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기자의 북앤수다] '살인자의 기억법' 쓴 김영하.. 현재 거처 해운대에서 만나다

부산 해운대에서 작가 김영하 (45)를 만났을 때, 구름 한 점 없는 8월의 태양은 수직으로 곤두박질하는 중이었다. 이토록 피를 덥히는 빛이라면, 태양 때문에 살인했다는 '이방인'의 뫼르소에게도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마를 주인공으로 한 그의 새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펴냄)이 출간 3주 만인 12일 5만부를 찍었다. 자신이 쓴 17권의 책 중에서 가장 빠른 반응이라고, 작가는 반가워했다. 광안대교가 내려다보이는 해운대 32층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우선 1년 남짓 됐다는 부산 이야기부터.
―시칠리아, 밴쿠버, 뉴욕에서의 3~4년을 거쳐 이번에는 해운대. (웃으며) 마린보이의 삶이다.
"(웃으며) 해산물을 좋아한다. 어려서 살던 잠실은 모래밭에 세운 아파트단지였고, 주변은 거대한 땅콩밭이었다. 지금은 바다를 매립하고 지은 아파트에 산다. 유년시절이 떠올라 편안하기도 하고."
―장단점이 있을 텐데.
"밤에 술 먹자고 전화하는 사람 한 명 없다. 날마다 맑은 정신으로 잠들고, 새벽 6시에 일어나 글을 쓴다. 오후 1시쯤 마무리를 하고, 산책을 나간다. 어제도 동백섬 앞바다에서 해수욕을 했다. 뭐 하나 하려면 결국 서울까지 올라가야 하니 그건 좀. 역시 멀다."
부산에서 쓴 '살인자의 기억법'은 최근의 그의 작품 중 가장 빠르고 강렬하다. 호오도 엇갈린다. 매혹적인 설정과 군더더기 없는 문체로 김영하 소설 중 가장 흡인력 강한 작품이라는 열정적 지지와, 마치 불가지론(不可知論) 같은 반전의 엔딩은 무책임하다는 비판이다. 비판의 뿌리엔, '신뢰할 수 없는 주인공 화자(話者)'가 있다. 다음에는 더 완벽한 살인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30년간 살인을 계속했는데, 치욕스럽게도 치매에 걸린 70대 노인 김병수. 살인을 중단한 김병수의 동네에서 새로운 연쇄살인이 시작된다. 당혹해하는 김병수에게 딸은 신랑감을 데려온다. 하지만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 김병수는 단박에 그 남자를 새 살인마로 지목한다. 독자는 당연히 두 살인마의 대결을 기대하기 마련. 그러나 이 소설의 화자가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인 1인칭 김병수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화자'를 선택한 이유는.
"한국 소설의 1인칭 화자는 대부분 점잖은 지식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험버트(나보코프의 '롤리타'에서 어린 소녀에 집착하는 1인칭 주인공)처럼 파렴치한 화자를 본 적 있나. 나는 예전부터 제정신 아닌 사람들이 좋았다. 그런 발언자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그 관점이라면, 기억과 살인에 관한 성찰로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오독인가.
"해석은 물론 독자의 자유다. 하지만 내 관심은 성찰이 아니다. 뿌듯함, 보람, 한 단계 성장했다는 느낌도 관심 없다. 내가 궁극적으로 의도했던 건 육체적 경험, 체험으로서의 독서다."
―육체적 경험이라니.
"책을 읽은 뒤 신체적 증상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내가 들었던 반응에는 '피가 뜨거워졌다' '어지러웠다' '악몽을 꿨다' 등이 있었다. 나쁜 남자, 배드 걸이라는 표현이 있듯, 나쁜 작가가 되고 싶다. 잊을 수 없는 나쁜 작가. 소설을 읽고 나면 마음이 몇 ㎝는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과는 달라진 나. 궁극적으로 소설은 감수성의 계발이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소설이다."
이 '나쁜 작가'에게는 유년의 상처가 있다. 1970년대 서울의 보편적 난방 방식은 연탄보일러. 군인 아버지가 부대에서 숙식을 하던 시절, 단칸방에서 자던 어머니와 열 살 소년 영하는 연탄가스로 응급실로 실려갔다. 고압산소통 덕에 살아났지만, 열 살 이전의 기억은 잃었다고 했다. 이번 책의 제목은 '살인자의 기억법'. 문득 그의 기억에 '살인'에 관한 것이 있는지 궁금했다.
"어렸을 때 어버지 앨범을 봤다. 열 살 이전 기억은 없으니 열한두 살 무렵. 나 출생 전 월남에 다녀온 아버지의 앨범에는 코니카 일제 카메라로 직접 찍은 사진이 아버지가 쓴 설명과 함께 들어 있었다. 총을 맞고 쓰러진 물소, 사살된 베트콩… 그런데 다음 페이지에는 휴양지 다낭 바닷가에 젊은 아버지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살육의 현장에 있던 사람이 너무나 편안하게 튜브를 타고 떠 있더라고. 사람을 죽여봤느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아버지가 요즘 많이 편찮으시다면서.
"후두와 편도선암 4기다. 얼마 전에는 폐에서도. 올해 76세. 모두 고엽제 증상과 관련 있는 암이다. 또 하나의 고엽제 증상이 뇌졸중인데, 아버지는 60대 중반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다."
―고엽제 손해배상소송이 지난달 대법원에서 패소했는데.
"보상에 천문학적 액수가 드는 후두암, 폐암, 뇌졸중은 모두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 단 하나 인정받은 게 있다. 뭔지 아나. 여드름이다. 화농성 여드름. 마치 '거대한 농담'같지 않나. 아버지는 그 소송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일까. 요즘 죽음에 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아직은 40대 중반. 너무 이른 염세(厭世) 아닐까.
"나는 아이가 없지 않나. 조카도, 심지어 처조카도 없다. 가까운 친척도 없다. 내가 죽으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거지. 그래서 내 생은 이 소설들과 함께 끝나는구나 생각한다. 더 열심히, 더 잘 써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1996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래 그가 쓴 책은 모두 17권. 일 년에 한 권씩 꾸준히 '자식'을 낳아 왔다. 김영하는 "뭐랄까, 보고 있으면 자식을 많이 둔 대가족 가장처럼 뿌듯하다. 내게 용돈 주는 건 책밖에 없지 않으냐"며 투명하게 웃었다. 해운(海雲) 없는 해운대도 투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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