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원의 서울 戀歌>카페 '가을 ''하늘'서 기타치며 노래 저마다 광란의 춤 '진짜 난리블루스'

기자 2012. 8. 3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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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광화문

오성식이란 중학 때부터 친구가 있다. 생활영어로 유명하다. 면목중 동창인 우린 청량리 시조사란 종교단체의 선교사에게서 영어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난 불과 며칠 만에 그만뒀다. 따분하고 어려워 금세 싫증을 낸 것이다. 그러나 오성식은 그곳에서 꾸준히 회화 실력을 쌓았고 순전히 자기 힘만으로 영어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중학생으론 놀라운 열정이다. 각종 영어 웅변대회를 석권했던 건 당연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인 외엔 영어권 외국인과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광화문·덕수궁 근처나 가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태원에 가서 외출나온 미군을 만나야 했다.

주말마다 중학생 오성식은 광화문 네거리에 서서 코큰 사람만 보면 무조건 쫓아가 단 몇마디라도 말을 건네며 악착같이 영어를 배웠다. 그때 내 역할은 조수였다. 당시 우리 집엔 '한국의 여행'이란 중앙서관에서 나온 두꺼운 전집이 있었는데 그걸 몇권 갖고 나와 내가 들고 서있으면 성식이가 길에 선 채로 외국인에게 책을 펼치며 한국의 여기 저기를 설명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한 추억이다.

한 번은 추운 겨울날 광화문에서 젊은 백인남자에게 성식이가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귀찮기도 한 표정이지만 그 백인은 차마 거절을 못해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졸졸 쫓아가며 계속 영어로 말을 건넸다. 물론 나는 항상 단 한마디도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무거운 책만 안은 채 성식이를 수행했다. 백인남자가 도착한 곳은 광화문 뒷골목의 작은 여인숙. 방 안까지 우린 따라 들어갔다. 아주 작은 온돌방이었는데 젊은 한국여자가 방 안에 있었다. 이불이 깔려 있었고 그녀는 그안에 누워 있었다. 여자는 간단한 영어만 조금 했다. 남자는 방에 들어가자 윗옷만 벗고는 역시 이불 속에 들어가 여자와 찰싹 붙으며 나란히 눕는 것이다. 남는 공간은 거의 없는 방이었다. 우리 둘은 방 한편에 비집고 앉아서 나란히 누워있는 남녀를 빤히 쳐다보며 나는 지시하는 대로 책을 펼치고 성식이는 열심히 영어로 설명하고 그 남자는 마지못해 대답하는 웃지 못할 장면이었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프랑스인. 그땐 남녀가 그렇게 누워 있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숙맥이었으니…. 나의 광화문에 관한 추억은 그게 시작이다. 40년이나 지난 매우 오래 전 일인데도 이상하게 그 남녀의 얼굴모습이 어느 정도는 생각나고 방 안 풍경은 아주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1976년 8월2일 광화문 대성학원 앞 당주동의 서울미술학원에서 생애 처음으로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았다. 대광고교 1학년 때였다. 목탄으로 각면 예수상과 아그리파 석고 데생을 했고 며칠 후인 8월14일부터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군자였다. 어렵기도 했지만 너무 재밌어 데생이나 학과 공부는 거의 안 하고 온통 수묵화 그리기에 열중했다. 사군자와 화조화를 수련하다가 그해 겨울방학에 드디어 산수화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안 될 수가. 해도 해도 그림이 안 되는 것이다. 지도하는 정종해 선생님도 안타까워하셨다.

또 하필 그때 나는 집안 내력인 비염이 심해 안국동 정이비인후과에서 코 속의 뼈 몇개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고는 며칠 입원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출혈도 많았다. 굉장히 아픈 수술을 마친 후 입원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천장이 아른거리며 온통 산수화로 보였다. 미칠 정도로 그리고 싶었다. 조금만 더 그려보면 어떤 실마리가 풀릴 것 같았다. 견디다 못해 밤중에 몰래 병원을 빠져나와 멀지않은 광화문 화실로 걸어가 밤새도록 그림을 그렸다. 한 장, 두 장, 세 장…. 한참을 그리고 있는데 뭔가 뜨끈한 액체가 코에서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 피가 마구 쏟아지는 것이었다. 겨우 지혈을 하고는 또 그렸다. 통행금지가 풀린 다음 엉망진창이 된 몸을 이끌고 병원 침대로 돌아왔다.

