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으로 읽는 한국 근현대](4) '자강' : 제국의 시간을 상징하다

노관범 |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교수 2013. 4. 19.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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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4대 국경일이 있다. 달력을 넘기는 순서대로 세면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이다. 1949년 신생 대한민국에서 법률로 정한 국가 기념일이다. 이 날은 관청도 쉬고, 학교도 쉬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특별한 날이었다. 그 기념하는 의미가 민족의 시작, 민족운동의 폭발, 민족의 해방, 국가 체제 수립으로 이어져 있어서 흥미롭게도 대한민국 건국사를 읽을 수 있다. 국경일을 합하면 민족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국경일은 대한제국 시대에도 있었다. 광무년간 설립된 신식 학교의 휴학일 규정을 보면 만수성절(萬壽聖節, 음력 7월25일), 천추경절(千秋慶節, 음력 2월8일), 흥경절(興慶節, 음력 12월13일),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 음력 7월16일),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음력 9월17일)에 학업을 쉬었음을 볼 수 있다. 융희년간 제정된 관청 휴무일 규정을 보면 건원절(乾元節, 양력 3월25일), 즉위예식일(卽位禮式日, 양력 8월27일), 개국기원절(양력 8월14일), 계천기원절(양력 10월12일), 묘사서고일(廟社誓告日, 양력 11월18일)에 공무를 쉬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만수성절과 건원절은 각각 고종과 순종의 생일을 가리키고, 천추경절은 고종의 황태자, 곧 훗날 순종의 생일을 가리키고, 흥경절과 즉위예식일은 각각 고종과 순종이 즉위한 날을 가리킨다. 민국이 아닌 제국에서 황제의 생일과 즉위일이 기념되었을 것임은 당연지사.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개국기원절은 조선왕조가 개창한 날이요, 계천기원절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날이다. 대한제국 시대에 조선왕조가 개창한 날을 무엇하러 기념할까 싶겠지만 대한을 건국한 임금이 태조이고 대한을 중흥한 임금이 고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건국과 중흥의 두 기념일 모두 중요했다. 묘사서고일은 글자 그대로 종묘와 사직에 중요한 나랏일을 고한 날이다. 우리나라 근대에 임금이 중요한 나랏일을 고한 적이 세 차례 있었다. 하나는 1894년 음력 12월12일이다. 이 날 고종은 종묘와 사직에 가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천명하고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그렇지만 이 날은 국경일로 기념되지 못했다. 또 하나는 1897년 음력 9월17일이다. 이 날 고종은 종묘와 사직 대신 직접 원구단에 가서 조선의 자주독립이 대한제국의 선포로 구체화되었음을 천명하고 국가 혁신을 예고하였다. 계천기원절이 이 날이다. 또 하나는 1907년 11월18일이다. 이 날 순종은 원구단 아닌 종묘와 사직에 가서 '유신(維新)'을 국시로 천명하고 다시 국가 개혁을 예고하였다. 이른바 묘사서고일이 이 날이다.

1906년 3월 결성된 대한자강회의 '대한자강회월보' 창간호.

▲ 자주독립의 국정 개혁과 부강 추구황제도, 대신도 꺼내지 못한 '자강'백성들 사이 아우성처럼 울려퍼져암울했던 일제 때도 끊임없이 설파

■ 국경일의 변화 제국 자강의 문제 걸려있어

대한제국의 국경일에 갑오년(1894년)이 배제되고 정유년(1897년)이 기념되며 정미년(1907년)이 추가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제국의 역사에 대한 대립적인 해석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독립의 역사적 기억에 갑오년을 지우고 정유년을 각인한 것이 고종대 정치권력의 의지였다면 유신의 역사적 기억에 정유년을 지우고 정미년을 각인한 것은 순종대 정치권력의 의지였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갑오년에서 정유년으로 다시 정유년에서 정미년으로 가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제국의 자강이라는 문제가 걸려 있었다.

문제는 자주독립에서 시작하였다. 자주독립은 제국의 출발지인 동시에 목적지였다. 대한이 세계 열강 속에서 계속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했다. 허명이 아니라 실력이 필요했다. 대한 스스로의 힘으로 부강을 이룩해야 자주독립이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고종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정유년 황제로 즉위한 후 조서를 반포하여 혁구도신(革舊圖新), 곧 옛 제도를 고쳐 새 제도를 만들겠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였다. 이것은 군주권을 제한하고 정치권력을 내각에 집중시킨 갑오개혁을 결코 용인하지 않은 그가 아관파천 후 이른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단행하여 새 제도인 내각을 혁파하고 옛 제도인 의정부를 복구시킨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국가 정책의 무게 중심이 구본신참에서 혁구도신으로 옮겨짐에 따라 혁구도신의 실천적 함의를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였다. 독립협회는 제국 초기 새로운 국제 수립에 있어서 이를 서양의 법제를 수용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신(新)은 곧 서(西)를 의미한다고 보고 서양 근대 문명을 향한 진보를 열렬히 신봉하였다. 언론 매체에서는 정유년 이전 갑오년의 역사적 기억이 증폭되어 갔다. 갑오중흥, 갑오경장, 갑오개혁, 갑오이전, 갑오이후 등 다양한 어휘 현상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곧 혁파되었으며 언론 매체의 진보 담론도 쇠퇴하였다.사실 정유년 제국이 선포되었을 때에 그 정치적 색채는 어쩌면 자주독립의 측면보다는 유신의 측면이 더 강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유신이란 중국의 고대 국가인 주나라와 관련된 고전적인 개념으로 이른바 '주수구방 기명유신(周雖舊邦 其命維新 : 주나라가 비록 옛 나라이지만 그 명이 새로워졌다)'을 가리킨다. 주나라가 오랜 기간 제후국이었다가 주 문왕에 이르러 천명을 받아 천자국의 기틀을 갖춘 것처럼 조선도 오랜 기간 제후국이었다가 고종대에 이르러 천명을 받아 황제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적인 유신 개념에 비추어 보는 한, 대한은 정유년 이후 더 이상 유신이 거론될 필요가 없는 이미 유신을 이룩한 국가였다.

