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서 손가락 잘려 몸에 이가 들끓었지만

2012. 8. 25.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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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촐라체 북벽 세계 첫 겨울등반한 박정헌 대장

[동아일보]

손가락을 잃은 박정헌은 더이상 할 수 없는 암벽 등반 대신 창공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 다시 히말라야에 안겼다. 이제 그는 네팔 전통 건축 양식 등 히말라야 문화를 들여와 그 경이로움을 전하려 한다. 진주=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 과수원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이던 박정헌(41·전문 산악인)의 팔을 거칠게 잡고 집 마당 우물로 끌어냈다. 오랫동안 쌓아온 분노와 걱정을 폭발시키듯 거친 손으로 아들의 옷을 모두 벗겼다. 그날도 아들은 새벽녘 배낭을 메고 몰래 사라졌다가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 아버지 눈을 피해 집에 돌아와 있었다. 아버지는 오늘 끝장을 보자며 두레박 한 가득 살얼음 언 찬물을 퍼 알몸인 아들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거기는 산이 아니고 니 죽을 데라 안 카드나. 다시는 가지 마라 안 카드나." 다시는 산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단단히 작정한 듯 떨리는 손으로 찬물을 퍼붓고 또 퍼부었다. 맨몸으로 얼음물 세례를 수십 분간 받으면서도 아들은 끝내 "아부지 다시는 안 그러겠심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

"물에 가는 놈은 물에서 죽고 산에 가는 놈은 산에서 죽는다. 와 니 죽을 길로 걸어 드가노." 지친 아버지가 울부짖듯 말했다. 겨울밤, 온몸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그는 겨우 몸을 닦고 이불을 두른 채 시골집 방 안에 앉아 벽을 보며 생각했다. "내일 또 산에 가야지. 와룡산 상사바위를 다 오르고 나면 부산 부채바위를 타고 설악산 토왕 빙폭을 타야지.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히말라야에 가야지." 언 몸이 풀리고 스르르 잠들 때까지 벽에 가득 붙은 히말라야 사진을 바라봤다.

○ 손끝부터 발끝까지 전해진 전율

어디로 뛰어가든 그림 같은 남해가 넘실대고 어디를 돌아봐도 푸른 와룡산이 펼쳐져 있었던 1985년 경남 삼천포 중촌마을. 이 마을에서 한창 성장하던 중학교 2학년 박정헌은 친구들과 캠핑장비를 갖고 바다로 나가 낚시를 하다 바닷가 하늘에 뜬 별을 보며 밤을 보내는 일을 좋아했다.

그해 여름 낚시를 가려고 동네 등산용품점에 접이식 물통을 사러 갔던 날, 그의 인생이 가게 주인의 한마디로 확 바뀌어 버렸다. "어린놈이 캠핑용품도 사러 댕기고 신기하네. 니 산에 한 번 안 가볼래? 암벽을 타고 나서 캠핑을 해야 진짜 제대로 된 캠핑인기라." 집에 돌아간 그날 밤 도대체 암벽이 무엇이기에 아저씨의 표정이 그렇게 밝아졌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호기심에 와룡산을 찾았지만 그때까지 그에게 가장 거대했던 799m 암벽의 기세에 일순간 눌려 버렸다. 난생처음 로프를 타고 암벽에 매달렸을 때 두 다리와 두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암벽 등반을 마친 산악회 어른들이 모닥불을 피운 채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부산 요들송 동호회 회원들이 부르던 노래가 산 구석구석에서 메아리치던 그날 밤, 텐트 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박정헌은 혼자 중얼거렸다. "다시는 산에 오지 말아야지."

그러나 집에 돌아온 뒤 온몸에 남은 암벽을 탈 때의 느낌이 떠날 줄을 몰랐다. 몸은 처음 암벽을 탔을 때의 느낌을 오롯이 기억하며 다시 느껴보고 싶다고 재촉했다.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처음 암벽에 매달렸을 때 손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근육이 하나도 빠짐없이 움직일 때 전해지던 전율이요. 텐트에 누웠을 때 들리던 산이 내는 갖가지 '산소리'들도 그렇고요. 산에 가지 않고는, 암벽을 타지 않고는 도저히 못 버티겠더라고요."

