(徐思遠) 부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외 의병장으로 서대근(徐大謹), 서진걸(徐晋傑), 서인손(徐仁孫) 등이 활약했다.

서일 초상. 북로군정서를 창설하여 총재가 된 서일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하지만 흑하시사변으로 수많은 젊은 독립군들이 죽음을 당하자, 그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하였다.

◆이천서씨 근현대 인물

이천서씨의 근현대인물로는 독립운동가로 간도에 명동중학교를 세운 서일이 유명하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중광단을 조직하였고 김좌진 등과 북로군정서를 설치하여 청산리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가 되기도 했으나 흑하사변에서 청년 다수가 희생되자, 이에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외 독립운동가로는 서봉화, 서기창, 서성모, 서병하, 서강조, 서달수 등이 있다.

현대인물로는 정관계에서 서민호(국회부의장)와 서영훈(대한적십자사 총재, 새천년민주당 대표)이 있으며, 서진수(한국은행 총재), 서영택(국세청장)도 이천서씨이다. 재계에서는 서성환(태평양그룹 총수), 서경배(아모레퍼시픽 회장), 서준산(서울식품 회장), 서준호(조해산업 회장), 서정구(대한이화학 사장)이 있고, 학계에서는 서성우(성균관대 총장), 서경보(동국대 총장), 서봉연(서울대 교수), 서준호(서강대 교수), 서남규(MIT대 교수), 서종범(경북대교육대학원장), 서우순(복천학원 설립자), 서성길(봉선학원 부천여상고교 설립자), 서덕구(고원진선중학교 설립자), 서기원(숭문중고교 설립자) 등이 있다. 또 체육 연예계에는 서향순(양궁국가대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서혜경(피아니스트)이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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