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피스&그린보트]환경·평화·연대 '선상 교류의 장'

2013. 11. 6. 10:3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ㆍ피스 앤 그린보트의 9박 10일, 곶자왈 작은학교 아이들 활동 눈길

10월 19일 부산항을 떠난 피스 앤 그린보트의 첫 기항지는 대만 지룽항이었다. 10월 21일 지룽항에 도착한 후 1000여명의 탑승객은 피스 앤 그린보트 측이 마련한 7개 프로그램에 나눠서 참가했다.

이 중 하나인 C코스 'No Nuke Taiwan! 원전 없는 아시아를 위하여'는 대만 룽먼 원전 건설 반대를 위한 프로그램이다. C코스 버스에 9명의 중학생이 함께 올랐다. 몇몇 어른들이 '아이들이 이 프로그램을 이해할까'라는 걱정을 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아이들은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C코스에 참여한 피스 앤 그린보트 탑승객과 룽먼 원전 건설지역 주민과의 저녁식사 시간. 탑승객과 지역주민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오고가던 중 9명의 아이들이 식당 한가운데로 나갔다. "지역주민을 위로하고 싶다"면서 주머니에서 오카리나를 꺼내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자체적으로 꾸민 공연이었다.

피스 앤 그린보트에서 탑승객에게 공연을 선보이고 있는 곶자왈 작은학교 아이들.

가이드도 몰랐고, 탑승객도 몰랐다. 룽먼 원전 건설지역 주민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앙코르를 외쳤다. 그렇게 공연이 끝난 줄 알았는데, 한 아이가 흰 봉투를 꺼냈다. 아이들이 그 지역주민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았다는 것이다. 흰 봉투를 받은 대만 환경보호연맹 리슈용 사무국장은 말없이 아이들을 껴안았다.

10월 23일 새벽, 일본에 몰아친 태풍으로 피스 앤 그린보트는 두 번째 기항지였던 일본 오키나와항에 입항하지 못했다. 선장은 배를 돌려 중국 상하이로 향했다. 태풍으로 인해 배의 출렁거림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탑승객이 배멀미 때문에 객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배멀미가 심한 이들은 배 안 의무실에서 링거를 맞아야만 했다. 탑승객들은 저마다 배멀미를 없애기 위해 침을 맞거나 약을 먹었다. 태풍의 위력으로 갑판은 출입금지됐다. 배의 분위기는 조용하기만 했다.

원전 지역 주민 위로공연과 성금

계속되는 항해에 지루한 탑승객을 위해 강연, 공연, 자주기획 프로그램(탑승객이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하는 것을 자주기획이라고 부름)이 배 안 곳곳에서 열렸다. 이 프로그램 중 하나가 위안부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한·일 탑승객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10월 22일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로서 겪어야만 했던 치욕을 한·일 탑승객 앞에서 증언했다. 10월 24일 두 번째 열린 프로그램은 한·일 탑승객의 대화의 시간이었다.

곶자왈 작은학교 아이가 이용수 할머니에게 쓴 편지.

그런데 분위기가 22일과 달랐다. 일본인 탑승객 중 일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위안부 할머니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했나" "22일 이야기와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진전된 이야기가 없어서 아쉬웠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위안부 문제를 잘 알고 있는 일본인이 답변을 해줬지만, 간담회 분위기가 프로그램 의도와 달리 어색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때 한 아이의 질문이 터져나왔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이용수 할머니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정부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게 아쉽고 부끄럽다"고 했다. 22일 이용수 할머니의 강연을 들었던 아이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써왔다.

"제가 지금 15살인데 제 또래일 때 그런 고된 일을 당하셨어요. 어린 나이에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힘드셨죠"로 시작되는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편지 내용을 듣던 이용수 할머니가 눈물을 보였고, 통역을 해주던 통역사도 목이 메었다. 편지 내용을 듣던 한·일 탑승객들도 곳곳에서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아이의 편지를 두 손에 받고, 아이를 껴안았다.

배 생활이 지루한 승객을 위해 마련된 탁구대회.

피스 앤 그린보트에는 수많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탑승했다. "드라마를 통해 한국어를 배웠어요. 한국 사람과 만나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어서 이 배에 탔습니다"(일본 미에현에서 온 모리구치 가즈코), "일본에서 반한 시위가 많이 열립니다.

한국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죠. 우리(일본)가 피해자라는 인식이 큰데, 가까운 한국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습니다"(다케모토 유이치), "초등학교 6학년 사춘기 아들과 함께 대화를 하고 싶어서 이 배에 탔어요. 친구들이 놀린다고 애가 내 손을 안 잡았는데,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주니까 좋네요"(한국도로공사 교통연구실 남궁성 실장) 등 이 배에는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넘쳤다.

한국과 일본의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민 한·일 우정 페스티벌.

