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의 풋볼스키] [영상] 히틀러를 'KO'시킨 세브첸코의 선조들

김성민 2013. 10. 4.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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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미녀', '보드카'. 이들은 러시아를 수식하는 대표 키워드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이 '러시아 축구'다. 최근 유수의 해외 축구 언론을 통해 러시아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출몰하지만 우리는 정작 러시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스포탈코리아'가 준비했다. 매주 금요일 '풋볼스키'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의 최신 이슈와 소식을 독자에게 전한다.

22,402,200 km²에 육박하는 땅덩어리. 15개의 국가의 공동체.

1922년부터 1991년까지 유라시아 북부에 위치, 세계정세의 중심에 있었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СССР)의 얘기다.

СССР의 영향력은 축구판에서도 이어졌다. 유럽축구선수권 대회에서 1차례의 우승(1960년), 3차례의 준우승(1964년, 1972년,1988년)등의 성과를 올리며 유럽축구판에서의 한 축을 담당했던 СССР는 체재가 붕괴가 된 1992년에도 독립국가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출전, 막강한 공동체의 힘을 선보였다.

생뚱맞을 수 있지만 갑작스레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드는 이유는 지속성에 있다. СССР의 붕괴 후 따로 나뉘게 된 15개의 국가들이 유럽 축구판 혹은 아시아 축구판에서 다크호스 이상의 활약을 보이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아직도 СССР의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클럽 명칭의 동의성이다. 그 예로 '디나모'라는 명칭을 들 수 있겠다. 아마 자신을 열렬한 축구팬이라고 자부하고 있다면 동구권과 러시아 축구 클럽에서 자주 쓰이는 '디나모'라는 명칭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 최고의 명문 클럽 디나모 모스크바, 우크라이나의 디나모 키예프, 벨라루스에 디나모 민스크 등이 클럽들을 말이다.

물론 СССР 소속이 아닌 루마니아, 크로아티아와 같은 국가에서도 디나모 부쿠레슈티, 디나모 자그레브라는 공동의 명칭을 사용한다. 하지만 해당 국가들도 당시 СССР의 영향권에 있었고 같은 키릴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동유럽 국가권이 디나모라는 축구 클럽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СССР권의 잔재라고 볼 수 있다. (기자의 칼럼 제목 어미에 해당하는 풋볼스키의 스키(ский)도 러시아 및 몇몇 동유럽 국가에서 사용하는 키릴 문자의 어미다.)

디나모의 뜻은 'Dynamic'을 뜻하는 의미로 강하고 절도 있음을 표현하는 수식어다. 그러나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디나모라고 하는 축구클럽 역사의 태동성에 비추어 KGB 소속의 클럽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KGB는 CCCP의 대표적 비밀경찰 기관으로 냉전 시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보기관으로 불렸다.)

그렇다면 축구클럽과 정보기관이 무슨 연유에서 엮이게 된 것일까? 디나모와 KGB의 숨겨진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23년. KGB의 수장이었던 라브레찐 베리야는 공동체 의식의 강화를 위해 디나모 모스크바라는 축구 클럽을 창설했다. 당시 클럽 탄생의 배경에는 CCCP의 통수권자였던 스탈린의 영향도 컸었는데 지속적인 정치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휘하아래 놓일 수 있는 '디나모'라는 클럽을 창설하라 명했다.

스탈린이 직접 개입하다 보니 디나모 모스크바는 매 경기 승리 해야만 했다. 승리가 아닌 패배는 스탈린의 위상에 먹칠을 하는 격이 됐다. 창설 첫 해 디나모 모스크바가 소화한 경기는 총 48경기였는데, 당시 기록한 결과는 48승. 단 1패도 없었다.

짐작이 가겠지만 이는 스탈린과 KGB의 수장인 베리야의 작품이었다. 그들은 지지 않는 경기를 위해 이길 수 있는 경기만을 성사시켰으며 타 유럽과의 친선경기를 조작하기도 했다. 즉 스탈린과 KGB는 디나모 모스크바를 정치적 선동의 도구로 철저히 이용한 것이다.

시작은 청렴하지 못했지만, 효과는 꽤 컸다. 디나모 모스크바의 이름이 알려지자 당시 CCCP권의 나라들도 디나모라는 명칭을 그래도 이어받으며 축구 클럽을 만들었고, 그 영향은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벨라루스의 민스크,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까지 퍼졌다

특히 1927년에 창설된 우크라이나의 디나모 키예프가 큰 인기를 끌었다. 디나모 키예프는 한국 축구팬들에게는 안드레이 세브첸코의 친정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디나모 키예프의 명성은 쉐브첸코의 선배들 즉 선조들에 의해 태동됐다. 당시 키예프 지방 민족들이 축구광이었던 것도 이유지만, 히틀러와의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완승을 거두며 CCCP의 위상을 높였기 때문이다.

