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화신> 법을 쥔 자, 법을 벗어나리라

유선주 2013. 3. 2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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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 돈의 화신 > 의 첫 출발은 '김제 마늘밭 돈다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양평의 산사태 현장 복구 중에 발견된 수백억대 구권화폐가 흩날리고 그 돈을 잡으려 달려든 인부들 중 사망자가 발생한다. 이 사건의 담당검사로 현장에 도착한 이차돈(강지환)은 익명의 남자에게서 '당신 부모가 지어준 진짜 이름을 알려주겠다'는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점은 과거로 돌아간다. (그 돈의 주인이었던) 부동산 재벌 이중만(주현)은 어린 아들 강석(박지빈)에게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다만 돈이 적을 뿐'이라 가르치는 인물이다. "강석아 니는 공부 같은 거 절대로 하지 말그래이. 니는 나중에 공부 잘하는 놈만 딱딱 골라가 니 꼬붕으로 부리면 되는기라."

이중만은 자신의 신념대로 공부 잘하던 지세광(박상민)을 키워 사법연수원생으로 만들었고, 애첩인 무명 여배우 은비령(오윤아)을 스타로 키운다. 그러나 세광과 비령의 밀회를 엿보게 된 이중만은 둘을 제거하려다 도리어 세광이 짜놓은 각본대로 죽음을 맞는다. 중만이 아끼던 세광은 과거 뺑소니 사고를 낸 중만을 대신해 감옥에 갔던 운전기사의 아들로,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 돈다발과 금괴가 가득한 비밀창고를 '돈의 성전'으로 삼았던 이중만은 허무하게 죽었다.

이후 세광은 유언장을 조작해 은비령에게 유산을 넘기고, 그 몫을 배분하는 것으로 검사 권재규(이기영)와 연예부 기자 고호(이승형), 그리고 이중만의 변호사였던 황장식(정은표)을 매수해 이중만의 아내에게 남편 독살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법정 사기를 준비한다.

그 사실을 알아챈 강석은 지세광에게서 도망치다 사채업자 복화술(김수미)의 차에 치여 기억을 잃고 대신 비상한 암기력을 얻는다. 복화술은 부모를 찾지 못한 강석을 장사 밑천으로 키울 요량으로 '진고개 신사'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후원한다. 그리고 강석은 복화술에게 받은 '이차돈'이란 새 이름으로 자신의 후원인의 뜻에 따라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검사시보로 검찰청에 입성해 지세광과 다시 만나게 된다.

ⓒSBS 제공 < 돈의 화신 > 캐릭터들. 왼쪽 맨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극중 이차돈, 지세광, 은비령, 이중만.

사건 중심의 빠른 전개

그저 그런 치정극과 기억 상실이 얽힌 복수극처럼 보이지만 여타 드라마라면 적어도 6회에서 8회가 나왔을 분량을 2회에 압축하고, 사이사이 법정극과 코미디까지 벌여놓는 이 드라마의 강점은 사건 중심의 전개다. < 돈의 화신 > 은 등장인물이 상당히 많고 이야기 갈래도 복잡한 편인데 각 캐릭터는 구구절절 속마음을 누설하는 대신, 행동하는 것으로 그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하게 한다.

사법연수원생이던 지세광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돌적인 검사의 겉모습을 한 채 권력 실세인 전 서울시장의 비자금 수사팀을 지휘하고, 극중 승진 코스라 불리는 인천지검 마약반으로 자리를 옮기며 이후에는 감찰부 부장검사로 승진한다. 검사 권재규는 부인의 사채 빚 때문에 지세광에게 매수된 이후에도 검찰 내부의 야인으로 승진에서 배제되다가, 부패한 실세를 쳐나가는 지세광 쪽의 활약과 함께 검찰총장 자리까지 오른다. 고호는 방송사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앵커가 되고, 지세광에게 버림받았던 은비령은 전 서울시장을 새 물주로 삼아 등장했다가 그를 수사하는 지세광과 다시 연합해 시장의 돈줄이던 황해신용금고의 지분을 사들인다.

이중만의 유산으로 매개된 그들이 흩어져서 세력을 키우고 다시 연합해서 일을 도모하게 되는 배경을 단지 금전적 이익 한 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다. 돈 외에도 인간 행동의 또 다른 변수가 되는 정념이나, 명예욕·출세욕 등 다양한 욕망이 개입해 가지를 뻗어간다. 각 캐릭터의 추동력은 결핍을 느끼고 간절하게 원하는 욕망에서 비롯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돈을 수단으로 삼는 과정에서 악의 행보가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돈이 가진 엄청난 능력에 개인의 결핍과 욕망이 만났을 때 필연적으로 악이 도출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대개의 사람들 역시 욕망 실현을 위해 살아가지만 공공의 이익과 안녕을 바탕으로 한 윤리나 법적 테두리 안에서 타인의 이목을 살피고 처벌을 피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 < 돈의 화신 > 은 사람이 이 테두리를 벗어나는 두 가지 경우를 짚어낸다. 죄 없는 이중만의 아내가 결국 남편 독살죄까지 시인하게 하도록 사법 절차를 악용했던 지세광은 수사하고, 공소하고, 구형하는 검사가 되었다. 이를테면, 저 테두리를 긋는 분필을 손에 쥐고 이용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포클레인 삽이 떠올린 흙 속에서 지폐가 흩날리자 인부들이 달려들어 돈을 움켜쥐던 얄궂은 장면에서 한 인부가 삽자루를 던지듯, 평범한 사람이 이성과 직분의 삽자루를 놓는 순간은 '지금 달려가 저것을 움켜쥐지 않으면 나만 손해' '나 혼자가 아니니 괜찮을 것'이라는 한 무리의 의식이 윤리와 자리를 바꿔치기하는 때다.

위의 두 가지 경우가 만나는 < 돈의 화신 > 의 중반부 무대는 검찰이다. 손에 분필을 쥔 자들과 권력과 재력의 '후원'을 받는 자들 사이에서 주인공인 검사 이차돈조차 서슴없이 삽자루를 놓았다. 시보 시절, 검사가 되면 '진고개 신사'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여러 사건에 겁 없이 돌진해 활약하던 이차돈은 '5년 후'가 지난 시점에는 온갖 곳에서 뒷돈을 받아먹는 '슈킨(出金·남의 돈을 중간에서 가로챈다는 의미의 속어)의 달인' 줄여서 '슈달'이 되어버렸다.

사채 이자로 계산된 후원금을 갚아 복화술 모녀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라지만, 그는 언젠가부터 돈을 모으는 것 자체에 순수한 즐거움을 느낀다. 이곳저곳에서 그의 비리에 대한 진정이 들어와도 이차돈은 허름한 집과 낡은 차, 고아원 후원으로 청렴한 검사를 위장한 채, 비밀창고에 아버지처럼 '돈의 성전'을 지어놓고 들킬 리 없다고 희희낙락해왔다.

자칫하면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위기에서 돈을 홀랑 태워버리고, 지세광이 지휘하는 내부 감찰로 검사직마저 위태로운 상황의 이차돈에게 어떤 길이 남아있을까? 기억을 되찾으면 과거의 지세광처럼 복수를 위해 돈을 이용할 것인가? 이차돈은 과연 돈을 이용해 저지른 일들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사슬을 끊어낼 수 있을까?

법을 손에 쥔 자와, 직분에 벗어나는 관행에 몸을 담은 자가 적대하는 흥미진진한 무대에서 좀처럼 눈을 돌릴 수가 없다.

유선주 (TV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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