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정도 한도 그렇게 삭다 보면 고소해지것지요"

2013. 9. 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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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난 집 맛난 얘기] 홍어랑 탁주

호남 서남해안 사람들에게 홍어는 소울푸드다. 홍어가 없는 호남의 잔칫상은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호남 외식문화에서 홍어는 넓고 깊숙한 자리를 차지한다. 80년대 말, 필자는 회사 입사동기의 혼인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나주에 내려간 적이 있다. 전날 동기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동기의 어머님께서 '멀리서 와줘 고맙다'며 뭔가를 집어 드시더니 내 입에 넣어주셨다.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잃고 사 남매를 혼자 키우셨다. 드디어 큰 아들을 장가보내는 전날 밤이었으니 약간 흥분하신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머님은 초라한 집을 찾아준 손님들에게 그렇게 기쁨과 반가움을 표하셨다. 얼떨결에 받아먹은 음식은 삭힌 홍어였다. 나로선 첫경험이었다. 홍어를 삼켜야 할지 뱉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마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숯덩이를 입에 문 느낌이었다.

짜릿했던 첫 경험 일깨워준 '한씨 아줌마' 홍어

하지만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온 몸을 전율케 하는 미감은 나를 사로잡았다. 장만해둔 홍어는 충분했다. 나는 상 위의 홍어를 맘껏 먹어 치웠다. 양념하지 않은 것, 초고추장만 묻힌 것, 갖은 양념을 한 것, 아주 다양했다. 입과 코와 눈이 무척 고생했지만 나는 그날 배가 터지도록 홍어를 먹었다.

동기 어머님께서는 흡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여벌로 내 앞에 양념하지 않은 홍어를 한 사발 더 갖다 놓으셨다. 그날 이후 나주 동기네 집 홍어 맛과 같은 홍어를 만나지 못했다. 가끔 그때의 홍어 맛을 떠올리며 몇 번 먹어봤지만 그런 맛은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맛본 <홍어랑 탁주>는 그때의 맛에 100%는 아니지만 가장 근접한 맛이었다. 그건 어쩌면 주인장의 모습에서 친구 어머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홍어랑 탁주>는 강동구청 근처 구석진 곳에 있는 아주 작은 홍어 집이다. 4개의 테이블에 작은 다락방이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의 전부다. 하루의 대부분은 주인장 한경순(58) 씨가 혼자 점포를 지킨다. 음식을 만들어서 나르고 계산까지 하려면 종종걸음을 쳐야 하지만 몸에 익어 익숙하다. 저녁 시간이 되어야 직장에서 퇴근한 부군이 일을 돕는다.

단골들이 '한씨 아줌마'로 부르는 주인장 한경순(58) 씨는 잘 삭은 홍어처럼 부드럽고 여리다. 혹 가다가 손님 중에 신세타령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아마 홍어 집이어서 그럴 지도 모른다. 탁주 한 사발 털어 넣고 홍어를 우물거리고 나서 가슴 속에 맺힌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딱히 누구 들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듣는 이 없지만 주인장 한씨는 음식을 내오면서, 주방에서 일하다가도 그런 소리를 귀담아 듣는다. 꼭 엿들으려고 마음 먹은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그리 된다. 그리곤 이내 그 선한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아마 그런 것도 홍어 장사의 숙명이리라.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고 공감하는 것. 이 집에선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함께 삭아간다. 한 그릇에 담긴 홍어처럼.

어쩌면 그래서 일지도 모른다. 이 집의 홍어 값은 그 양에 비해 비교적 저렴하다. 홍어회는 한 접시(28~30점)에 국내산이 6만원, 수입산이 3만원이다. 홍어에 삼겹살과 묵은지가 나오는 삼합은 국내산이 8만원, 칠레산이 4만원이다.

저렴해도 제 맛 내는 세 친구들, 삼합

국내산 홍어회는 가끔 떨어질 때가 있다. 물건이 없어서이거나, 있긴 하지만 덜 삭았을 때는 손님이 아무리 달라고 해도 내놓지 않는다. 그러나 칠레 수입산 홍어는 언제든지 가능하다. 냉동 상태로 들여오기 때문이다. 국내산에야 미치지 못하지만 갈무리하기에 따라 수입산도 홍어 본래 맛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수입산 홍어는 삭히는 과정에서 물기를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처음 홍어 장사를 시작했을 때 한씨도 물기 제거와 삭히는 기술이 부족해 많은 홍어를 버렸다. 수분을 제거하면서 더하거나 덜하지 않은 알맞은 정도로 삭히는 게 관건이다. 처음 홍어 장사 시작하던 해부터 2년 정도 버린 홍어가 못해도 3백만 원어치는 족히 될 거라고 한다. 덜 삭히면 톡 쏘는 냄새가 손님의 요구수준에 못 미치고 너무 삭히면 썩어버렸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최적의 맛을 찾아냈다.

