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리니 화장실

2013. 5. 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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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sc]한남동 작은방

공간은 쓰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화장실은 어떤 공간일까?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녀석을 낳는 곳이겠지만, 나에게 화장실은 아이디어를 낳는 곳이다. 볼일을 보고, 샤워를 하는 순간만큼은 유일하게 다른 것에 현혹되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비우는 시간이 있어야 다시 채워진다. 내가 생각해내는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멍하니 변기에 앉아 있을 때나, 눈을 감고 머리를 감으면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를 때 떠오른다. 회사 기획안의 아이디어도 개인작업의 아이디어도 많은 수가 화장실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화장실을 산토리니 스타일로 바꾸기로 했다. 어릴 적 본 이온음료 광고 때문이다. 손예진이 아무런 걱정도 없는 듯이 해맑게 웃으며 자전거를 타고 산토리니를 달리는 모습을 본 순간, 그때부터 '여유'라고 하면 산토리니가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사실 40년 된 집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화장실이 최악이었다. 화장실 문을 열면 금이 간 시멘트벽에 전선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어 마치 창고나 폐가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처녀 귀신과 같이 샤워하는 기분이라 외롭지는 않았지만 그만 이별하고 싶었다.

먼저 분위기를 밝게 하기 위해 물에 강한 '핸디코트 워셔블(석회)'을 벽에 칠했다. 지중해 양식이 원래 석회로 되어 있어 딱 맞는 재료였다. 산토리니 사진을 많이 모았는데 유기적인 선이 특징이었기 때문에 선반에도 모두 석회를 발라 부드럽게 마감을 했다. 천장과 문을 파란색으로 칠하고 나니 콘셉트를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흰색과 파란색이 산토리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물을 사용하는 공간과 가장 어울리는 색이기 때문이다. 지중해와 어울리는 장식 접시는 구할 수가 없어 대형 멜라민 뷔페 접시에 아크릴 물감으로 한 땀 한 땀 그려서 완성을 했다.

그리고 화장실답지 않게 공간이 넓고 창문도 커서 야외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 느낌을 살려 벽에 프레임을 만들어 산토리니 거리 사진을 붙여 놓고 외부용 등을 달아주었다. 볼일을 볼 때면 거리에 나와 있는 듯한 변태적인 상상이 들었지만, 어쨌든 몸의 생리현상도 머릿속의 상상력도 더 순환이 잘되는 것 같았다.

공간을 변신시킨다는 것, 특히 나의 성향을 온전히 공간에 투영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는 것 같다. 손예진은 없을지언정 오늘도 산토리니에서 샤워하는 상상을 한다.

우연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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