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의 방

조하나 2013. 12. 2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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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카드 뮤직 CF로 대중에게 익숙해진 포크록 밴드 스몰오의 오주환은 그림처럼 몽환적이고 서정적이다. 불안 속을 질주하는 마초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이스턴 사이드킥의 오주환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양극의 감성을 오가는 그의 방이 궁금해졌다.

스몰오와 이스턴 사이드킥 앨범을 나란히 들어보면 알 거다. 두 밴드의 보컬은 확연히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한 질감을 가졌다. 오주환이라는 한 인물로 표현된 두 객체이기 때문이다. 자아가 강하고 자존심도 강한 뮤지션이라면 세상과 어느 정도 벽을 두게 마련인데, 오주환은 그렇지도 않다. 억울한 처지에 놓인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집회를 찾아 힘을 보태기도 하고, 노숙자의 자립을 돕는 잡지 <빅이슈>를 꼬박꼬박 산다. 말로만 외치는 것보다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챙기는 남자다. 스몰오와 이스턴 사이드킥 사이의 이질적인 거리만큼이나 오주환의 방은 낭만적이고도 모순적이다. 그는 이곳에서 꿈을 꾼다. 어떤 이들에겐 그의 꿈이 한낱 몽상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이 꿈들을 조금씩 현실로 바꾸는 중이다.

공간과 사람 오랜 패션지 모델 경력과 범상치 않은 외모로 제 잘난 맛에 살 것 같은 오주환의 첫인상은 그의 공간을 들여다보는 순간 깨지고 말았다. 화려하고 억지스럽기보단 소박하고 따뜻한 소품들이 진짜 오주환을 말해준다. 공간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

1 직접 만든 양초스몰오가 추구하는 자연주의와 통기타와 포크, 이 모든 걸 관통하는 건 촛불이다. 촛불은 작고 약하지만 평화롭다. 늘 촛불을 켜놓고 작업하는데 어느 순간 이걸 내가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우리는 뭔가를 직접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요리하는 사람들은 알 거다. 직접 요리를 만드는 즐거움을. 가구를 만들고 농사를 짓는 일, 음악을 만드는 일도 이와 같다. 초를 직접 만든다는 건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다. 이 행위 자체가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어떤 재료를 쓸지, 어떤 색깔을 낼지를 일일이 골라 초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 불빛을 바라보고,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듣는 일련의 과정이 나에겐 큰 의미다. 음악을 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2 매주 토요일 밤의 카드 게임토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에 모여 카드 게임을 벌이는 고정 멤버들이 있다. 치밀한 심리전과 포커페이스가 중요한데, 나는 게임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다. 남을 잘 읽고, 내가 남에게 잘 읽히지 않아야 이기는 법이다. 나는 아직 멀었다. 계속해서 지기만 하던 사람이 마지막에 '올인'으로 승부를 엎을 수도 있는 게 바로 카드 게임이다. 1을 가지고도 8을 가진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거다. 묘하게도, 우리네 인생과 다르지 않다. 절제를 못하는 사람에겐 중독의 위험이 있을 테지만, 카드 게임은 잘만 배우면 삶에 도움이 된다. 인디 뮤지션으로서 음악을 하는 게 어쩌면 나에게 들어온 안 좋은 패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패를 탓하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내 손안에 모든 패를 한 번에 쥐는 건 게임에서나 인생에서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지금 다음 패를 기다리고, 배워가는 중이다. 고수가 되기 위해서.

3 스몰오의 앨범, <That Will Fall>음악 생활 초반엔 우울하고 처절한 포크 음악을 했었다. 밴드가 아닌 솔로 뮤지션이었다. 오랫동안 외롭게 음악을 했다. 무작정 미국으로 떠나 여행을 하고 그곳의 대자연을 경험하면서 스몰오 같은 밴드를 하자고 결심했다. 포크에 기반을 두되 좀 더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멤버들을 모아 스몰오를 만들었고, 음악을 제대로 시작한 지 4년이 지나 EP 앨범을 발매했다.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스몰오의 음악을 들으며 대자연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4 팬들이 준 선물 밴드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거미줄처럼 관계를 만들게 된 데 만족하고 감사한다. 외롭고 힘들다고 해서 음악을 포기했다면 지금은 결코 없었을 거다. 밴드를 하면 여러 사람들과 부딪치며 배려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인간적으로 품이 넓어지는 것 같다. 스스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를 뮤지션이라 일컫는 게 중요하다. 내 음악과 앨범에 스스로 만족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주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다. 무엇보다 불행한 건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음악을 다른 이들이 좋다고 하는 거다. 열악한 상황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음악을 하고 싶다.

