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아까운 책]일본 전설을 모태로 한 미스터리 소설

2013. 8. 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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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는 고헤이지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1만4000원

지금은 폐간된 어느 영화 잡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무척 예전의 일이라 내용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걸작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 의 시사회를 마치고 나온 어느 영화 평론가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끝내주는군. 정말 대단한 영화야, 그런데 뭐가 대단한지… 설명하기가 힘드네?" 간혹 그런 책과 마주할 때가 있다,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채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은. 남이 만든 책 중에는 천명관의 < 고래 > 가 그랬고, 내가 만든 책 중에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 엿보는 고헤이지 > 가 그랬다.

별의별 해괴한 일들과 초자연적인 현상들, 요괴들, 그리고 환영들을 끝도 없이 등장시키며, 대관절 이 얘기를 어떻게 수습하려고 저러나, 하는 의혹과 기대의 도가니탕으로 독자들을 몰아넣은 뒤, "원래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할 것만 존재하고,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나는 거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상식이니 경험이니 하는 것의 범주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상식에 벗어난 일이나 경험한 적이 없는 사건을 만나면 모두 입을 모아 저것 참 이상하다는 둥, 그것 참 기이하다는 둥 하면서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지. 자신들의 내력도 성립과정도 생각한 적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나?"라는 자못 당연한 얘기를 지극히 당연하다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늘어놓으며, 환상특급적 결말을 기대하고 있던 독자들에게 심한 쪽팔림과 당황스러움을 기습적으로 안기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이야말로, 지금껏 어떠한 작가도 보여주지 못한 미스터리, 이른바 괴력난신(怪力亂神)적 미스터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통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를 비롯한 몇몇 마니아들)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가 쓴 작품의 한국어판을 내 손으로 만들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 엿보는 고헤이지 > 는 지금껏 내가 만든 책 가운데 가장 안 팔렸다. 이렇게 안 팔릴 수도 있을까 싶을 만큼 안 팔렸다. 왜 안 팔렸을까. 짐작은 하지만 자존심 상하니까 말하지 않겠다. 대신 간단하게 그 내용을 읊조려볼 테니 관심이 있는 분은 판단해보셔도 좋겠다. < 엿보는 고헤이지 > 는 일본의 전설과도 같은'고헤이지 이야기'를 모태로 하는데, 기본적으로 삼각관계를 다루며 남의 아내를 탐한 자를 응징하는 인과응보를 의도하고 있다. 에도의 배우인 고헤이지는 재주가 미숙한 탓에 좀처럼 역을 얻지 못하다가 얼굴이 유령을 닮았다는 이유로 겨우 유령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그의 유령 연기가 인기를 얻어 '유령 고헤이지'라는 별명이 붙는다.

한편 고헤이지의 아내 오쓰카는 우둔한 고헤이지 몰래 극단에서 북치는 역할을 맡은 사쿠로라는 남자와 몸을 섞고 급기야 사쿠로는 아사카 연못에서 고헤이지를 빠뜨려 죽이고 만다. 하지만 죽은 고헤이지가 유령이 되어 에도로 돌아오자, 살아 생전의 유령 연기와 똑같은 모습과 맞닥뜨린 사쿠로는 발광하다가 죽고, 오쓰카 역시 비명횡사한다. 교고쿠 나쓰히코는 '고헤이지 이야기'의 삼각관계나 인과응보와 같은 기존의 패턴을 버리고 인연을 초월한 어떤 관계를 그리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관계'와 '인연'에 대해, '누군가를 선택할 때는 거기에 동반되는 고통과 혐오도 포함하여 몽땅 받아들일 각오로 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에 대해 알 듯 모를 듯한 문장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어디선가 '쯧쯧, 왜 안 팔렸는지 알겠군'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이 좋다. 후속편을 또 낼 생각이다. 그때도 안 팔리면? 할 수 없지 뭐 어쩌겠나.

김홍민 < 북스피어 편집자 >

'내가 만든 아까운 책'은 출판사 편집자들이 꾸미는 지면입니다. 공들여 만들었지만 주목받지 못한 좋은 책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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