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강소기업]⑪사랑방신문..'생활정보=사랑방' 브랜드파워

배상현 2013. 5. 8.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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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사업 규모 전국 1위, 신문+인터넷+모바일 멀티미디어 `꿈''야학' 출신 조덕선 회장 `생활정보 평등화 선구자' 역할 톡톡

【광주=뉴시스】배상현 기자 = `사랑방신문'은 광주·전남지역에서 조미료 `미원'이나 `버버리코트', `봉고' 처럼 상품이름이 보통명사화돼 널리 알려져 있는 `히트상품 '중의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와 주택, 자동차, 생활용품, 중고제품 등을 팔고 사고 구인· 구직 등을 위해 먼저 문을 두드리는 곳이 `사랑방'이다. `생활정보신문'하면 `사랑방신문'으로 곧바로 통하는 강력한 브랜드 파워는 동종 업계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서울의 `벼룩시장', 대전의 `교차로'와 함께 우리나라 생활정보지의 역사를 쓰고 있는 광주의 `사랑방'은 프랜차이즈나 제호를 빌려주는 형식을 빼고 `광주 사랑방' 하나로만 따지면 매출규모나 마켓셰어, 영향력에 있어 광주·전남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1위다.

주6회 타블로이드판형으로 하루 192페이지를 찍어내며 호남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사랑방은 1만개의 배부대와 12개 배포 시스템으로 광주·전남지역 독자들을 매일 찾아간다. 억대의 아파트광고에서 1000~2000원짜리 중고품, 물물교환 광고까지 하루 2만5000건에서 3만건까지 광고를 싣고 있다. 이렇다보니 마켓셰어 70%, 브랜드 인지도 96%, 지난 2011년 매출액 209억원, 종업원수만 170명에 이른다.

여기에 생활정보포털 `사랑방닷컴'과 생활미디어 `옐로우사랑방', 종합광고대행사 `사랑방 애드', 신문인쇄전문기업 `SRB프린팅', 부산·경상권 생활정보신문 `부산시대' 등 총 5개 계열사를 합치면 전체매출은 400억원, 임직원 320명으로 명실상부하게 SRB(사랑방)미디어그룹으로 성장했다.

지난 1990년 11월 6일 광주 북구 현재의 현대백화점 부근에 66m²(2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6명이 주간 8페이지로 창간호를 낸 사랑방은 초창기 3년간 적자에 허덕였지만, 이를 극복하고 20여년간 사세를 확장해 최근 광주역 부근의 지역일간지 9층짜리 건물을 인수하며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사랑방의 성공에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10대때 취업전선에 뛰어들며 사업가의 꿈을 일궈나간 조덕선(53)회장의 사업수완과 도전정신, 뚝심이 자리잡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전남대 대학생들로 구성된 `용봉야학'이 운영하던 재건중학교를 다니며 2학년 1학기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한 조 회장은 그해 8월 15세 나이로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 신설동 자동차 부속가게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4형제 중 장남인 내가 짐을 져야한다는 생각이 강했었다"고 당시를 회고한 그는 5년만인 20세때 자신이 직접 자동차 부속 가게를 차릴 정도로 사업수완이 뛰어났다. 광주와 목포, 전주에 3개의 가게를 둘 정도로 사업을 확장한 조회장은 우연한 기회에 생활정보신문에 대해 접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된다.

그를 입지전적 인물로 만든 고리가 된 것은 야학이었다. "당시 사업차 전주를 오가던 중 1989년 전주 모신문사에서 해직된 `야학친구'를 만나게 됐는데, 처음으로 나온 생활정보신문 `교차로'를 보여주며 `우리도 이걸 한번 해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돈은 내가 대고 신문은 해직기자들이 만드는 것이었지요."

`야학친구'는 2대 사장을 지낸 정태형씨다. 조 회장은 이듬해 시장조사에 나선다. 생활정보신문이 앞섰던 유럽과 미국 등의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당시 야학교사로 활동하다 독일 등 유럽으로 유학을 간 후배들에게 "생활정보지가 시장성은 있는지,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성공사례 등을 꼼꼼히 챙겨줄 것"을 주문했다.

