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악사중주곡 중 최고 걸작의 선율
[이채훈의 힐링 클래식] 58. 하이든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
[미디어오늘 이채훈 MBC 해직 PD] http://youtu.be/3CsM4UxPkxI (현악사중주 편곡판 서주, 느리고 장엄하게)
"성당의 벽, 유리창, 기둥은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고 천장 한가운데 매달린 커다란 등불 하나가 이 장엄한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정오에 문이 굳게 닫히면 의례가 시작됐다. 사제는 제단에 올라가서 일곱 말씀 중 첫 말씀을 읽고 이에 대해 강론을 했다. 그는 다시 제단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음악이 침묵의 공간을 채웠다. 사제는 다시 제단에 올라 두 번째, 세 번째 말씀을 읽었고 그 사이사이에 오케스트라가 내 음악을 연주했다."(하이든, 1801년 브라이트코프 & 헤르텔 출판 <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 > 머리말)
하이든의 작품 중 아주 특이한 곡이 하나 있습니다. 이 곡은 교향곡이 아니면서 '교향곡 중 최고 걸작'이고, 현악사중주곡이 아니면서 '현악사중주곡 중 최고 걸작'이고, 피아노 소나타가 아니면서 '피아노 소나타 중 최고 걸작'입니다. 하이든은 훗날 이 곡을 오라토리오로도 편곡했습니다. <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 >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기 전에 남긴 일곱 마디 말씀을 주제로 만든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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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은 1785년, 스페인 카디즈 성당의 성 금요일 미사에서 연주할 음악을 작곡합니다. 플루트 2, 오보에 2, 파곳 2, 호른 4,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를 위한 관현악곡입니다. 맨 앞에 서곡이 있고, 십자가에서 예수가 남긴 일곱 개의 말씀에 해당하는 일곱 개의 악장이 있고, 맨 뒤에 예수가 세상을 떠난 뒤 일어난 지진을 묘사한 에필로그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도합 9악장으로 된 교향곡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호르디 사발이 지휘한 전곡 연주, 음악의 분위기를 잘 살린 동영상입니다. http://youtu.be/m7iLwHDmuzs (관현악 원본, 전곡)말러의 교향곡 3번과 < 대지의 노래 > 가 6개의 악장으로 돼 있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4번이 11개 악장으로 돼 있는 걸 감안하면, 지금 우리 기준으로 볼 때 하이든의 이 곡을 '교향곡'으로 간주하는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의 인간적 고뇌와 번민,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고 삶을 긍정하는 예수의 의연함을 묘사한 이 음악, 곡의 규모나 감정의 깊이로 볼 때 단연 하이든 '교향곡' 중 최고 걸작입니다.
하이든은 이 곡에 대해 유달리 깊은 애착을 가지고 여러 가지 악기 편성으로 개작했습니다. 1787년 현악사중주곡으로 편곡한 악보는 빈, 런던, 파리는 물론 베를린, 나폴리에서도 출판되어 유럽 전역에서 널리 연주됐습니다. http://youtu.be/zjIi6MwmPMM (현악사중주 편곡판, 전곡)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곡 중 13번 Bb장조 Op.130이 6악장, 14번 C#단조 Op.131이 7악장으로 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9악장으로 된 하이든의 이 곡을 '현악사중주곡'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요. 하이든의 어떤 현악사중주곡보다 장대한 이 곡은 베토벤의 후기 사중주곡의 심오한 깊이에 이미 도달한 느낌입니다. 오늘날도 관현악 판보다 현악사중주 판이 더 널리 연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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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업자 한 명이 이 곡의 피아노 편곡판을 갖고 있었습니다. 1787년, 이를 알게 된 하이든은 악보를 감수한 뒤 출판을 승인했습니다. 서주와 에필로그가 붙어 있는 7개의 소나타인 셈입니다. http://youtu.be/xIkYBVwEi1k (피아노 판, 전곡)한 악장으로 된 소나타들, 바로크 시대 스카를라티의 작품보다 후기 낭만시대 스크리아빈의 소나타에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지는 '소나타 모음'입니다.
어둡고 격정적인 정서가 넘치는 작품으로, 하이든은 "음악을 처음 듣는 이에게도 깊은 감명을 줄 수 있는 곡"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서주(느리고 장엄하게)에 이어 예수가 십자가의 수난을 당할 때 남긴 일곱 말씀에 해당하는 일곱 곡의 소나타가 이어집니다. ① 라르고,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② 그라베 칸타빌레, (사도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③ 그라베, (나란히 십자가에 달린 죄수가 "저를 꼭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당부하자)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④ 라르고,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⑤ 아다지오, "목 마르다." ⑥ 렌토, "이제 다 이루어졌다." ⑦ 라르고,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어서 피날레 '지진'(地震), 아주 격렬한 프레스토로 마무리합니다.
요즘도 교회나 성당에서 이 곡을 연주할 때 사제가 성서 구절을 읽고 꿇어앉으면 오케스트라나 현악사중주단이 해당 악장을 하나씩 연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례를 떠나 순수한 음악으로 연주하고 감상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성서의 말씀을 떠나서 들어도, 한 고귀한 인간의 생애를 음악만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에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1801년 출판된 악보의 머리말에서 하이든은 "약 10분 동안 지속되는 일곱 개의 느린 악장을 차례차례 연주하면서 듣는 이가 지치지 않도록 작곡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이 곡에 시간 제한을 두는 것은 내겐 불가능해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강한 열정에 사로잡혔으면 한 악장이 끝나는 걸 작곡자 자신이 상상조차 못했을까요? 실제로, 일곱 개의 느린 악장이 계속되지만 격렬한 감정이 교차하는 이 음악은 절대로 지루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이든이 그때까지 만든 어느 작품보다 더 공들여서 작곡했다는 증거지요.
이 곡은 하이든의 손에 의해 오라토리오로 개작됐습니다. 1795년, 두 번째 런던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파사우에 들른 하이든은 이 작품을 그곳 성당 악장 요젭 프리베르트가 성악곡으로 편곡해서 연주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연주가 맘에 들었던 하이든은, 가사가 있는 오라토리오로 이 작품을 개작해야겠다는 의욕을 느꼈고, 프리베르트의 가사를 받아서 성악 파트를 새로 썼습니다. (이용숙 < 지상에 핀 천상의 음악 > , 샘터, p.119~p.120)
하이든은 이 곡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여겨, 런던과 빈에서 기회 닿는 대로 이 곡을 지휘했습니다. '음악의 종' 하이든 생애를 다룬 영화를 만든다면 이 곡의 서주를 주제 음악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만약 하이든이 오라토리오 < 천지창조 > 와 < 사계 > 를 못 쓴 채 세상을 떠났다면 이 곡은 교향곡, 현악사중주곡, 오라토리오 등 모든 장르를 통틀어 하이든의 최고 걸작으로 주목받았을 것입니다. http://youtu.be/-cPchmU-pB4 (오라토리오 판, 전곡)
| < 필/자/소/개 > 이채훈은 MBC 시사교양 PD로 모차르트, 빈 필하모닉, 정경화 · 정명훈 · 장영주 · 장한나 등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다수 연출했다. 요즘은 '진실의힘 음악여행', '와락 음악교실'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 <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 , <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 , < 이채훈의 마술피리 - 마음에서 마음으로 > (E-북)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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