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훈]잃어버린 식민지

2012. 12. 27.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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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추울 땐 든든히 먹으라는 말이 있다. 의학적으로 타당하다.

따뜻한 음식은 몸 안에 들어가면 체온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몸속의 장기들은 음식을 소화시키면서 열을 발생시킨다. 다른 계절에는 이 열의 존재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하의 날씨가 되면 비로소 이 열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한다. 바로 이때 추위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원리가 올겨울엔 별로 통하지 않는 듯하다. 뜨끈뜨끈한 국물을 양껏 마셔도 여전히 추우니 말이다. 마음까지 꽁꽁 얼리는 강추위다.

유럽 국가들이 앞다퉈 신대륙으로 향하던 16세기 후반이었다. 당시 최고의 강대국은 스페인. 일찌감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무적함대를 앞세워 아메리카 대륙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런 스페인이 아주 못마땅했다. 제국으로 성장하려면 식민지 확보가 그 무엇보다 필요한 상황. 그러니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 행세를 하는 스페인이 싫을 수밖에.

여왕의 의중을 간파한 이가 있었다. 월터 롤리 경이었다. 그는 탐사대를 조직해 아메리카로 보냈다. 탐사대는 1584년 미국 땅에 도착했다. 메이플라워호가 미국에 도착하기 36년 전, 처음으로 영국인이 미국 땅을 밟은 것이다.

탐사대가 도착한 곳은 노스캐롤라이나 주 동부에 있는 '로어노크'란 섬이었다. 척박한 자연. 그래도 117명이 남아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처음엔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3년 뒤 아기까지 태어났다. 롤리 경은 필요한 물자를 공수하며 성공을 기원했다.

그러던 중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이 터졌다. 물자 보급선은 3년간 로어노크 섬에 가지 못했다. 보급선이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선원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정착촌의 잔해도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미국인들은 이곳을 '잃어버린 식민지(Lost Colony)'라고 부른다.

2년 전 9월 우연히 그곳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아직 한기가 느껴지는 계절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잡초만 무성한 '유적지'에는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당시 정착민들의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어쩌면 그 스산함의 정체는 상실감이었으리라.

혹시 지금 느끼는 '마음의 추위'가 이 상실감과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마음이 추우니 세상이 춥고, 마음이 시리니 세상이 시려 보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살이가 팍팍해 보이는 것도 내 마음 씀씀이가 미련해 그런 건 아닐까.

매년 이맘때면 송년회가 넘쳐난다. 매일 보는 동료들과, 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회포를 푸는 연례행사로 변질된 송년회. 그 자리에서 스스로를 진지하게 돌아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내 마음에 달린 자물쇠를 열어 안을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올 한 해 수고했다고 칭찬의 한마디를 건네야겠다. 내년에는 더 열심히 살라는 격려도 해 줘야겠다.

혹시 여러분도 추우신지. 든든히 배를 채워도 한기가 사라지지 않는지. 그렇다면 마음부터 추스르시길. 5일만 지나면 2012년이 저문다. 올 한 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우리 자신에게 훈장을 주자. '잃어버린 식민지'로 방치해두지 말자. 때로 '자기애(自己愛)'처럼 좋은 난로는 없다.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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