다행히 그의 집은 아버지 눈을 피해 몰래 산에 가기 안성맞춤인 구조였다. 그의 방에는 대청마루 쪽으로 난 창호지로 만든 문이 있었고, 방 뒤에도 뒷마당을 향해 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그는 산악회 등반이 있는 날이면 뒷문을 열어 담벼락 아래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 위에 산악용 배낭을 던져 올려놓고 집 앞으로 잠깐 마실 나가는 척하며 밖으로 나왔다. 집 뒤로 돌아가 장작더미 위의 배낭을 낚아채 쏜살같이 와룡산으로 달아나면 거대한 암벽이 멋진 자태로 늘 그를 기다렸다.

1994년 8091m 안나푸르나 남벽, 1995년 8848m 에베레스트 남서벽 한국인 최초 등정, 2002년 8027m 시샤팡마 남서벽에 '코리아 하이웨이'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루트 개척, 2005년 촐라체(6640m) 북벽 겨울시즌 세계 최초 등정 등 훗날 각종 역사에 남을 기록을 세울 '괴물 산악인'이 아버지에게 들킬까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와룡산으로 달려가며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 촐라체에 손가락을 바치다

만년설에 덮인 히말라야의 한 거벽(巨壁). 박정헌이 죽음의 벽을 오르고 있다. 그때 거대한 강풍이 로프를 잡은 손가락에 강하게 스친다. 칼에 베인 듯 날카로운 느낌이 온몸을 덮치더니 손가락들이 암벽 위에서 후두두둑 잘려 날아가 버린다. 허공으로 솟구쳐 흩어지는 빨간 피. 고통에 소리를 질러보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거대한 빙벽이 빨간 피로 물든다. 소리 없이 울부짖다 잠에서 깬다. 몇 달째 같은 꿈이다.

요정이 나타난다. 요술지팡이를 허공에 대고 한 번 휘익 휘두르자 잘려나간 뭉툭한 8개의 손가락이 새싹 돋듯 자라난다. 어느새 온전해진 10개의 손가락. 부드러운 새 손가락을 만지며 기뻐하는 순간 깨어난다. 며칠째 같은 꿈을 꾼다.

자연을 해치지 않는 최소한의 장비로 최단 시간에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루트를 개척해 암벽을 오르는 알파인 등반가 박정헌. 국내 대표 알피니스트였던 그는 2005년 1월 히말라야 최고 난벽 중 하나인 촐라체 북벽을 세계 최초로 겨울시즌에 등반하는 데 성공한 뒤 하산하다 동료가 크레바스(빙하의 틈)에 빠지면서 함께 조난을 당했다. 겨우 민가를 찾아 구조됐지만 동상에 걸린 손가락은 까맣게 썩어버려 회생할 수 없게 된 뒤였다. 작은 수술대에 누워 알피니스트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였던 손가락 8개를 잘라냈다. "한국의 거벽 등반 역사가 10년 후퇴했다"는 한탄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의외로 손가락 없는 알피니스트를 찾는 곳은 많았다. '촐라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등반가'란 타이틀을 달고 강의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희망과 에너지를 줬다. 하지만 강연이 끝나면 다시는 암벽을 탈 수 없다는 거대한 절망의 크레바스로 끝없이 추락했다. 히말라야에 있는 8000m급 봉우리 14개, 7000m급 봉우리 250개,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6000m급 봉우리들. 그를 살게 했던 수천 개의 목표가 손가락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일부러 찾아 헤맸던 그의 강인했던 몸은 손가락 절단 부위에 피부를 이식하느라 22군데에서 피부를 떼어내는 바람에 다 떨어진 낡은 옷처럼 변했다. 손가락을 쓸 수 없는 바람에 몸에는 이가 들끓었다. 마음에도 수천 마리의 이가 들끓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절망의 크레바스에 갇힌 채 강의료를 받는 족족 술을 마셨다. 수술이 끝난 뒤 6개월간 매일 만취 상태였다. "죽음의 공포, 인간의 육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겪으며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할 때, 고통의 만년설에서 마지막 발을 떼고 평지의 흙을 밟았을 때의 무한한 자유로움과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다는 절망감에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형, 우리 자전거 타고 같이 실크로드로 가요." 2006년 초, 모든 희망을 잃은 그에게 찾아온 산악 후배들이 잠자던 본능을 다시 깨웠다. 암벽은 아니지만 육체가 가장 수고로울 수 있는 곳, 수고로움 끝에 오는 자유와 행복을 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으로 가보자. 손가락이 없어도 강인한 육체와 정신력이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손가락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극한의 탐험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 패러글라이더로 2400km 무동력 횡단하고, 카누-자전거로 또 도전 ▼

