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백광현, 원전에서 찾아봤더니..고전번역원

유상우 2012. 10. 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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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유상우 기자 = MBC TV 특별기획드라마 '마의'(馬醫) 제2회가 시청률 9.7%를 찍었다. 시청률조사회사 AGB닐슨미디어리서치는 '마의'가 첫회 8.7%에서 1%포인트 오른 것으로 집계했다.

'마의'는 천민의 신분으로 말을 고치는 동물의사에서 임금을 치료하는 어의가 된 실존인물 백광현의 삶을 다룬 한방 의학드라마다.

한국고전번역원이 번역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한국문집총간 등 고전에는 백광현 관련 기록이 있다.

한국문집총간 '완암집(浣巖集)' 4권의 '백태의전(白太醫傳)'은 "본디 말을 잘 치료하였다. 오직 침을 써서 치료하였는데 서책(의서)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익히다 보니 솜씨가 숙련된 것이다. 말 치료하던 침술을 종창(腫瘡)을 앓는 사람에게 써봤더니 종종 탁월한 효험이 있기에 마침내 사람을 치료하는 데 전적으로 힘쓰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말을 치료하다가 인술을 펼치게 됐다는 드라마 '마의'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한국문집총간 '귀록집(歸鹿集)' 14권의 '백지사묘표(白知事墓表)'에는 "젊은 시절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우림군(羽林軍)에 배치되는데, 말에서 떨어져 다친 뒤 한동안 앓은 것을 계기로 의술에 뜻을 두게 되었다. 매번 사장(射場; 활터·활쏘기 연습장)에 나와서 쉴 때마다 주머니에서 침을 꺼내 가니, 함께 활쏘기하던 자들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너,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구나?'라고 하자 백광현이 답하기를 '너희, 앞으로 나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고 적혀 있어 마의보다는 군병으로서 의술을 익혔다는 데 무게 중심이 쏠려 있다.

백광현의 의술과 관련, '백태의전(白太醫傳)'은 "무릇 독소가 강하고 뿌리가 배긴 정저(疔疽)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처방에는 치료법이 없었다. 그런데 백광현은 앓는 자를 만나면 반드시 대침(大鍼)을 써서 터트리고 찢어 독소를 빼내고 뿌리를 뽑음으로써 거의 죽어가던 자를 능히 살려냈다"고 전한다.

'백지사묘표'는 "시장에 발을 절뚝거리는 병을 앓는 자가 있었는데 백광현을 따라다니며 치료해 주기를 부탁하자 백광현이 그를 치료해 주었다. 어느 날 절뚝거리던 자가 제대로 걸으며 시장에 들어서자 온 시장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며 백광현이 '신의(神醫)'로 불리게 된 과정을 언급한다.

승정원일기 숙종 16년 1월14일 기사를 보면, 숙종이 침의(針醫; 침술로 병을 다스리는 의원)와 여의(女醫)의 기술이 점점 옛날만 못해지고 있다고 하면서 "오늘날 침의 중에 하침(下針: 침놓기)과 파종(破腫; 종기 제거)에서 백광현이 으뜸이다"고 말한다.

백광현은 명성이 자자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어의의 신분 상승을 하게 된다. '백지사묘표'는 "백헌 이상국(이경석 1595~1671)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게 됐으니, 이때가 현종 4년"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백태의전'은 "숙종 초에 어의에 선임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백광현은 30여 년 동안 현종과 숙종 두 조정을 대대로 섬기면서 여러 차례 신효(神效)의 공을 인정받았다. 그때마다 품계가 더해져 의성 허준과 같은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다.

백광현이 숨지자 그의 죽음을 애도해 궁에서는 특별한 예우가 있었다. "병으로 죽음이 임박했을 때 상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간간이 약물과 황감(黃柑; 귤)을 하사했으며, 내전에서도 진찬(珍饌: 맛있고 건강에 좋은 음식)와 타락죽(駝酪粥: 미음에 우유를 넣어 만든 죽)을 하사했다. 군의 부음이 들리자 양전(兩殿; 대전과 내전)이 각각 부의를 후히 내렸으니, 또한 특별한 예우였다"고 '백지사묘표'는 밝히고 있다.

백광현이 숨진 해는 '백지사묘표'에 숙종 23년이라고 돼 있다. 승정원일기를 검색하면 역시 숙종 22년까지 의관으로 입시한 기록이 보인다. 그해 12월21일에 숙종이 편찮을 때 수고한 약방의 도제조 이하 관원과 의관 등에 시상한 내역의 기사에 침의의 한 명으로 백광현이 나온다. 이를 통해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내의원 침의 신분인 어의로서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백광현의 이름 중 마지막 '현' 자에 대해서도 다르게 쓰고 있다. MBC는 '빛날 현(炫)'을 쓴다. 이 '현'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4건, 승정원일기에서는 149건이 검색됐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3건이 '옥돌 현(玹)'·1건이 '빛날 현(炫)', 승정원일기에서는 79건이 '옥돌 현(玹)'·36건이 '빛날 현(炫)'·31건은 '솥귀 현(鉉)'을 썼다. 드물게 '드러날 현(顯)'과 '어질 현(賢 )'도 각각 2건씩 검색됐다.

한국문집총간 '귀록집(歸鹿集)'14권의 '백지사묘표'에는 '옥돌 현(玹)', 한국문집총간 '완암집(浣巖集)' 4권의 '백태의전'에는 '빛날 현(炫)'으로 나온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솥귀 현(鉉)', 두산백과는 '빛날 현(炫)'으로 백광현의 이름을 적고 있다.

백광현의 한자 기록이 서로 다르게 나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신분상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10년 5월 2일 기사에 백광현을 두고 "미천한 출신이고 글자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승정원일기 숙종 10년 5월 5일 사헌부 계사에는 백광현을 두고 "천류(賤類) 출신"이라고 적었다.

출신이 미천한데다 백광현이 의과(醫科) 합격을 통해 내의원 의관이 되는 정식 코스를 밟은 게 아니니, 그의 신상이나 가계 내력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당대에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승정원일기의 검색 빈도수나 1차 사료인 승정원일기보다 인명 기록의 정확성이 높은 조선왕조실록의 검색 결과도 그렇다.

'백지사묘표'는 백광현이 어의로 명성을 날린 뒤의 사후 기록인데다 '묘표'는 선인의 행적의 사실성을 중시하는 묘도문자(墓道文字)의 일종인 점 등을 고려하면, 백광현의 이름 중 '현' 자는 100%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옥돌 현(玹)'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백광현의 생몰년에 대해서도 백과사전이나 인터넷 검색 사이트마다 제각각이다. '백지사묘표'에는 '1625년(을축년 인조3)에 태어나 1697년(정축년 숙종 23)에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백광현 후손은 백광현만큼은 아니었지만, 제자와 아들, 조카, 손자까지 대대로 침술과 치종(治腫)에 뛰어났다는 사실을 승정원일기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swryu@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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