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sign)은 서양서 유래했다? 조선시대부터 썼죠

김윤덕 기자 2013. 12. 3.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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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편지' 연구하는 김효경 중앙도서관 고서전문원

조선시대에도 '사인(sign)'이 있었단다. '시전지(詩箋紙)'라고 해서 대나무나 꽃문양을 새긴 편지지는 연애편지 쓸 때 곧잘 활용됐다. 편지지를 아낄 요량으로 '돌려쓰기'라는 것도 유행했다. 하나같이 시계방향으로 여백을 채워 나갔는데, 그 이유가 지금까지 '미스터리'란다.

지난 29일 오후 서울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 추운 날씨에도 '이야기로 풀어가는 고문헌강좌' 교실이 빼곡히 들어찼다. 나이 든 어르신부터 대학생들까지 연령도 다양하다. 청중은 30대 여성 강사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여간해서는 듣기 어려운 강좌이기 때문이다. '간찰(簡札), 선인들의 삶이 담긴 편지'가 주제. 조선시대 편지(간찰)만 집중 연구해온 김효경(39)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전문원이 그 주인공이다.

경북대에서 한문학을 공부한 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문헌관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김효경씨는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조선시대 간찰을 연구해온 학자. 대부분 초서로 쓰여져 해독이 어려운 한문편지들이라 젊은 연구진이 많지 않은 학계에서 그녀는 보배 같은 존재다.

김씨에 따르면, "명문 집안들이 보유하고 있는 문서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간찰, 즉 편지"라면서 "선비의 일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일상이라고 '최근(最近)'이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간찰 한 통 쓰기가 선비들에게조차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편지 잘 쓰는 재주를 '기예'로 여겼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사자소학, 동몽선습, 소학, 사서삼경을 배운 양반들이 편지 한 통 쓰는 걸 왜 그리 어려워했을까, 저도 그게 무척 궁금했어요. 연구해보니 그 이유 알겠더라고요. 편지를 받는 사람의 관직, 나이, 친분 관계, 유배 여부에 따라 구별해서 써야 하는 용어가 너무 많은 겁니다. 위계와 예의를 엄격하게 갖춰야 하니 어릴 때부터 익혀서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지요." 편지봉투(피봉) 쓰는 법부터 절기에 따른 인사, 안부, 마무리 인사말까지 다양한 용례를 제시한 '간독정요', '한훤차록' 같은 매뉴얼은 그래서 인기가 많았다.

사인(sign)이 서양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착명(着名)이라고 해서, 자신의 이름자를 응용해 붓으로 모양을 냈어요. 본획을 생략하거나 변화시키는 거죠. 퇴계 이황, 김성일, 김종직 등 당대 학자들의 사인은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만큼 유명했습니다."

청중이 가장 호기심을 보인 대목은 '돌려쓰기'였다. "편지지를 아낄 요량이면 첫줄부터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어나가면 되는데, 여백을 많이 두고 글을 쓰기 시작해 꼭 시계방향으로 돌려가면서 미로처럼 글을 써간단 말이죠. 관직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정말 미스터리지요(웃음)."

한문학자인 김씨가 고문서 중 편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결혼한 직후였다. "시댁이 순흥 안씨 집안인데 며느리 전공이 한문이라 하니 시아버님께서 옛날 문서들을 다 꺼내오셔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특히 편지는 초서, 행서로 쓰인 게 많아 해독하기 어려운데 그러다 보니 더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요. 명망 있는 학자일수록 초서로 편지를 쓰거나 문집의 발문을 쓴 분이 많으니 당대 사회문화를 연구하는 데도 유리했고요."

매일 3통씩 선조들의 편지를 읽는다는 김효경씨는, 선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요즘 세태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했다. "정조 때 재상을 지낸 채제공이 목천에 있는 수령에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봉투를 보면 받는 이가 일개 고을 수령이라도 그의 이름을 위로 높이 올려서 쓰고, 우의정인 자신의 이름은 중간 아래부터 쓰고 있지요. 상대를 최대한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양입니다. 또, 조선시대 간찰의 내용들을 살펴봐도 상대에 대한 안부는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길고 긴 데 반해, 자신이 어찌 지낸다는 말은 단 몇자로 짧게 맺습니다. 절친한 친구에게도 예를 다해 편지를 썼으니, 요즘처럼 가볍게 문자로 주고받는 세태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지요."

고향이 경북 안동이라 김씨는 종종 대학친구들의 놀림을 샀다고 했다. "입학했는데, '너는 왜 한복을 안 입고 다니니?' 하며 묻는 거예요(웃음). 서울서 박사 학위 할 때에도 저만 지방 출신이라 눈에 띄었고요. 어릴 때부터 집안(의성 김씨) 문중 행사를 보고 자라 한자문화에 익숙했던 것이 오늘 저의 운명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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