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에리 북유럽80일]24.5km 터널, 경이의 두더지들

【노르웨이=뉴시스】김에리의 '80일간의 북유럽 일주' < 38 >
올덴 관광안내소에 맡겨놓은 짐을 찾아 오후 4시5분 송달로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버스비 235크로네) 예전 노르웨이 여행기에서 보기만 했던 신기한 버스를 타보았다. 버스의 뒤쪽 반은 화물칸이고 앞쪽 반은 승객이 탈 수 있도록 좌석을 설치한 구조다. 승객은 달랑 나 하나, 그나마 앞좌석은 종이박스 소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물건 배송기능이 더 크다.
여기서는 직행이냐고 물어도 버스를 갈아타야하는 경우가 종종 생겨서 그러려니 해야한다는 걸 알았다. 직행이라고 해서 맘놓고 잠이 들었는데 불과 25분만에 Innvik에서 내리라고 하더니, 다른 버스로 나를 인계한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이 중년의 마음씨 좋은 곱슬머리 기사는 내가 갈아타야하는 버스의 운전기사에게 내 캐리어의 손잡이를 넘겨주며 내가 짐을 나르지 못하도록 막는다.
웃음만면의 중년 기사와 달리 깡마른 노기사는 안좋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본래 성품이 그러한지, 인종차별주의자인지, 내가 싫은게다. 그냥 개인차일 뿐이고 별 사람 다있다는걸 안다. 그래도 단 둘이 타고 가는 버스에서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싫어 너는 그러냐, 나는 할 말 다하련다 하고 그에게 계속 말을 시켰다.
새벽부터 빙하를 보러 등산을 하고 올덴에서도 계속 걸어다닌지라 피곤에 절어있었지만 한번 깬 탓에 다시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버스는 작은 마을 Byrkjelo에 오후 5시 도착, 20분간 정차한다. 화장실에 한번 다녀와야할 것 같은데 황당하게도 기사는 화장실이 없다고 딱 자른다. 보통 북유럽에서는 화장실이 달린 버스도 많건만, 이 버스에는 달려있지 않다.
버스정거장 인근에 위치한 작은 마을 도서관이 관광안내소를 겸하고 있다. 산뜻한 분위기의 금발 아가씨가 밝은 미소로 맞아준다. 사무실에 딸린 화장실도 사용하게 해주고 내가 가려는 곳을 물어보더니 꼼꼼히 관광안내책자를 다 챙겨준다. 버스기사가 듣든 말든 "화장실 찾아갔다가 친절한 레이디를 만났는데 그녀가 온갖 가이드 팸플릿을 주더라"며 영어 연습 겸 혼자 떠들며 시간을 즐겼다.
요 며칠 가는 곳마다 한국 아가씨들을 만나 외로움을 좀 덜었는데 다시 혼자 움직이려니 쓸쓸함이 더하다. 창밖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경만이 위로가 된다. 높은 산악지대인 듯 흰얼룩이 남아있는 산등성이가 가깝게 다가오더니, 한떼의 얼룩소들이 차도를 가로막기도 한다. 여태까지 내가 접해온 품종과 달리 짙은 갈색 얼룩이 선명한 소들이다. 여우비의 빗줄기 사이로 누렇게 푸른 풀숲지대가 이어진다. 양들이 뛰노는 전원 풍경이 평화로워 보인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버스가 정차하는 기척에 잠시 깼다. 차창 밖 보이는 것은 노르웨이 빙하박물관(Norsk Museum)이다. 1997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건축물이다. 피오르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배워볼 수 있고, 요스테달스브렌에 대한 20분짜리 멀티스크린 동영상이 뛰어나다는 가이드북 안내를 보고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오늘 묵기로 한 송달에서 버스로 35분 거리라 내일(7월13일) 다시 왔다가 다음 여행지인 프롬으로 되돌아 내려갈 계획이었는데, 지금같은 컨디션으로는 내일 다시 오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항상 그렇듯 버스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다보니 무언가는 포기해야하는 상황이 꼭 온다.