언젠가는 화실에서 밤새 그림을 그리는데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팠다. 창밖을 보니 저 멀리 새문안교회 쪽에 불빛이 보였다. 거기 가서 먹을 것을 얻으려 화실 밖을 나가자마자 방범에게 통행금지 위반으로 걸렸다. 화실 관리인이신 황명학 아저씨가 사정을 해 겨우 파출소 신세는 면한 적이 있었다. '미쳐야 미친다. 不狂不及' 참 좋았던 시절이다.

서울미술학원엔 김원배 선생님이란 데생 선생님이 계셨다. 미술뿐만 아니고 내 인생의 스승 같으신 분이셨다. 난 고등학생이지만 선생님은 늘 나를 술집에 데리고 다니셨다. 저녁 무렵 광화문에 도착하면 교육회관, 여왕봉 다방을 지나 우리나라 최초의 슈퍼마켓인 고려쇼핑 골목 안의 하얀집이나 다래, 미네르바 같은 분식집에서 간단히 떡라면이나 쫄면으로 저녁을 때웠다. 실기수업을 마치면 선생님과 우리의 단골 박대포나 평양집에서 소주로 하루 일과를 정리했다. 안주는 주로 양념 얹은 생두부. 가끔은 세종로를 건너 한국일보 가기 전에 있던 호반에서 맥주를 마셨다. 그곳에선 안주로 날김을 왜간장에 찍어 먹었는데 참 별미였다.

그때도 막걸리가 있었지만 요즘처럼 품질이 좋지 못해 탈이 나기 일쑤였다. 청주에서 온 학교 선배님은 막걸리를 과음하고 화실에서 등산용 침낭에 들어가 주무셨는데 침낭 안에서 계속 구토를 했는데도 너무 취해 그걸 모른 채 괴롭다며 데굴거리고 계속 잤으니 다음날 그 광경이란 끔찍할 정도로 대단했다.

고3 끝무렵부터는 나는 혼자서도 술집을 자주 갔다. 세종문화회관이 1978년에 완공됐다. 그러나 광화문 골목 안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질 않았다. 가게 상호만 바뀌었지 골목의 지형은 변한 게 없다. 지금의 일품당골목 광화문김치찌개집 안쪽으로 스탠드바가 몇집 있었다. 아직 고등학생이었지만 가끔 나는 그곳에서 혼자 스탠드바에 앉아 마티니나 진토닉을 마셨다. 그게 멋인 줄 알았다.

세종문화회관이 개관하고 얼마되지 않아 대만 국적의 세계적인 화가라고 하는 장대천(張大千)이란 수염 긴 화가가 그곳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사진 속의 작가 얼굴이 도사님 같았고 브라질에 있는 그의 집이 대저택이라 매우 놀랐다. 화가가 저렇게 잘 살다니! 수묵채색으로 연꽃과 관세음보살상이나 발묵산수를 힘차고 웅대한 필치로 그렸는데 그 화가가 젊은 시절 사막인 돈황석굴에 가서 오랫동안 벽화를 보며 연구했다는 말을 듣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의 그림값이 지금은 그때로부터 수백 배가 올랐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광화문 나들이를 즐겨한다. 어릴 적 이곳에서 그림을 배워 화가가 됐고 또한 화류계 생활을 시작한 곳도 여기 광화문이기 때문에 나로선 고향 같은 곳이다. 새문안교회 건너에 있는 흥국생명 지하의 씨네큐브. 보기 힘든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얼마 전에도 아내랑 '케빈에 대하여'란 영화를 봤다. 입구엔 조너선 브로프스키의 '망치질 하는 사람'이란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대형 조각품이 서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환경조형물 중의 하나다. 기업에서 사회를 위해 문화적 기여를 하는 모범사례로 뽑힌다. 이 덕분에 광화문 주변이 문화의 향기로 풍요로워졌다.

