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연재소설 ㅣ 소금] 어쩌면 시우는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도 몰랐다

2013. 2. 19.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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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20> 15장 귀가

5월에 나는 시우와 함께 남쪽 바다로 갔다.

자신이 출연한 연극공연이 끝난 것과 때맞추어 직장을 옮기기로 했다면서, 그사이 며칠 동안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시우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진도에서 '신비의 바닷길 축제'가 열린다는 것을 전해 듣고 우선 진도로 갔다. 조수간만의 차이에 의해 고군면 화동마을과 의신면 모도 사이에 한 시간 동안 생겨나는 바닷길을 보러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해 땅 위로 드러나 팔딱거리는 낙지를 줍고 시우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처음 바닷길을 걸었다는 전설의 주인공 뽕할머니 동상 앞에선 사진도 여러 장 찍었고 세방 낙조전망대에서는 황홀한 일몰 풍경을 보았다. "사람이 죽어 정한을 남기면 그것이 붉은 놀빛이 된대." 선명우에게 들은 이야기를 내가 했고, "슬프다." 시우는 놀을 바라보며 눈을 붉혔다.

여행의 마지막 하루는 보성에서 잤다.

보성엔 차(茶)를 기리는 '다향제'가 열리고 있었다. 낮엔 찻잎 따기 행사와 녹차쿠키 만들기 체험을 함께 한 다음 저녁엔 군불을 때 주는 소박한 민박집에서 묵었다. 민박집은 주막도 겸하고 있었다. "막걸리 한 잔 해야지!" 술안주로 우렁탕과 녹차김치, 벌교 꼬막이 올라왔다. 오랜 친구와 모처럼 마주앉은 기분이었다. 시우와 있으면 언제나 마음의 앉음자리가 편안했다. 일부러 꾸미지 않는 활달하고 정직한 그녀의 성격 때문일 터였다. 연거푸 막걸리를 마시다가 그녀의 잔이 계속 그대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물었다.

"막걸리 싫어? 다른 술 시킬까?"

"괜찮아. 좋아!"

그녀는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진도에서의 지난 이틀 밤에도 그녀가 거의 술을 하지 않았다는 데 비로소 생각이 미쳤다. 술이라면 나보다 그녀가 더 세고 또 좋아했다. "몸이 안 좋은 모양이네. 술을 안 하는 걸 보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저씨는 아저씨 속도로 마셔. 난 천천히 마실게." "모처럼 여행 와서,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러고 보면 그녀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담배는 끊었다고 했다. "혹시 언니 때문이야?" 그녀를 통해 들은 바에 따르면, 그녀의 작은언니 성우는 얼마 전에도 알코올 중독 클리닉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케이블 티브이의 쇼핑 프로그램에서 성우는 꽤 알려진 쇼호스트였다. 몇 차례 남자와의 혼담이 오고 갔지만 성사되진 못했다고 했고, 그때마다 그녀는 술로 마음을 달래면서 살아왔던가 보았다. 언니의 입원치료에 충격을 받아 그녀도 술을 끊을 생각인지 몰랐다. "끊을 거면 끊는다고 말을 하든가." 불만에 차서 내 목소리가 자연 볼통해졌다.

밤이 이슥해 방으로 들어와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창 너머에서 바람소리가 들렸다. 송림 사이로 부는 바람이었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코를 묻었고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키스를 하려는데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가가 젖어 있는 걸 나는 그제야 보았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울어?" 내가 물었고, 그녀가 눈가를 쓰윽 문지르면서 "울긴 왜 울어!" 했다. "언니 때문이야? 아니면 아버지?" 알코올 중독으로 입원한 성우 언니를 데리고 나올 때는 눈물이 한없이 나오더라고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큰언니와 소식이 끊어진 지 여러 해라 했으니, 그녀에겐 성우가 유일한 직계가족인 셈이었다. 곧 성우와 살림을 합칠 계획도 갖고 있었다. 얼마 전엔 죽산리 염전에도 갔었다고 고백했다. 호적에 나와 있는 선명우의 옛날 주소지를 차례로 찾아다니고 있는 눈치였다. "할아버지의 염전은 대하 양식장이 돼 있었더라고." 그녀는 말했다. 아버지를 영 포기할 수 없는 심사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선명우가 살아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박범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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