이 점에서 순종이 정미년 종묘와 사직에서 새삼 대한의 유신을 천명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집요하게 퇴위 요구에 시달린 고종이 끝내 황제 자리를 순종에게 선위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순종의 비정상적인 즉위를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한 안정적인 키워드가 필요했던 면도 있었을 것이다. 고종이 담당한 소명을 순종도 계속 지속시켜 나간다는 안정적인 어감을 줄 수 있는 말이 유신이었다. 그러나 순종의 시대에 이제 더 이상 유신은 공허한 말이었다. 순종은 실상 대한의 상징인 경운궁에서 조선의 상징인 창덕궁으로 회귀한 임금으로 추락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제국의 유신을 천명한 것은 일견 자기모순이었다. 실은 그가 천명한 유신의 참뜻은 그 첫 번째 세부 강령으로 메이지 일본이 추구한 개국진취(開國進取)라는 어구가 제시된 데서 보듯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배후에는 메이지유신을 떠올릴 만큼 일본 통감부가 대한제국 사회를 급격히 타율적으로 변화시켜 나가겠다는 의지가 도사리고 있었다.

■ 황성신문, 국민을 향한 슬로건으로 제창

결국 고종의 10월 유신은 순종의 11월 유신으로 끝났다. 개혁 없는 주체의 위험은 주체 없는 개혁의 위험으로 연속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자강의 희망이 타올랐다. 제국의 시련을 이겨내기 위한 자강의 아우성이 민간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초대 통감의 자격으로 대한을 지배하러 이등박문이 내한했던 1906년 3월 한국에서는 보란 듯이 대한자강회가 결성되어 국가 독립이 자강에 있음을 천명하였다. 동년 8월 재일 한국 유학생들은 '태극학보'를 창간하여 자강을 두려워한 지난 세월을 통절히 반성하고 태극기 휘날리며 국민교육을 제창하였다. 바야흐로 자강운동의 시작이었다. 황제도 정부 대신도 꺼내지 못한 자강을 백성들이 외친 것이다.

사실 자강은 제국 초기부터 언론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황성신문 1899년 12월9일자 논설에는 대한제국에 자강의 풍조가 없음을 비판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서양은 일신우신(日新又新)하고 일진우진(日進又進)하는 역동적인 사회풍조 덕분에 부단히 개명진보가 이루어져 왔는데 대한도 이를 본받아 속히 국가 부강을 이룩하자는 내용이다. 앞서 보았듯 고종이 제국을 선포하며 밝힌 혁구도신을 이용해 주체의 진보를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언론에서 자강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핀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였다. 황성신문 1902년 2월26일자 논설과 1903년 6월9일자 논설이 대표적이다. 멀쩡한 독립국인 한국과 중국에 대해 영국과 일본이 1902년 동맹을 맺고 각각에 대해 '보호유지'하겠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신문 편집진은 바로 오늘부터 '자강의 날'로 삼아 속히 국정을 개혁하고 부강을 추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러일전쟁 전야 한국의 국망 위기를 감지한 신문 편집진은 긴급하게 전국 동포를 대상으로 부모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강으로 마음을 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자강은 이제 국민을 향한 슬로건이 된 것이다.

존 믹슨이 1906년 '한국평론'에 기고한 미래소설 '1975년 서울 방문기'. 대한이 자강 결과 1935년 독립을 쟁취해 1975년 일등 국가로 성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제국의 시계바늘' 줄곧 자강을 가리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을사늑약은 결국 취소되지 못했다. 대한은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했지만 오히려 자강의 이상은 강렬해졌다. 대한자강회는 '자강주의(自强主義)'를 표방하였고 자강적 사상으로 자강적 실력을 양성하자고 하여 '자강사상(自强思想)'을 강조하였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되고 대한자강회가 해산되면서 자강의 사회적 표방이 억압된 융희년간의 암울한 시기에도 자강의 가치는 끊임 없이 설파되었다. 비록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대한협회는 일본에 대한 '자강' 대신 일본과의 '협'(協)을 명시할 수밖에 없었지만 청년학우회는 대한의 미래 세력인 청년의 인격 양성을 위한 기본 정신으로 명확히 자강을 제시하였다. 자강이란 외세에 의한 타율적인 진보가 아니라 주체에 의한 자주적인 진보를 의미하였고 자조(self-help)와 동일한 개념으로 통용되었다.

이제 제국의 시간은 자강 이전과 자강 이후로 양분되었다. 자강하지 못한 어두운 과거와 자강한 결과 맞이할 밝은 미래가 동시적으로 연접하였다.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1906년, 대한매일신보 주필 박은식은 자강사상으로 제국의 과거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훗날의 < 한국통사 > 제작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같은 해 헐버트가 발행하는 영문 월간지 '한국평론'(Korea Review)에는 존 믹슨이 기고한 미래소설이 실렸다. 대한이 자강한 결과 마침내 1935년 독립을 쟁취하고 1975년 세계 일등 국가로 성장한다는 환상적인 내용이었다. '자강 이전'의 경험 공간과 '자강 이후'의 기대 지평이 팽팽히 맞부딪쳐 있는 제국, 그 제국의 시계 바늘은 줄곧 자강을 가리키고 있었다.

< 노관범 |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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