5 벽을 가득 채운 책들 '진한' 책을 좋아한다. 깊이 있고 밀도 있는 책. 무엇보다 공감할 수 있는 정도와 깊이를 본다. 어릴 때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으면서 감정을 이입했다. 책을 고를 땐 주로 작가를 따라가며 꼬리를 물듯 이어가는 편이다.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작가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박민규. 독특한 그의 문체 이면엔 슬픔의 정서도 깔려 있다. 그의 작품은 내 삶의 가치관을 바꿨다. 내가 이렇게 홍대에서 음악을 하며 사는 것도 괜찮은 거고, 회사를 다니다 그만둬도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지 않아도 잘못된 것이 아님을, 모든 게 다 괜찮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책은 나에게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을 선사한다. 책장을 덮고 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이 좀 다르게 보인다.

6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상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기타 레슨을 통해 만난 친구 '옥군'이 직접 그려 선물해준 작품이다. 노무현은 '안 좋은 패를 들고도 잘 싸운 사람'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가진 게 많지 않았다. 강한 패를 들고 있으면 누구나 이길 수 있다. 중요한 건 약한 패를 들고도 잘 싸우는 거다. 노무현은 정치라는 것이 하나 내어줘야 하나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실행에 옮겼다. 진정한 승부사다. 얼마 전 대선이 끝나고 더 자주 이 그림을 눈에 담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이 그림을 걸어둔 이유는 바로 '잊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잊는다. 나라도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크다.

7 영화 <가족의 나라> 포스터 지난 3월 7일 개봉한 영화 <가족의 나라> 영상이 스몰오 앨범 수록곡 중 하나인 '순환선의 풍경' 뮤직비디오로 쓰였다.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접하고 나서 사실 음악보다 영화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먹먹했다. 가족과 나라, 자유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될 때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긴다.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에게 가족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달라지지 않는 절대적인 관계다. 피를 나눈 부모님과 형제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이 집에서 함께 살아온 친구들도 나에겐 가족이자 식구다.

8 마틴 00028+ EC 2009년,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을 때 이 기타가 과연 나에게 맞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과감하게 나 자신에게 투자하기로 결심하고 산 첫 번째 기타다. 아담한 사이즈에 색깔도 좋다. 좋은 악기를 쓴다고 좋은 음악이 나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좋은 기타는 자주 만지게 된다. 아낄수록 소리가 좋아진다. 스몰오의 모든 곡들을 이 기타로 썼다. 공연이나 녹음은 물론이다. 내가 볼 때 이 기타가 지금 나보다 낫다. 그건 앞으로도 안 바뀔 거다. 내 평생을 함께할 기타로 점찍어뒀다.

9 직접 쓴 곡들의 악보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존 관념과 충돌하는 이미지를 음악으로 만들어내고 싶다. 앨범에 등장하는 '까마귀'나 '코끼리' '당나귀' 등은 단순히 하나의 의미만을 내포하지 않는다. 모든 트랙들엔 교차하는 이미지나 이야기들이 있다. 알베르 세라의 <기사에게 경배를>과 김연수의 <굳빠이 이상>이 섞여 있는 거다. 타이틀곡 'That Will Fall'도 그렇다. 리비아의 카다피와 이집트 무바라크 사태를 보면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얻은 영감을 더해 만들었다. 가사는 자칫하면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질 수 있기에 최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상징성을 부여하려 한다. 직설적이고 쉬운 가사에 사람들이 더 반응한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세상에 나 같은 사람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말하는 것들을 사람들이 정확하게 이해하는 대신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여 저마다 해석이 가능했으면 한다.

PHOTOGRAPHY 이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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