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삶](Ⅱ-1) 한강 - 다른 상상을 허하라

문훈 | 문훈건축발전소 소장 2013. 1. 11.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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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영화관, 교회, 점집, 화장터..동호대교 '욕망의 해방구'를 꿈꾸다

서울엔 강도 있고 산도 있다. 아무리 크고 높은 건물도 강과 산, 자연 앞에서는 초라해진다. 사람이 만든 건물이 자신의 허리를 파고들어도 자연은 의연하게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서울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강은 동서를 가로지르며 남과 북을 가른다. 한강의 광활함은 강남과 강북의 소득과 라이프 스타일, 그리고 도시 구조의 차이를 극명하게 강조한다. 한강에는 강남과 강북을 잇는 다리가 있다. 모두 서른 개에 가깝다. 모양과 형식 또한 각양각색이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다리는 단연 동호대교다. 멀리서 보면 하나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2개의 자동차용 다리와 1개의 트러스형 전철용 다리가 3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 3개의 다리다. 다리 끝 강북 쪽에는 옥수 전철역이 자리 잡고 있는 입체적인 다리이기도 하다.

바람 많고 흐린 날 한강 다리를 걸어 보시라. 한강은 차로 건널 때보다 훨씬 더 광활하다. 세찬 바람은 몸을 날릴 듯하고, 다리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자동차는 교통체증 때문에 엉금엉금 기고 전철은 오렌지색 트러스 사이를 굉음의 리듬을 울리며 지나간다. 발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 존재는 오로지 거대한 기계음과 탁 트인 한강 위에 내던져진다. 고독하면서도 기괴하고, 어쩌면 감동스럽기까지 한 경험이다.

붉은 동호대교는 현실을 측정하는 기준으로서 존재하는 한편 새로운 공간영역, 즉 24시간 열려있는 '서울 프리존'을 상징한다. 서울 프리존은 기존 도시에서 푸대접 받거나, 숨겨진 공간 프로그램들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을 제공한다. 다리 밑은 죽음에 대한 물리적·정신적 만족을 위한 공간들로 구성되고, 다리 위로 솟은 건축물은 삶의 환희를 축복하고,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 프리존은 삶과 죽음은 순환한다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다양한 충돌을 포용하는 비빔도시를 추구한다. 그림 | 문훈

한강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상상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1970년대 국산 영화에서 한강이 간혹 나왔지만, 한강과 한강 다리가 영화 배경으로 제대로 등장한 것은 봉준호 감독의 < 괴물 > 이다. 한강이 통쾌하면서도 온전하게 배경으로 활용된 것은 < 괴물 > 에 이르러서다.

■ 한강, 다른 상상의 배경

한강변에 올림픽대로가 생기고 고수부지라 명명된 넓은 수변 공간이 생긴 건 아마 새로운 독재가 시작되었을 무렵이리라. 서울에서 드물게 드넓은 공간이었던 고수부지는 밤이 되면 차를 몰고 온 아베크족의 밀애 장소로 각광받았다.

무언의 약속처럼 차간 거리는 일정함을 유지하고 있었고, 초짜들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실례를 범하곤 했다. 미국에 자동차, 그리고 드라이브인 극장과 모텔이 있었다면 서울에는 자동차, 고수부지, 한강풍경, 그리고 정체 모를 외래어인 아베크족이 있었다. 한강은 새로운 해방구였다.

해질 무렵, 고수부지에서 보이는 교각의 거대한 물성과 실루엣은 잔잔한 강물과 어우러져 또 다른 기운을 자아낸다. 오래전 오후 해질 무렵 고수부지를 걷는데 동호대교 교각 쪽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무언가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이건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는 순간일까, 해 지는 한강의 기운이 만들어낸 허상일까.