오후 6시40분께 예정대로 송달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강행군 끝에 체력이 고갈된 것이 몸의 증상으로 느껴지던 차였다. 할아버지 운전사에게 송달 호스텔의 위치를 물어보니 저쪽 왼쪽으로 가면 돼 하고 쫓아내기라도 하듯 손짓을 하는데 나는 그냥 밀려나듯 무거운 짐들을 끌고 걷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야할 거리냐고 물어보고 택시를 탈까했지만 마땅히 물어볼 사람도 안보여서 그냥 이번엔 한번 걸어보자 했다. 너무너무 힘이 들어 불쌍한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 좀 차 좀 태워줬음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뜨문뜨문 만나는 현지인들에게 송달 호스텔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어봤더니 10분, 15분, 20분 말하는 사람마다 시간이 늘어난다. 수십㎏에 달하는 짐을 가지고 걷기에는 보통 거리가 아니다. 게다가 노트북컴퓨터 등을 챙겨 넣은 배낭의 한쪽 끈이 뚝하고 끊어진다. 손잡이가 있어 끌 수도 있는 배낭인데, 끌고 다니다가 끈을 잘 단속 못해 삐져나와 땅바닥에 끌리면서 마찰로 인해 닳았음이 분명하다.
◇갤러리에서 만난 노르웨이 언론인
송달은 다른 관광지로 가는 거점지로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섬 같은 반도다. 피오르드 지형이 만든, 길게 쭉 찢어진 호수처럼 보이는 바다를 바로 접하고 있어 경치가 무척 좋다. 이곳 유스호스텔 역시 학교 기숙사를 여름동안만 사용하는 곳이다. 어찌저찌 입구까지 도착해 대문 곁에 짐을 내팽겨 치고 리셉션이 있는 건물을 찾아 체크인을 했는데 숙소까지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한참 올라가야하고 역시나 도와줄 사람은 없단다.
이젠 정신을 잃을 지경. 짐을 끌고 방을 찾았는데 2층으로 올라가려면 작은 나선형 계단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공간활용이나 인테리어로서는 멋졌으나 이렇게 굽어져있는 좁은 계단으로 24인치 캐리어를 끌고 오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방은 낡은 침대와 책상 하나로 꽉 차는 작은 1인실이다. 작지만 외부쪽 벽 상반에 창이 나있고 옷장과 세면대까지 갖춰져있는 분위기 있는 방이다. 정신력으로 여기까지 버텼다 싶다. 짐을 겨우 끌어올리고는 세수도 못하고 옷도 벗지 못한 채 그냥 쓰러져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다음날(7월13일) 아침 일어나보니 지우지 못한 화장독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얼굴은 퉁퉁 부어올라있다. 먹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는데 그래도 자고 일어나면 어느정도 몸이 회복되는게 다행이다. 오늘 플롬으로 내려가기 전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 빙하박물관에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이런 컨디션으로는 어림도 없다. 바로 플롬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빙하지대를 지나왔으니 더 이상 방한용 옷은 필요없으리라 생각돼, 찢어진 청바지와 내복 등 옷들을 버려 짐을 줄였다. 끊어진 배낭끈을 쇼핑백 손잡이를 덧대 꿰매 다시 여행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플롬행 버스는 호스텔 앞 도로를 바로 지나가며 선다. 11시35분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37분께 이 앞을 지나간다고 리셉션의 여직원이 친절히 알려줬다. 어제 숙소로 올라오다가 이 학교 입구에 있는 살구빛으로 칠해진 예쁜 집의 용도가 궁금했었는데, 체크아웃을 하고 지나다 보니 갤러리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있다. 뒷문으로 들어가 기웃거리고 있으니 금발의 중년 여인이 나와 앞쪽으로 들어오라고 안내를 한다. 도로 건너 버스정류장에 짐을 부려놓고 앞문으로 들어갔다. 정면으로 호수같은 검푸른 바다와 진푸른 나무로 빽빽한 겹겹한 둥근 산등성이들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경 좋은 위치다. 1층은 갤러리, 2층은 사무실로 쓰고 있고 3층은 이 학교 직원들이 사용하는 곳이란다.