칠레산 삼합(4만원)을 내왔다. 홍어는 몸에 상처가 없고 몸 전체가 붉은 빛을 띠는 것이 상품이다. 비록 칠레산이지만 제법 윤기가 있고 색깔도 예상보다 훨씬 붉은 빛이 돌았다. 무엇보다도 톡 쏘는 맛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홍어 한 점을 입에 넣는 순간 예전 나주의 동기생 집 저녁 식탁과 정경이 퍼뜩 떠올랐다. 이 톡 쏘는 맛과 냄새는 홍어의 '트리메틸아민옥시사이드'라는 성분이 암모니아와 트리메틸아민으로 분해되면서 발생한다.

홍어와 함께 삼합의 또 다른 짝패인 돼지고기는 칠레산 삼겹살이다. 지방의 양이 적당하고 육질이 부드러워 삼겹살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제대로 삶아 잡내가 없고 고소하다. 삼합의 완성은 역시 묵은지. 2년 정도 숙성시킨 묵은지는 짜지 않고 담백하다. 물론 한씨가 직접 담근 김치다.

묵은지를 깔고 삼겹살 놓고 적당히 삭힌 홍어를 초장에 찍어서 올렸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막걸리, 일명 탁주다. 우선 먼저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삼합을 입에 넣으면 남도의 육자배기 가락이 들려온다.

삼합을 먹는 방법은 이것만이 아니다. 한씨가 직접 담근 갓김치와 파김치가 수준급이다. 적당히 익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매콤한 듯하면서 감칠맛이 돈다. 여기에 홍어를 싸서 먹으면 '성화가 났네. 헤에'하는 흥타령 소리가 들려온다. 삭힌 홍어는 더운 성질이다. 찬 성질의 김치와 돼지고기와는 천생연분 찰떡궁합이다.

홍어 내장으로 끓인 또 다른 홍어의 짜릿한 맛, 보리애국

남도 지방에서는 홍어회를 뜨고 남은 부위로 홍어탕을 끓여먹는다. 홍어의 간과 내장이 들어가기 때문에 '홍어앳국'이라고도 한다. 이 집에서는 보리애국(1만원, 점심식사는 7000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봄에 새로 싹이 돋은 보리를 넣고 끓여 그런 이름을 지었다. 보리 싹을 넣으면 국물 맛이 시원하다. 하지만 요즘에는 보리싹이 나오지 않아 미나리로 대신한다.

탕이라고 해서 톡 쏘는 홍어 특유의 맛과 냄새에서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삭힌 홍어 몸보다 강도가 더 세다. 그래서 탕은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 겨우 홍어를 배운 사람은 좀 더 내공을 쌓고 먹어야 한다. 그러나 홍어 삼매경에 빠진 사람은 이 홍어탕으로 마무리하면 아주 좋다. 개운하고 깊은 홍어 맛을 느낄 수 있는데다 애라고 불리는 홍어 간의 맛이 무척 고소하다. 상어처럼 홍어도 깊은 바다에서 살기 때문에 스쿠알렌 등 여러 가지 좋은 성분이 들어있다. 식사용 메뉴인 매생이굴탕(7000원)도 제철이 아닌데 시원하고 매생이 향도 괜찮다.

홍어는 크기에 따라 가장 큰 특대(9~10kg)와 1~6번 치로 분류한다. 주인장 한씨의 경험에 의하면 홍어는 큰 것이 맛도 좋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은 가장 큰 1번치(8~9kg) 이상 큰 홍어만 쓴다. 큰 홍어를 정성 들여 삭혀 제 맛을 내는 작업, 한씨 아줌마에겐 이제 익숙한 일이다. 몇 번 홍어 장사를 접을까도 생각했지만 잊지 않고 찾아오는 단골들 때문에 그것도 어려웠다. 쉽게 친할 수 없지만 한 번 친해지면 쉽게 끊을 수 없는 맛이 홍어 맛이자 사람과의 관계임을 그녀는 잘 안다.

"사람의 정도 한도 그렇게 삭다 보면 어느 순간 고소해지것지요! 기다리면 그런 날이 오것지요!"

<홍어랑 탁주> 서울시 강동구 성내1동 55-15 전화: 02-477-7177기고= 글, 사진 이정훈※ 외부필자의 원고는 chosun.com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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