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늦둥이 아들 · 아내의 급사.. 정조, 급기야 사도세자 묘지를 옮기는데

2012. 8. 27.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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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불효한 이 아들이 천지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 지금껏 멍하고 구차스럽고 모질게 목석처럼 죽지 않고 살았던 것은 소자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원한을 가졌기에 저토록 격한 감정을 토로했을까? 다름 아닌 정조 임금이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1776년 임금 자리에 오른 정조는 많은 것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암살 위협과 역모, 왕대비(정순왕후)의 간섭 등으로 '왕 노릇'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거기다가 정조가 믿었던 최측근 홍국영까지 배신하였다. 죄인들을 재판하고 유배 보내고 처형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힘들어하던 정조를 또 한 번의 큰 슬픔이 강타한다. 정조는 자식이 없었다. 왕에게 아들이 없음은 '레임덕'의 시작이다. 정조의 최측근 홍국영이 딴마음을 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던 정조가 나이 서른한 살인 1782년 원자(문효세자)를 본다. 원자가 태어난 날 전·현직 대신들을 불러 "종실의 번창은 지금부터"이며 개인적으로 "아비란 호칭을 듣게 되어 너무 좋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정조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준 일생일대의 경사였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1786년 4월 초 전국에 홍역이 돌았다. 정조는 약제 처방 등 다양한 구제책을 발표한다. 4월 한 달은 '홍역과의 전쟁'이었다. 홍역 귀신들은 정조를 비웃기라도 하듯 5월 3일 궁궐을 넘어들어 문효세자를 공격한다. 곧바로 정조는 의약청을 설치하고 손수 약을 달여 먹이는 정성으로 홍역을 퇴치한다. 문효세자가 홍역에서 완치되자 5월 6일 의약청을 철수시키고 대사면령 등을 발표하여 백성과 기쁨을 함께하였다. 그런데 며칠 후 문효세자가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정조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불행은 또 홀로 오지 않았다.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가 넉 달 후인 9월 14일 갑자기 죽는다. 성씨는 임신 중이었다. 운명은 희미한 희망의 불씨조차 앗아가 버렸다. 또 그해 11월 조카인 상계군이 갑자기 죽는다. 왕실의 위기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불행들이었다.

그 불행의 근원은 어디일까? 그 근원을 찾아 나섰다. 의빈 성씨가 죽은 지 보름이 채 안 된 9월 27일 정조는 믿고 의지하던 고모부 박명원과 지관 차학모를 대동하여 사도세자의 무덤을 찾는다.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삼육의료원 터이다. 지금도 삼육의료원 정문에서 보면 의료원을 감싸주는 뒷산이 아름답다. 얼핏 보기에는 주산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무덤 터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당시 그 터에 뱀이 꼬이고 중랑천 물소리가 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산 아래에 사도세자 무덤을 쓴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무덤이 흉지라는 소문을 듣고 있던 터라 직접 확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현장 답사를 통해 흉지임을 확신한 정조는 천장(遷葬)을 결정한다. 천장 과정은 쉽지 않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화성 융릉 자리로 최종 결정된다. 그보다 110여년 전인 1659년 남인 윤선도가 최고의 길지로 지목하였음은 지난번 글에서 이야기한 대로이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똬리를 튼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형상(盤龍弄珠形)'의 길지라고 평했던 곳이기도 하다. 1789년 천장을 마무리한다. 이 글 첫 문장 인용문은 정조가 천장을 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쓴 지문 일부이다. 그동안 가슴에 쌓였던 서러운 한들을 아버지에게 격한 감정으로 아뢴 것이다. 천장을 끝내고 점을 친다. '자손을 볼 조짐이 있어 나라의 큰 경사가 있을 것(?i斯之兆邦國大慶)'이라는 점 풀이였다. 과연 이듬해에 그토록 바라던 왕자가 태어난다. 훗날의 순조 임금이다.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엄청난 자신감을 얻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풍스러운 적송과 산새 소리 아름다운 융릉은 그렇게 조성되었다. 왕릉과 그 뒤로 만들어진 숲 속 길은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풍수와 정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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