Oddrun Midtbø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재능이 무척 많은 사람이다.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로도 일하고 있다고 해서 나도 저널리스트라고 하니, 그쪽에서도 내 사진을 찍으며 무척 반가워한다. 작품 사진들을 좀 찍어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한국에도 고객이 생길 줄 아느냐며 적극적으로 응해준다. 역시 언론에서 일하는지라 언론의 이용방법을 잘 알고 개방적이고, 기자답게 낯선 이와도 금방 친해질 줄 안다. 버스를 타야해 10여분나 될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직업적으로도 동질감을 느끼며 양질의 대화를 나눴다.
갤러리에 전시된 것은 전부 그의 작품은 아니라는데 이렇게 좋은 위치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는 그가 무척 부러웠다. 그는 내가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품평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가 무척이나 진지해서 한마디 안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한 여성이 서서 고개를 쳐들고 앉아있는 남성의 입에 주전자로 바로 붉은 음료수를 따르는 일러스트에는 스칸디나비아인의 실용성을 보여준다고 평해줬다. 빙하를 그린 유화도 여러 점 있었는데 전날 빙하 인근 올덴 마을에서 느낀 점을 얘기하며 "노르웨이인들의 색의 조화를 아는 민족"이라고 했더니 무척 좋아한다.
나중에 그와 페이스북 친구가 됐는데, 22년째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장성한 자녀를 둔 이다. 프로필을 보니 송달에서 교육받고 일하며 쭉 살았는데 고교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적이 있다. 저널리스트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외국인에게 친절했는지도. 이런 작은 교류들이 모여 양국민들의 호감도가 상승하는 기폭제가 되리라 기대해본다.
◇24.5㎞ 세계최장 도로터널
플롬행 버스를 놓치지 않고 올랐다.(운임 170크로네) 오후 1시10분이면 도착한다. 계속해서 베르겐까지 내려가는 이 버스는 와이파이도 아주 잘 터진다. 아쉬운 것은 버스기사가 노르웨이어로만 안내를 한다는 것. 한참을 얘기하는데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도중에 15분간 페리도 타는데 이젠 노르웨이 피오르드 지형에서 버스를 타면 페리 한 두번 정도는 태워준다는 걸 꿰게 돼 놀랄 일도 아니다. 이 지역 버스시간표에는 친절하게 페리마크까지 인쇄해놨다. 게다가 세계에서 도로 위 터널로는 최장이라는(해저, 철도 터널 제외) 라르달 터널도 지나간다. 하바켄 역에 잠시 정차했다가 바로 터널로 이어지고, 중간에 아울란드 지자체로 들어간다는 표지판이 나오는데 터널을 나오자마다 또 버스역이다. 두 역 사이 24.5㎞ 길이를 20여분을 달리나보다. 노르웨이에는 터널이 2500여개가 된다고 하고 6~7㎞정도의 터널은 흔하게 지나 이젠 별 감흥이 없는데, 한번 들어가니 이건 끝이 없을 것 같다. 중간 서너군데 푸른빛의 전등을 밝게 켜놓은 곳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어둠침침하다. 암석표면을 그대로 살려놓은 것도 신기하다.
이 험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발전한 노르웨이의 기술력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굴 파고 다리 놓는 데는 정말 도가 튼 듯하다. 국내 한 자동차 광고에도 나왔던 바다 위 8개의 섬을 이은 아틀란틱 로드도 노르웨이에 있다. 몹시 파도가 몰아치는 가운데 심한 커브가 있는 유선형 다리를 달리는 SUV를 촬영한 CF를 기억들 할 것이다.
플롬에 내리니 관광객들로 북적북적하다. 노르웨이 제1의 도시 오슬로, 2의 도시 베르겐에서 가깝고 대표적 관광상품인 '노르웨이 인어넛셀'이라는 피오르드 핵심 코스이기도 해 동양인 관광객들도 많이 보인다.