때는 1942년. 디나모 키예프가 펼친 한 경기는 아직도 축구가 전쟁에 이용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바로 디나모 키예프의 '죽음의 경기'(Dynamo Kiev's Death Match) 라는 경기인데, 디나모 키예프 팬들의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축으로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디나모 키예프는 CCCP에서도 정상급의 인기를 자랑했다. 하지만 1941년 독일과의 2차 세계대전 전쟁이 한참일 때 대부분의 선수들은 리그를 포기하고 유니폼 대신 다시 군복을 입고 독일에 대항했다. KGB에서 떨어진 명령이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전세는 뒤집을 수 없었다. 당시 전투에 나갔던 전쟁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고 디나모 키예프의 선수들 역시 포로수용소에서 오랜 세월을 허투루 보내야 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 디나모 키예프의 선수들은 운 좋게도 포로수용소로부터 풀려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은 축구판으로의 복귀였다. 당시 디나모 키예프의 정신적 지주이자 골키퍼였던 미꼴라 트루세비치는 키예프에 돌아오자마자 당시 자신들의 동료들을 애타게 찾아 돌아다녔다. 목적은 단 하나. 디나모 키예프를 다시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간절한 트루세비치의 소원은 이뤄졌다. 그들은 FC 스타트라는 이름으로 팀을 임시 창단한다. 당시 디나모 키예프라는 이름을 쓰기 원했지만, 이미 독일군에게 디나모라는 이름은 KGB의 산물로 남아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실전 감각이 떨어진 선수들이지만 그들에게는 다시 클럽을 일으켜야 된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경기에 투영됐다. FC 스타트는 거의 전 경기에서 승리를 거둘 정도로 뛰어난 정신력과 공격력을 갖춘 모습을 보여주며, 동유럽의 최강 클럽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디나모 키예프의 부활을 탐탁지 않게 여긴 이가 있었다. 바로 히틀러다. 아무래도 CCCP의 군인 출신으로 구성된 축구 클럽이 주목 받는 것이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지역에 나치즘을 견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팀을 경찰 특수대로 구성하여 디나모 키예프와 친선경기를 갖기로 맘먹는다.

특히 당시 히틀러는 현 독일 분데스리가의 명문 클럽 '샬케 04'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디나모 키예프와 같은 군 클럽은 같은 방식으로 이겨야 한다는 명분아래, 기존에 없던 특수 군대 팀을 구성했다. 축구도 일종의 군사력의 일환으로 보는 히틀러다운 접근이었다.

히틀러의 목적은 분명했다. 과정이 어찌됐든 승리로써 디나모 키예프의 콧대를 누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 히틀러는 디나모 키예프와의 경기 전 디나모 키예프의 수하들을 라커룸으로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너희들이 이기면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히틀러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디나모 키예프 선수들은 경기에 나서기까지 결연한 눈빛,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경기에 대한 강한 의지와 목표의식을 다잡았다.

히틀러의 존재로 독일이 쉽게 우세를 가져갈 것 같던 경기는 주장 골키퍼 트루세비치가 반기를 들며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맞는다. 그는 짜고 치는 고스톱판에서 일방적인 슈팅세례를 모두 막아내며 전반전을 2-1 리드로 마치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그리고 트루세비치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디나모 키예프의 선수들은 그라운드를 지배했다. 디나모 키예프는 공격수 이반 쿠즈멘코의 장거리 프리킥을 비롯해 세 골을 몰아치며 독일팀을 옥죄었다.

결국 경기는 5:3이라는 스코어로 키예프 선수들의 승리로 끝났다. 선수들은 기뻐했고, 그라운드에 누워, 조국을 위해 굴복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켰다는 것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기쁨의 시간은 짧았다. 히틀러는 경기 종료 후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디나모 키예프 선수들에게 '스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덮어씌우며 전선에 있는 노동 수용소로 끌고 가 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차례대로 디나모 키예프의 선수들을 총살 시켰다.

비극이었지만, 저주 받은 땅 키예프에서 열린 '죽음의 매치'는 구소련 국민들의 용기를 복 돋아 주기 충분했다. 라디오를 통해 중계된 '죽음의 매치'는 구소련 국민, 더 나아가 전장에 있는 군인들까지도 잠시 잊고 있었던 축구의 진정성, 삶의 의미를 찾게 만들었다.

'죽음의 매치'가 있던지 70년이 지났다. 그리고 히틀러가 우위를 점하길 원했던 독일 축구는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독일 축구는 쉼 없이 변하는 파도에서 흐름을 탔을 뿐이다. 언젠가는 '디나모'라는 이름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 CCCP의 후예들. 또 다른 세브첸코들이 나타나 축구판을 뒤흔들지는 모를 일이다.

글=김성민 기자

사진=우뜨라 라시이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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