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사람]순백한 밥상, 초당 순두부

2013. 8. 27.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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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게 내려앉은 모양새와 새하얀 빛깔은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이루어낸

어머니들의 퇴적된 삶처럼 소박하게 담겨져 있다.

아직 햇귀가 차오르기도 전, 솔숲 사이로 들어앉은 집들이 하나둘씩 불을 켠다. 새벽의 고요함을 깨우는 것은 수십년 동안 전통을 이어온 고집 센 두부쟁이의 부지런함이다. 서서히 날이 새면서 경포의 바다 내음, 여름 솔숲의 향기, 두부쟁이의 숨결이 어우러진다. 초당마을의 새벽 풍경은 일상의 삶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강원도 강릉 경포대 해변에서 남쪽 방향으로 1㎞쯤 내려가다 보면 키가 큰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초당마을이 나타난다. 이곳이 순두부마을이다. 마을 들머리부터 약 20여개의 순두부 전문점이 늘어서 있는데, 전국의 많은 식객들이 이곳의 순두부 맛을 잊지 못하고 찾아드는 곳이다.

순두부는 순과 백의 일치된 합일이다.

"우리 마을은 오랜 전통을 이어온 순두부 골목입니다. 마을 이름인 '초당'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아버지 허엽 선생의 호입니다. 16세기 당시 당파싸움에 밀려 강릉에 정착한 초당 선생은 집 앞 샘물로 콩을 불리고, 경포대 앞 바닷물로 간을 맞춰 두부를 만들었다고 짐작합니다. 당시에는 소금이 귀해 바닷물로 간수를 쓴 것인데, 경포대 바닷물이 두부 만들기에 최적이었던 거죠. 일반적인 천일염의 간수로 만든 두부보다 쓴 맛이 덜하고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있습니다."

햇귀가 차오르기도 전의 여름 솔숲은 비릿하다. 새벽 3시. 아직 어스름이 걷히지 않은 시간. 어머니의 뒤를 이어 2대째 순두부를 빚고 있는 김영환씨(59·초당할머니순두부)의 작업실에 불이 켜진다. 그의 작업실은 두부를 만드는 작업장이라는 느낌보다 잘 정돈된 예술가의 공방을 연상케 한다. 작업을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결연하고 신성하다. 지난 시절 어머니가 그랬듯이 평안의 기도에 가깝다. 콩을 씻어내고 불리고, 경포 앞바다의 물을 손수레로 실어 날라 두부를 만들던 어머니들의 삶엔 가족의 안위를 묻는 새벽기도 같은 평안함과 고요함이 깃들어 있다. 바닷물을 담아두는 담수통 아래 창으로 신성한 새벽의 기운이 고요히 비껴든다.

초당마을 순두부거리 모습.

"초당에 순두부 잘하는 휴게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차려내는 순두부의 맛을 기억하며 일명 초당순두부휴게실이라 불렀습니다. 그때가 1981년쯤이니, 벌써 3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손맛을 찾아 강릉과 꽤 먼 곳에서 손님들이 찾아 들었어요. 그러다 바로 옆에 이웃한 '원조초당순두부'가 먼저 문을 열었고, 우리 집도 '초당할머니순두부'라는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초당 순두부가 품은 순백의 미학

순두부는 순과 백의 일치된 합일로, 모든 삶과 이치의 정점에 이르는 경지에 가깝다. '순'은 말 그대로 순하고, 순리에 적합하며 순수한 지경을 일컫는 것이다. 한 그릇의 순두부에는 뜨거운 장작불의 격정, 고단한 삶을 이겨낸 옛 초당 아낙네들의 삶과 이야기가 온전하게 담겨 있다. '백'은 하나의 완성된 색이다. 순결한 백색에는 작렬하는 경포바다의 태양과 청명한 하늘빛과 사계절 푸르른 초당 솔숲의 청록이 담겨 있다. 두부를 감싸고 있는 물빛의 희푸름 역시 경포 앞바다의 물빛이 깃든 셈이다.