플롬은 아울란드 피오르드의 안쪽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피오르드라는 204㎞ 길이, 1308m 깊이의 송네 피오르드의 지류가 흐르는 곳이다. 거의 수직으로 보일 듯 깎아지른 듯한 암석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작고 예쁜 동네다. 바다에 접해 얼마되지 않은 평지위 몇 걸음안에 페리 항구와 버스역, 기차역이 다 모여있고, 기념품점과 팩토리아웃렛, 카페, 퍼브 등 장난감집 처럼 예쁘게 지어놓은 가게들이 빼곡이 들어차있다. 가격이 비싼 것이 흠이지 노르웨이 전설의 트롤인형, 전통복장을 입힌 인형이나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용 각종 요정과 산타 인형들은 예쁜 가게 안에서 더 예쁘게들 보인다.
관광안내소로 찾아가 "난 이미 노르웨이 여기저기서 배타고 기차타고 걷고 다해서 좀 지쳤어. 이곳에서 하이킹 빼고 뭘 하는게 좋으냐"고 하니, 똘똘이 스머프같은 귀여운 인상의 여인이 "절대 하이킹이 아니라 워킹(걷는 것)에 불과하다"며 무려 10단계로 잘 만들어진 코스가 그려진 지도를 내민다. 30~45분 사이에 마칠 수 있는 1단계부터 3~4시간을 잡아야하는 10단계까지 있다. 동양인들이 많은 만큼 중국어와 일본어가 프린트된 지도도 있다.
좀 걷다가 뒤쪽에 피오르드 필름을 틀어주는 작은 극장과 오래된 기차를 연결해놓은 카페를 발견해 샌드위치를 하나 시켜먹었다. 노르웨이 유일의 기차식당이라고 광고해놨는데 제법 낭만적이다. 나는 옛날 기차객실을 식당과 이어놓은 곳으로 들어가 앉았는데, 기분은 그럴 듯한데 창문이 열리지 않아 환기가 잘 되지 않아 찌든 나무 냄새가 그대로 나는 것이 흠이다.
이곳은 뮈르달로 왕복하는 산악열차(플롬스바나)가 무척 인기다. 거의 수직으로 보이는 산등성이를 그대로 타고 오르는 것이 훤히 보인다. 6월10일~9월23일에 오전 8시35분부터 오후 7시45분까지 거의 매시간대 플롬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있다. 20㎞정도 떨어진 뮈르달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1시간. 뮈르달에서 10여분간 머무른 후 다시 거슬러 내려올 수 있다.
그 유명하다는 관광철도를, 이상하게 타고 싶지가 않다. 그동안 너무 많은 탈 것으로 멀미가 날 정도가 됐기 때문인가 보다. 동행이 없다는 것이 이럴 땐 편하다.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역사를 개조한 플롬스바나 박물관을 보러 들어갔다. 기념품점을 겸하고 있는 목조 건물로 격자무늬 창틀로 된 너른 창이 인상적이다. 입장료는 따로 받지 않는다. 박물관은 언제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19세기말~20세기 초 시작된 이 지역 개발에 발맞춰 수많은 노르웨이인 인부들의 노고가 스며들어있음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다. 이 지역에 처음 학교가 설립된 시절의 사진과 흔적들, 우체국이 생기면서 집배원이 타고 다니던 나무 스키도 인상적이다. 플롬스바나 철도는 1923년 건설이 시작돼 20여년간의 난공사 끝에 1940년 개통됐는데 당시에는 말들이 건설자재 운송수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노르웨이인들이 험난한 자연환경을 최고의 관광코스로 만들어냈음을 증거한다. 과거 이 철도를 다니던 실물 기차와 모형, 사진들이 꼼꼼히 전시돼있어 볼 만하다.
방명록에 사인을 하다가 목에 걸고 있던 스마트폰에 한시간여전쯤 들어온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수년간 병원에서 의식을 잃고 있던 가까운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다. 먼 나라를 취재하겠다고 모두 세팅을 해놓은 상태에서 지금 여행을 그만두고 돌아갈 처지가 안된다. 이런 예감 때문에 더 흥이 안났던 것일까.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어 맡겨놨던 짐을 찾아 숙소로 향했다. 마을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리를 하나 건너 위치하고 있다. < 7월12~13일 송달→프롬 >
대중문화평론가 EriKim02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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