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기행]헬레니즘 문화의 꽃 아그리젠토

2012. 10. 1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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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마주하는 섬의 남부 끝자락, 지중해를 향해 낮은 구릉에 자리한 고대 그리스의 도시 아그리젠토. 그리스 본토를 제외하고는 최대 규모의 헬레니즘 유적지다.

비토리아 지역 포도원 풍경. 포도나무 뒤 현란한 유도화 꽃이 뜨거운 지중해 날씨를 잘 보여준다.

시칠리아의 와이너리 여행은 다양한 유적과 문화적 유산, 독특한 자연을 맞이하게 된다. 섬의 내륙을 달리다 보면 이곳이 지중해상에 떠 있는 섬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대륙으로 착각하게 한다. 광활한 대지와 산악, 어디에서나 풍부한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시칠리아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지중해 연안의 고대 헬레니즘의 도시

기원전 8세기에 건설된 주도 팔레르모 시는 인구가 70만명에 육박할 만큼 이탈리아에서도 비교적 큰 도시이다. 페니키아, 로마, 비잔틴, 아랍의 지배를 받아왔다. 11세기 정복자 노르만에 의해 성립된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로 가장 번영을 이루었던 곳이다. 아랍 풍과 노르만 건축양식 등 다양한 문화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다. 팔레르모 시내에서 남서쪽 약 8㎞ 구릉을 향해 달리다 보면 몬레알레(Monreale)라는 아름다운 수도원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수도원의 대성당은 비잔틴, 아랍, 노르만의 건축양식을 한 건물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섬세하고도 화려한 황금빛 모자이크 장식이 당시의 영광을 떠오르게 한다.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에 있는 콘코르디아 신전. 앞에 누워 있는 청동상이 날개 꺾인 이카루스다.

팔레르모 근교는 와인산업보다는 경공업이 발달해 있다. 그리고 농수산물의 수출항과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섬의 남쪽지역보다 비교적 온화한 기후와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팔레르모 남동쪽 15㎞ 지점에는 1824년 설립된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와이너리 두카 디살라파루타(Duca di Salaparuta)가 위치해 있다. 토착품종 인졸리아(Inzolia)에 카타라토(Cataratto)와 그레카니코(Grecanico) 품종을 배합하여 만든 코르보(Corvo)란 브랜드의 화이트 와인이 유명하다. 가볍지만 상큼하며 캐주얼한 음식에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다. 필자가 팔레르모에서 점심시간에 마신 100% 인졸리아는 미네랄, 레몬향과 함께 적절한 산도가 있어 현지 생선요리와 잘 어울렸다. 가격 면에서도 1병당 10~15유로로 품질 대비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와이너리 여행 때마다 바라는 소박한 꿈은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가격으로 양질의 와인을 실컷 마실 수 있는 날이 오는 것이다.

몬레알레를 뒤로 하고 시칠리아의 내륙을 관통하는 SS121, SS189번 도로를 따라 아그리젠토(Agrigento) 시까지 150㎞를 달렸다. 아그리젠토 시는 남쪽 지중해 연안의 고대 헬레니즘의 도시, 신전의 계곡(the Valley of the Temples)이 있다. 이곳으로 가는 도로는 고속도로지만 대부분 산악지역을 통과하는 2차선 도로로 2시간 이상을 달려야 한다. 보통 유료 고속도로인 아우토스트라다(노선번호 앞에 A가 붙음)를 제외한 무료 고속도로인 수퍼스트라다(노선번호 앞에 SS가 붙음)는 굴곡이 심하고 도로 폭이 좁아 위험하다.

그리스 황금시대에 건설된 10개의 신전

시칠리아 여름철, 내륙 산악지방의 풍경은 갈색으로 물든 목초지와 푸른 초목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그로테스크한 이국적 풍경이다. 하지만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을 보면 왠지 고향 같은 친밀감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영화 < 대부 1 > 에서 젊은 알 파치노가 뉴욕을 떠나 잠시 고향에서 도피생활할 때의 바로 그 풍경이다.

양떼들의 이동 모습. 시칠리아는 목축업도 발달돼 있다.