해가 진 뒤 고수부지에서 먼 풍경을 바라보면, 다양한 크기의 빨간 네온 십자가가 수없이 빛난다. 빨간 네온 십자가가 보이는 곳은 고수부지뿐 아니다. 이 특별한 수입 종교의 표식이 보이지 않는 서울 땅은 없다. 작은 빌딩 옥상에 첨탑을 만들고 빨간 십자가를 세움으로써 건물 전체가 교회로 변신한다. 이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으로, 철학관이라 불리는 점집, 또는 무당집들도 빼 놓을 수 없다. 솟대를 닮은 장대에 바람에 나부끼는 흰색과 적색 천. 문이 꼭 닫힌 채 어쩐지 으스스한 철학관에는 불안한 미래와 신경증을 달래거나 화병의 치료를 위한 보이지 않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성(聖)이 부흥하면서 속(俗)도 번성했다. 몇 해 전 오세훈 전 서울시장 덕에 새롭게 조명된 세운상가. 지금의 중년들이 중·고교 시절 불법으로 유통되던 미제 빨간 책과 포르노 동영상을 구할 수 있는 장소였다. 필로티 위에 세워진 새로운 콘크리트 인공 대지는 공중에서 새로운 고독의 광야를 만들어냈다. 이 광야는 터부시하거나 은밀한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장치이자 매체들이 숨겨져 있는 곳이기도 했다. 동시 상영 영화관도 있었다. 철 지난 해외영화 한 편에, 외설스러운 국산영화가 번갈아 상영되는 곳. 표 한 장으로 두 편, 아니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있는 허름한 영화관들은 도처에 있었다. 도시의 낙오자가 된 느낌, 탈선 아닌 탈선의 느낌을 주는 묘한 공간이기도 했다.

■ 변화무쌍한 욕망의 파노라마

서울은 오래전부터 국제화된 브랜드의 도시였다. 브랜드는 모든 분야에서 각축했다. 1980년대 어느 날 타코벨이라는 히스패닉계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갑자기 강남역 주변에 자리 잡았다. 세계를 제패한 맥도날드조차 온전히 자리 잡기 전이었다. 곧바로 던킨 도너츠와 웬디스도 경쟁에 뛰어들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은 KFC가 들어오기 전부터 동네 통닭집들의 애칭이었다. 던킨은 철수했다가 2000년대에 다시 들어왔고 타코벨과 웬디스는 사라졌다. 케니 로저스 치킨과 시나본도 수입된 뒤 머잖아 사라질 운명이었다.

이 땅은 사회적, 공간적, 그리고 심리적 변화의 폭과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곳이다. 필자는 1991~1993년 짧은 유학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 해외에서 경험한 문화 충격보다 한국의 변화에 더 놀랐다. 유학 가기 전에는 없던 노래방이 불과 몇 년 만에 전국을 휩쓸고 있는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미래 도시는 바로 서울이다!

노래방과 비디오방의 탄생 이후 삐삐 시대가 갑자기 도래했다. 한동안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놓인 커피숍이 대세인 듯했다. 그러다 시티폰이라는 과도기가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우리 모두 휴대폰을 손에 쥐게 된다. 그 사이 PC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한때 학생들에게 스타크래프트는 1980년대 이전 고교생의 < 수학의 정석 > 이나 < 성문 종합 영어 > 같은 필수품이 되었다.

눈이 따라잡기도 힘든 변화 속에서 빨리 바닥을 보여주어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친구가 많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 가파른 세상은 폭음 문화를 범람시켰다. 오래전의 기생 문화가 뒤틀린 채 음습한 도시의 지하에서 창궐했고 졸부들은 돈 자랑하기에 바빴다. 성형술의 발달로 넘쳐나게 된 미인들은 술 마시는 것만으로 손쉽게 돈 버는 것을 습득하며 쾌락에 빠져들었다. 일상 노동의 반복을 못 견뎌하면서 스폰서 문화와 룸살롱 문화의 주연 혹은 조연으로 가득 찬 도시. 아, 친구가 없으면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회. '닫힌 사회와 그 친구들'이 만들어내는 룸살롱과 폭음과 블랙아웃의 문화여!

주로 대학가에 러브호텔이 들어선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사랑을 갈구하는 젊은이들에게 사랑을 나눌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20세가 넘어도 가족과 동거해야 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에게는 이성과 나눌 만한 마땅한 보금자리가 없었다. 이들을 위해 세워진 러브호텔은 한자리에 모여 있기를 좋아했다. 옆집과 경쟁하며 러브호텔로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최신 시설과 트렌드를 따라잡는 것이 필수였다.

널브러지기 쉬운 온돌 문화에서, 모두가 널브러질 수 있는 찜질방이 나타난 것도 당연하다. 혼자 하면 두렵지만 여럿이 하면 용감해지고 뻔뻔해지며 부끄럽지 않다. 찜질방이란 대형 실내 공간이 나타나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옷을 벗고 널브러졌다. 이러다 머잖아 누드비치가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강에 서울 프리존(Seoul Free Zone)이 탄생하는 배경은 바로 이런 것이다. 원초적인 욕망을 가감 없이 따라가며 자고 나면 새로운 방이 생기고 눈이 핑핑 돌아가는 이 순간, 서울 프리존을 탄생시키는 에너지는 최고조가 될 수 있다.