이 중에서도 제주도 틈새학교인 곶자왈 작은학교(cafe.naver.com/gotjawal)에서 온 19명의 초·중학교 아이들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이용수 할머니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대만 룽먼 원전 건설지역 주민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민 것도 이 아이들이었다.

아이들 퍼포먼스에 일본인들 박수

날씨가 좋을 때면 매일 아침 갑판에서 오카리나 연주를 하고, 배 곳곳에서 실뜨기 공연이나 컵 공연 등을 펼쳤다. 일본인 탑승객들은 곶자왈 작은학교 아이들의 퍼포먼스에 박수를 보냈고, 말을 걸어왔다. 피스 앤 그린보트의 키워드인 '교류'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한 셈이다.

대만 지룽, 중국 상하이, 일본 후쿠오카 기항지에서 열리는 환경과 평화의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메시지를 남긴 것도 이 아이들의 몫이었다. 어른들을 미소짓게 하고, 때로는 부끄럽게 했던 곶자왈 작은학교 아이들은 9박10일 동안 피스 앤 그린보트를 진한 감동과 웃음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곶자왈 작은학교는 정식 학교가 아니다. 제주도 출신의 노동운동가 문용포씨가 어린이·청소년 교육에 대한 꿈을 펼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세운 작은 학교다. 운동장도 없는 3칸짜리 집이 곶자왈 작은학교다.

일본 탑승객들이 적극적으로 이용한 자주기획 신청 패널.

아이들은 이곳에서 영어·수학이 아닌 자연과 평화, 연대, 환경을 함께 고민하는 프로그램을 공유한다. 교사는 자원봉사자들이 대신해주고, 기업의 후원 없이 개인 후원으로만 운영된다. 문용포 대표교사는 "아이들이 오고 싶어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기업의 후원을 받아서 규모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설명했다.

2007년부터 '아시아 미래세대 어깨동무 프로젝트'를 실시해 분쟁지역에 어린이도서관을 만드는 기금을 마련하는 행사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아이들이 분쟁지역에 보낸 기금이 2000만원이 넘는다.

10월 19일 갑판에서 열렸던 피스 앤 그린보트 출항식.

2010년부터는 '아시아 미래세대와 함께 떠나는 평화여행'을 진행하면서 필리핀, 오키나와 등을 직접 방문해 지역주민과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이외에도 유튜브나 SNS를 통해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곶자왈 작은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눈은 제주도가 아닌 세계를 보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홍인여중에 다니는 김승리양은 매월 한 번씩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다. 곶자왈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승리양은 "곶자왈 작은학교는 마치 휴양림 같아요. 여기에 가면 아이들이랑 축구나 발야구를 하는데, 양보와 배려를 배우게 됩니다. 여기에 다니면서 NGO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어요"라고 자랑했다.

올해 30주년을 맞이한 피스보트(대표 요시오카 다츠야)는 매년 환경재단과 연대해 피스 앤 그린보트를 바다에 띄우고 있다. 올해 9박10일 동안 대만, 일본, 중국을 돈 피스 앤 그린보트의 규모는 3만5000t급으로 정원이 1400여명이다. 3층부터 11층까지 진료실, 풀장, 세미나룸, 레스토랑, 헬스장, 매점, 카페 등 필요한 편의시설이 대부분 갖춰져 있다.

식사는 4층 메인 레스토랑과 9층 뷔페 레스토랑을 이용하면 된다. 피스 앤 그린보트 주제가도 있다. 아시안비트라는 한·일 젊은이들의 모임에서 가수 이한철의 '슈퍼스타'를 개사해서 만든 '그린스타'라는 곡이 지난해부터 피스 앤 그린보트의 정식 주제가처럼 불리고 있다.

배에서 바라본 중국 상하이의 야경.

피스 앤 그린보트를 단지 크루즈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피스보트와 환경재단 측이 마련한 환경·평화·연대에 대한 각종 강연과 공연, 탑승객이 직접 마련한 자주기획까지 합하면 하루에 대략 30~40개의 프로그램이 배 안 곳곳에서 진행된다.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는 시각은 보통 밤 10시 정도. 9박10일 동안 책 한 권 읽기 힘들 정도로 배 안에서의 생활은 바쁘게 돌아간다.

피스 앤 그린보트는 유명인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올해도 다양한 학계·문화계 인사들이 피스 앤 그린보트에 탑승해 시민들과 함께 보냈다.

김정욱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한정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객원교수, 시인 김소연, 가수 이한철, 가수 서문탁, 가수 최고은, 소설가 서해성, 영화평론가 오동진, 여행작가 유성용, 패션디자이너 이효재, 버블아티스트 신용 등이 탑승했다.

일본측에서는 번역가 이케다 카요코, 케이센여자원예대학 이영채 교수, 민담가 고콩테이키 구치요, 영화감독 모리 다츠야, 가수 마츠다 미호, 우에하라 히로코 전 구니타치 시장 등이 배에 탑승해 다양한 강연과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 글·사진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

-ⓒ 주간경향 & 경향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