아프리카를 마주하는 섬의 남부 끝자락, 지중해를 향해 낮은 구릉에 자리한 고대 그리스의 도시 아그리젠토. 그리스 본토를 제외하고는 최대 규모의 헬레니즘 유적지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대부분 기원전 5∼6세기 그리스의 황금시대에 건설된 이곳에선 헤라의 신전을 포함해 10개의 신전과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웅장한 34개의 도리아 식 열주와 대부분 지붕이 붕괴되었지만 잘 보존되어 있는 콘코르디아(Concordia) 신전을 보노라면, 인구 30만명을 넘은 전성기 아그리젠토의 영광과 부를 느낄 수 있다. 여름밤 신전을 비추는 조명은 또 다른 신비감을 연출한다.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 도시" 시라쿠사

유적지의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헤라신전의 언덕에 서면 장엄하게 펼쳐진 코발트색 지중해 너머 금방이라도 하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제국의 함대가 파도처럼 밀려올 것 같다. 실제로 시라쿠사, 젤라와 연합하여 BC480년에 카르타고 군을 격파하였으나, BC406년 전투에서는 카르타고에 패배한다. 이후 1,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제국의 속국이 된 이래 아그리젠토는 찬란한 헬리니즘 문화를 신전의 계곡에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시칠리아 남동쪽 끝에 있는 자매 도시국가, 시라쿠사가 위대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고향이라면, 아그리젠토는 만물의 기원이 흙, 공기, 불, 물이라는 4원소설을 주장한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의 고향이다. 콘코르디아 신전 앞에 날개가 꺾인 채로 추락해 있는 이카루스의 청동상을 보고 있자니 새삼 부질없는 인간의 탐욕과 야망을 경고하는 그리스 신화 속의 시간으로 잠시 빠져들게 되었다. 이 그리스 신화 속의 장소가 바로 아그리젠토다. 193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극작가 루이지 피란델로(Luige Pirandello)도 이곳 아그리젠토 출신이다. 아마도 그리스와 로마의 풍부한 문화적 유산은 전설과 역사적인 인물을 배출하는 토양이 되지 않았을까?

아볼라시 해변 유적지에서 한가로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노인들.

아그리젠토 근교의 와인산업은 아프리카에서 불어온 열풍과 높은 온도로 인해 질 좋은 와인보다는 식용포도 생산으로 유명하다. 다만 해발 500~700m에 위치한 나로(Naro) 평원을 중심으로 탄산석회 토질과 선선한 기후로 인해 람브루스코(Lambrusco), 바르베라(Barbera), 네로다볼라(Nero d'Avola)로 양질의 드라이 레드 와인을, 트레비아노(Trebbiano), 인졸라(Inzolia) 등으로 신선하고 맛좋은 화이트 와인을 생산한다.

아그리젠토에서 시라쿠사까지의 여행은 시칠리아의 다양한 풍광들을 볼 수 있는 긴 여정이다. 시라쿠사를 가는 데는 시칠리아의 고산지대 와인 생산지역인 엔나(Enna)를 경유하는 길이 있지만, 필자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젤라(Gela)시와 주요 와인 생산지인 비토리아(Vittoria), 라구사(Ragusa), 노토(Noto), 아볼라(Avola)를 경유하는 남쪽 해안선 길을 택했다. 메마른 평원과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비토리아, 아카테(Acate) 지역은 네로 다볼라와 프라프토(Frappato) 품종을 배합하여 체라수올로 디 비토리아(Cerasuolo di Vittoria)라는 최고등급의 레드와인을 생산한다.

비토리아에서 동쪽 약 80㎞ 지점, 노토(Noto)는 스위트 와인인 모스카토 디 노토(Moscato di Noto) 생산지로 유명하다. 노토 근교의 포도밭은 한낮에 38도를 웃도는 높은 온도로 사진을 찍는 동안에 피부가 타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햇빛이 작렬하였다. 황혼녘 건너편 언덕에서 바라본 황토색의 노토마을은 한 폭의 유화처럼 유난히 강렬하게 느껴졌다. 노토와 시라쿠사 사이에 인접해 있는 아볼라 시는 토착 포도품종 네로다볼라의 원산지로 유명하다. 네로다볼라는 뜨거운 날씨에도 산도가 강하고 과일향이 풍부하며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이다. 다만 타닌이 적어 다른 품종과 배합하여 레드와인을 생산하지만, 단일품종으로도 최고 품질의 와인을 만드는 진정한 시칠리아의 대표 와인이라 할 수 있다.

아볼라 시에서 필자는 도시 자체에서 풍기는 묘한 매력에 빠져들었다. 대지진 이후 중세에 건설된 아름다운 해변도시는 방사상으로 뻗어 있는 도로의 끝에 항상 아름다운 지중해가 나타나게 설계돼 있다. 해수욕을 즐기는 가족들, 폐허가 된 유적지에서 한가로이 카드놀이를 즐기는 노인들, 해변의 고깃배들. 좀 더 머물고 싶은 참으로 평화로운 도시였다.

글·사진|송점종 < 우리자산관리 대표 > j-j-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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