■ 서울 프리존, 갇힌 욕망을 방면하라

건축은 원래 배타적이다. 땅에 대한 이야기,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한강 동호대교를 새로운 자연, 인공 자연으로 택한 후 빨간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본다. 서양인들의 그래피티 혹은 반달리즘이 아닌, 빨간 힘찬 변화의 에너지를 동호대교에 뿌려 본다. 그 행위만으로도, 한강 풍경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제 동호대교는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으로 바뀐다. 땅과 소유권 모두를 넘어서고 건축의 배타성 또한 가볍게 뛰어넘는다.

자, 여기서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35년 전의 강원도 산골로 가자. 산골 넓지 않은 길에는 상여 행렬이 지난다. 날라리 소리와 통곡, 인파의 웅성거림이 뒤섞인 죽음의 축제, 화려한 행렬. 이제 다시 시공을 뛰어넘어 인도의 바라나시로 가자. 붉게 타오르는 화장장의 불빛이 흔들리는 강물엔 채 타지 못한 시체가 부유한다. 조금 떨어진 강가에서는 벌거벗은 사람들이 신성한 강물에 몸을 담그며 감격하고, 옆에서는 일상의 때가 묻은 옷가지를 빨고 있는 아낙이 보인다.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성찬이다. 그로테스크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압도적인 하나됨의 느낌!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다. 하나의 연속체다.

다시 한강 동호대교, 바람을 맞으며 건넜던 다리에 걷기 알맞은 크기의 길을 만들어 강남에서 강북으로, 강북에서 강남으로 각각 보내자. 강북에서 오는 길은 옥수역에서 출발해 동호대교 교각에 의지하면서 강남 쪽으로 내닫고, 강남에서 출발하는 길은 고수부지에서 시작해 강북에서 오는 길과 만난다. 두 길이 만나는 곳에는 플라자가 형성된다. 그 플라자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화장터가 마련된다. 잊어버렸던 상여 퍼포먼스를 되살릴 수 있는 곳이다. 날라리와 통곡, 인파의 웅성거림이 함께하는, 그 화려한 죽음의 축제. 화장터에서 나온 에너지를 그 반대편에 솟구친 러브방, 사랑방, 노래방 등 온갖 방들이 집적된 타워에 공급한다. 삶의 절정에서 죽음의 축제를,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성찬을 한강에서 벌이는 것이다. 고공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구조물은 자살 체험 장소이자 삶의 환희를 느끼는 곳이다. 화장터 하부에는 필터링 시스템을 설치, 물에 뿌려지는 재를 정화해 강물의 오염을 막는다.

공간 내부에는 도시의 청춘들이 부유하는 나이트클럽을 배치하고, 자동차의 행렬이 빚어내는 조명 잔치를 즐긴다. 다시 교각에 의지한 도보교로 돌아오면 어느덧 도시 속에 숨겨져 있거나 감추어져 있던 기능들이 찬란하게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낸다. 24시간 운영되는 포르노 극장, 새로운 타입의 교회, 무당집, 그리고 편의점…. 찾는 사람은 누구나 주인이 되는 개방형 도시가 나타난다.

서울 프리존은 기존 도시에서 푸대접 받거나 숨겨진 공간들에, 떳떳하고 당당하게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을 제공한다. 다리 밑은 죽음에 대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공간들로, 다리 위는 삶의 환희를 축복하며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공간들로 가득하다. 서울 프리존은 삶과 죽음이 하나의 순환 과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다양한 충돌을 수용하며 조화로운 비빔도시를 추구한다. 이곳은 한눈으로 보는 서울의 현재이자 미래다. 미래 도시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Ⅰ. 도시는 살아 움직인다

Ⅱ. 건축 단면으로 보는 세상

1. 한강 - 다른 상상을 허하라

2. 모텔 - 그 익명의 보금자리

3. 찜질방 - 온돌이 광장으로 바뀌다

4. 룸살롱 - 욕망이 춤추는 지하도시

Ⅲ. 건축, 그 슬픈 단절

Ⅳ. 내가 꿈꾸는 집짓기

< 문훈 | 문훈건축발전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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