광화문에 가면 자동적으로 카페 소우(小雨)를 들른다. 세종문화회관 옆골목 광화문김치찌개집 바로 옆에 소우란 작은 간판이 있고 마치 화장실처럼 생긴 문을 열면 한 평쯤 되는 반지하 공간이 있다. 새 둥지같이 생겼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술을 마시나 할 정도로 협소하다. 옆사람과 어깨를 맞닿고 앉아야 한다. 그렇게 자리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처음 만난 옆사람들과 아는 사이처럼 친해지고 금방 라이브카페가 되어 소우는 들썩거린다. 주인 마담과의 수다도 정겹다. 광화문 직장인 가수들의 통기타 반주로 양희은, 송창식, 김광석을 만난다. 여섯이나 일곱이면 꽉 찰 것 같은 이 작은 공간에 언젠가는 스물네 명이나 들어와 술마시며 노래한 적도 있단다. 기네스북에 기록될 정도로 놀랄 일이다.

삼전 회전초밥 2층의 '가을'. 광화문 주변 직장인들의 해방구다. 나는 아내와 싱가포르에서 온 아내의 친구 김희정 씨 부부와 넷이서 소우에 이어 광화문의 명물 라이브카페 가을로 2차를 갔다. "춤을 자제해 주시고 꼭 추실 분은 자기 자리에서 추시길 부탁드립니다." 가수의 간곡한 부탁에도 손님들은 막무가내로 흔들어댄다. 노래는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 '난리블루스'란 이런 광경을 두고 하는 말 같다. 광란의 춤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열광하게 할까. 남자나 여자나 나이가 최소한 마흔은 넘었다. 이치현의 벗님들이란 노래가 나오자 넥타이를 풀어 헤친 어떤 이는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춤으로 폭소를 자아낸다. 광화문판 디스코란다.

마침 무대 바로 앞 명당에 자리가 생겼다. 앉자마자 급하게 차가운 맥주를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열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늘의 마지막 가수가 등장한다. 짙은 선글라스를 낀 여가수. 많이 들어 본 노래인데 제목을 모르겠다. 어찌 됐건 중장년 손님들은 다시 광란의 춤판을 벌인다. 부부같이 보이는 남녀는 없는 것 같다. 40대 여성이 체육복 차림으로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열정적으로 몸을 흔들어 댄다. 무아지경이다. 우리 테이블 바로 앞 복도에서 50대 중년의 남자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들이대며 춤을 춘다. 같이 추자며 우릴 끌어내려 애쓴다. 기겁한 우리가 안 나가겠다고 버티자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잔다. 기가 막힌다. 언제 봤다고. 자정이 다 됐는데도 춤추는 손님들로 복도가 꽉 찼다. 집에는 언제들 가려고 저러나.

춤추는 남자, 춤추는 여자, 귓속말하는 척 하며 뽀뽀하는 남녀, 뭔가 기대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여자들. 가을은 지금 요지경. 하지만 모처럼 많이 웃었다. 서울에서 이리도 즐거운 곳이 얼마나 될까. 블루스곡이 나온다. 짝없는 남자들이 서로 껴앉고 춤춘다. 황홀한 표정이 가관이다. 그래도 그 모습이 진지하다. 카페 가을은 행복한 난장판이다.

가을을 나와 아쉬움에 한잔 더하자며 요즘 뜨는 하늘이란 카페로 향했다. 소우가 있는 골목 끝이다. 소우의 두 배쯤 크다. 손님 중에 기타 고수가 많다. 남자 손님들이 우르르 들어오는데 아까 가을에서 본 남자들이다. 옆에 여자들이 있으니 나를 부러워한다. "가을에서 달고 왔네" 하면서. 그게 아닌데, 말하기도 그렇고….

'오빠 생각' '연가' 등 손님들이 부르는 노래마다 '캬' 하며 감탄사가 나온다. 옛날 생각 때문이다. 1970년대의 강촌쯤으로 돌아간 것같다. '조개껍질 묶어'가 나오더니 산울림의 '길을 걸었지 그 누가 옆에 있다고'와 김광석의 '일어나'까지 카페 하늘에서 우린 정말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깊은 밤 새벽별을 보며 우리 두 부부는 카페를 나왔다. 24시간 영업하는 화목 순댓국집 앞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 안 라디오의 음악이 또한 흥겹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 강산에다. 그렇다. 삶이 힘들고 우릴 지치게 해도 언제든지, 광화문은 힘찬 연어들처럼 진정 우릴 다시 살맛나게 했다. 역시 산다는 것은 좋은 거다. 고맙다!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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