"새벽의 부지런한 수고와 좋은 재료, 그리고 노동의 정당한 가치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온전히 일치되어야 순백색의 초당 순두부가 만들어집니다. 부드러움, '순'은 정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온화하고 고요해집니다. 순두부의 새하얀 빛 '백' 역시 그 자체로 거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는 겸허한 빛깔입니다. 지난 시절 초당의 어머니들이 빚어온 순두부에는 평온함과 고요, 온기와 부드러움, 온유함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2대째 순두부를 빚고 있는 초당할머니순두부의 김영환 대표.

새벽, 3시간여의 노동으로 순백의 빛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완성된 순두부 한 그릇은 아침 안개에 감싸인 새벽 산빛처럼 고요하고 편안하다. 물빛 아래 잦아든 부스러기조차 맑은 기운이 돌며 청정하다. 부드럽게 내려앉은 모양새와 새하얀 빛깔은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이루어낸 어머니들의 퇴적된 삶처럼 소박하게 담겨져 있다. 한 그릇의 순두부에 정성이 여전하니, 한 상의 소박한 밥상이 어머니처럼 곱디곱다.

순하고 따스한 순두부 한 그릇의 의미

콩을 재료로 순두부를 만들어가는 작업은 수천 수만개의 콩알들이 개별의 객체에서 하나의 형태로 군집을 이루는 과정이다. 삶의 모습과 다름 아니다. 1970~80년대 초당마을의 어머니들은 가난한 삶의 무게를 버티며 두부를 만들어 강릉 장터에 내다 팔았다. 새벽에 홀로 두부를 쑤는 일은 고단한 일이기도 했지만, 두부를 이고 장에 나가면 또한 삶과 한데 어우러지니 그 자체로 살 만했다. 초당순두부는 하나로 뭉그러지고 어우러지는 삶 그 자체이기도 했다.

새벽 3시, 아직 어스름이 걷히지 않은 시간에 김영환 대표의 작업실에 불이 켜진다.

"초당 순두부는 순함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처음 뜨는 순두부는 눈을 살짝 감고 맛을 봅니다. 첫 손님에게 상을 내기 전 살짝 식힌 순두부 맛을 봅니다. 그러면 흠뻑 젖은 땀과 힘든 시간이 부드러운 감촉으로 사르르 녹아듭니다. 어쩌면 옛 어머니들의 고단한 삶을 온전히 감싸 안은 것은 순두부의 이 순한 부드러움과 평온함이었을지 모릅니다."

아직도 초당마을 거리와 식당 곳곳에는 옛 어머니들의 이야기와 사진 등 자료들이 구석구석 남아 있다. 세월이 담긴 그 오래된 방 안에 차려진 순한 밥상 하나. 간촐하게 차려낸 순두부백반 상차림에 고요가 깃든다. "순두부가 가장 맛있을 때는 뜨거움이 조금 가라앉은 순한 때입니다. 그것이 옛 초당마을 어머니들의 따스한 사랑이었습니다. 지친 속내를 풀어주는 순한 밥상이 초당 순두부의 가장 큰 의미입니다. 한 숟가락의 순두부에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리는 이유는 곱디고운 옛 어머니들의 사랑과 정성이 아직도 전해져오는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차려내는 순두부 한상차림. 그는 아직도 순두부백반과 모두부, 단 두 가지의 메뉴로 상차림을 한다. 이런저런 군더더기 없는 담백하고 순한 순두부 맛을 고집하는 속내이다. 순한 마음의 밥상 차림. 초당마을의 어머니들이 순두부 한 그릇에 담아내었던 삶의 철학을 이어가려는 고집. 초당마을의 순두부 한 그릇에는 헛헛한 속을 따뜻하게 채우던 옛 시정의 삶과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글·사진|이강 <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 leegh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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