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품 그 도시]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 프랑스 그라스

2013. 7. 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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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넘버 5'가 불륜의 산물이었다니..

피아노에 앉은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빅 클로즈업으로 담기는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보았다. 영화 '스토커'와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였다. 패션 화보처럼 아름다운 남녀의 풍경 속엔 신경증적인 균열의 징조가 가득했다. 한쪽은 근친상간, 다른 한쪽은 불륜의 냄새로 말이다. 형의 딸을 사랑하는 남자와 아내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중, 어느 쪽 죄가 더 무거운가를 판단하기엔 막 장마가 시작된 창밖 날씨가 음침했다. 그날, 빗소리를 듣다가 영화를 보는 중간 졸기도 했다. 덕분에 '샤넬과 스트라빈스키'를 보던 날, 문제의 피아노 장면을 꿈결처럼 기억한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던 스트라빈스키와 샤넬이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유독 샤넬이 불륜의 상징처럼 이런저런 장르에 참 많이 등장한다 싶기도 했다.

1913년 파리에서 초연한 발레 '봄의 제전'은 (니진스키의 발레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혁명적이며 전위적인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 평론가 일단으로부터 혹평을 받는다. 하지만 그의 잠재력에 단박에 매혹당한 샤넬은 스폰서가 되어주겠다며 그를 향해 구원의 손을 내민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관을 전전하며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던 스트라빈스키는 샤넬의 제안으로 그녀의 저택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기로 한다. 그리고 곧 매혹적인 팜파탈(femme fatale) 코코샤넬에게 빠져들게 된다. 샤넬과 함께 살면서 남편과 그녀의 불륜을 목격했던 스트라빈스키의 아내는 점점 더 병들고 말라간다. 어린 시절의 친구로 한때 그의 뮤즈이기도 했던 그녀는 어느 날 "내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나!"라고 몸부림치다 아이들과 함께 그 집을 스스로 걸어나간다.

세기의 스캔들 메이커로 유명했던 샤넬의 남성 편력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샤넬 넘버 5'의 제작 과정은 흥미로웠다. 특히 1920년대를 살았던 그녀가 향수의 고장이라는 프랑스 그랑스로 출장을 가며 조향사 '어네스트 보'를 닦달하는 과정은 나로선 꽤 눈여겨볼 만했다. 프랑스 남부 그라스산의 재스민과 5월의 장미, 코모로산의 일랑일랑, 레위니옹섬의 베티버 등 이국의 향기로 가득한 소재를 뒤섞은 이 기념비적 향수는 지금 내 화장대 위에도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실 샤넬 넘버 5가 등장하기 전의 향수는 꽃향기를 재현하는 것에 머물렀다. 무엇보다 '무슨 무슨 눈물'이나 '무슨 무슨 바람'처럼 향수에 로맨틱한 작명을 하던 당시 관습 대신 단순한 숫자를 향수 이름으로 채택했던 건 파격이었다. 재밌는 건 스트라빈스키와 벌인 불륜을 통한 음악적 영감이 '여성의 향기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를 기획했던 샤넬의 머릿속에 어떤 영감을 심어주었느냐는 것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아내가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동안, 샤넬이 세기의 향수를 만들며 그라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러니는 삶이 결코 공정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혼자 그라스를 여행한 적이 있다. 뜨거운 8월의 여름이었다. 이 향수의 도시에선 나이 든 노인들조차 냄새를 풍기며 다녔다. 어느 거리를 걷다가, 지나가는 노부인에게서 4월의 라일락 냄새를 맡았다. 버스를 타고 도시의 향수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때 향수를 시향해주던 중년 여자 손목에서 나던 어렴풋한 제비꽃 냄새가 기억났다. 나는 그것이 성숙한 암컷 냄새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나이가 든다면 꼭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시그니처 향수를 선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라스에선 별수 없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가 떠올랐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18세기 프랑스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혐오스러운 천재가 적지 않았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천재적이면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주인공은 가장 아름다운 향을 만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프랑스에서는 혹평받던 샤넬은 1950년대 미국에서는 대성공한다. "제가 침대에서 입는 유일한 옷은 바로 샤넬 넘버 5예요." 세기의 영화배우 메릴린 먼로가 그녀의 성공에 일조했다. 하지만 먼로는 짧은 생을 뒤로 한 채 거짓말처럼 침대에서 알몸인 채로 죽었다. 그것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케네디가와 얽힌 음모의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로. 케네디 암살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재클린 케네디의 피로 물든 옷도 샤넬의 핑크빛 수트였다. 부도덕한 사랑에 빠진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어떤 매혹 때문일 것이다. 이생에선 보기 힘든 강렬한 매혹. 하지만 그 매혹은 마침내 죽음에 와 닿아 파멸을 부른다. 또 다른 천재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에서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샤넬 2.55의 가격이 점점 치솟아 마침내 1000만원을 넘는 날, 나는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추모하는 칼럼 하나를 쓰게 될 것 같다. 샤넬은 어떤 면에선 혐오스러운 천재다. 그런데도 내가 그녀를 얼마쯤 옹호한다면 이 냉소적 천재의 이런 면 때문이다. 늘 검은 옷을 차려입고 다녔던 샤넬에게 어느 날 디자이너 폴 푸라에가 말한다. "누구 장례식이라도 갑니까?" 그의 비아냥거림에 푸라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우리의 마드모아젤은 이렇게 말한다. "맞아요! 당신 장례식에 가는 거예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얀쿠넹 작품. 아나 무글라리스, 매드 미켈슨이 출연해 샤넬과 스트라빈스키를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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