돌아온 회신을 토대로 조 회장은 국내 생활정보지들도 벤치마킹을 하며 창간작업을 시작한다. `사랑방'이란 제호는 교차로와 벼룩시장이 프랑스와 미국 등지의 생활정보지 개념과 어원을 딴 것과 달리, "우리 선조들이 정보의 교류를 어디서 했을까"라는 고민에서 나왔다.

"당시 시민들은 생활정보에 관한 정보의 욕구가 급격히 올라갔는데, 이를 뒷받침해 줄 정보의 창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정보에 목말라하는 시민들의 니즈를 확인하며 무료신문은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밝힌 그는 하지만, 창간 초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료신문'이라는 벽을 넘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무료신문이 흔하지만, 당시는 이같은 비즈니스 모델이 없어 가장 힘들었어요. 독자들이 익숙하지 않으니까, 약국이나 안경점 앞에 배포대를 놓으면 주인이 있으면 신문을 가져가지 않고 없을때 가져갈 정도였어요"

조 회장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승부수를 띄웠다. 결단은 적자속에서도 무차별적인 배포였다. 15만~20만부를 찍어 광고지를 돌리듯 돌렸다고 한다. 그때는 배포대에 `사랑방신문'보다는 `무료신문'이라는 글씨를 더 크게 썼다.

"무료신문은 많이 찍어서 독자들이 많이 보게 하는 것이 파워가 되지요. 그때 광고전단지를 돌리듯 지역 곳곳에 날리도록 찍고 또 찍었습니다. 3년간 적자를 보았지만, 이후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방신문이 나오니까 광주지역에 생활정보지가 우후죽순으로 7개까지 생기면서 빠르게 시장 형성을 한 것도 한몫했다. `군계일학'으로 그중에서 사랑방은 돋보였고 브랜드가 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집을 옮기거나 차를 바꾸고 또 돈이 급해 헐값에 물건을 내놓는 등 고객들이 삶의 변화와 애환이 있을때 사랑방을 찾는다는 점에서 광고효과를 볼 때 평생 잊을 수 없는 각인효과도 브랜드 상승의 한 배경이다.

조회장은 사랑방의 성공, 정보지의 성공에 시기가 적절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생활정보신문이 성공하려면 광고를 접수받는 전화보급율, 광고료 입금을 위한 금융전산화 등이 꼽히는데 이같은 인프라가 갖춰져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고 설명했다.

그의 수완은 부산의 `사랑방 신문'인 `부산시대'를 빚더미 속에서 인수해 6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메이저급 생활정보지로 탈바꿈시키면서 다시 한번 동종 업계 사람들을 놀라게했다.

1990년대 중후반 3년간 타향인 부산으로 직접 가서 다양한 시도를 했다. 신문사의 인쇄빚을 `1년 거치 3년 상환'으로 담판짓고 소규모 생활정보지를 합쳐 인재를 모으고 편집,광고, 인사, 경영시스템을 바꿔 기업정상화를 이뤘다. 생활정보신문 업계의 `조덕선 브랜드'가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하는 순간이었다.

"광고는 철저한 시장논리입니다. 고객이 광고를 낼때 광고가치를 느껴야 가능합니다. 효과가 없으면 바로 빠집니다. 광고효과는 많이 찍고, 정확한 시간에 독자들 가까이 배부해야 합니다. 고객이 전화하면 무전시스템을 통해 10분내에 달려갑니다"

그의 도전은 계속된다.

신문에서 인터넷으로, 인터넷에서 다시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모바일로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세상속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하루하루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 늦었지만 방송통신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새로운 트렌드를 잡기 위해 하루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고 있다.

조 회장은 "사랑방신문은 신문, 인터넷, 모바일까지 종합 멀티미디어 체계를 구축하고 시민들의 변화된 정보 니즈를 적극 반영해 `코콕'과 같은 새로운 정보 서비스를 확대하는 한편 정보의 범위도 넓혀 나갈 예정이다"면서 "궁극적으로 `네이버'처럼 사랑방을 지역민 사이에 꼭 필요한 정보의 원천이자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지역 전문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다"고 말했다.

"지역사회의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해 서민경제에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창간을 결심했다"고 23년 전을 되짚은 조 회장은 `생활정보 평등화의 선구자'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싶다.

praxis@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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