타클라마칸 사막을 자전거로 횡단하던 초반 15일간 온몸이 뿜어내는 '송장 썩는 냄새'를 고스란히 맡았다. 1년여간 투여했던 항생제와 각종 약물, 6개월간 몸에 쏟아 부었던 술들. 1년의 노폐물이 모두 빠져나오는 냄새였다. 몸속에 가득하던 커다란 절망이 빠져나오는 냄새이기도 했다. '손가락이 있어야 하는 알파인 등반이 아니더라도, 남이 가지 않은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암벽 등반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방식으로 또 다른 길을 가보자. 내 젊음을 바친 히말라야의 품에 다른 방법으로 다시 안겨보자.' 히말라야의 가혹함이었던 촐라체는 그에게 다른 방식의 탐험을 알게 해 준 히말라야의 선물이 됐다.

○ 새로운 방식, 다시 히말라야

21일 오후, 경남 진주시 칠암동 주택가에 작은 히말라야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31일 개장을 앞두고 있는 히말라얀 아트 갤러리. 박정헌이 이 갤러리 운영자다. 99m²(약 30평) 남짓한 작은 갤러리 안에는 그가 20년 동안 보아온 신의 땅 히말라야가 축소돼 있었다.

고교 3학년 어린 나이로 초오유(8201m)를 찾았다가 감히 다가설 수도 없는 거대함에 떨었던 첫경험 이후 20여 년간 함께했던 히말라야를 아주 작게나마 옮겨오고 싶었다. 10년 전부터 네팔 전통 건축 양식인 네와르 양식으로 만든 건물 일부와 생활 소품 등 히말라야의 문화를 수집해 한국에 들여왔다. "왜 히말라야인가" "그 위험한 곳에, 죽음이 도사리는 그곳에 도대체 왜 가는 건가" 하며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히말라야의 감동과 전율을 보여주고 싶었다.

히말라야의 경이로움, 아름다움, 태초의 순수함을 카메라에 담아 전시한 커다란 사진에는 석양의 히말라야 상공을 새처럼 날아가는 박정헌의 모습도 담겨 있다. 그 속에서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히말라야 하늘길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태초의 모습을 간직한 대자연과 극적인 모습으로 재회하고 있었다.

2006년 자전거로 실크로드를 가로지르며 손가락 없이도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3년간 히말라야의 품에 다시 안기는 법을 생각했다.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 히말라야의 서쪽 끝인 K2에서 네팔 동쪽 끝까지 직선거리 2400km를 무동력으로 횡단하는, 누구도 도전하지 않았던 대장정. 산에서 생겨나는 자연의 힘만을 이용해 히말라야 전 구간을 횡단하는 인류 최초의 도전을 계획하며 손가락이 있었던 시절의 행복과 도전정신을 다시 찾았다. 6개월에 걸친 대장정으로 히말라야를 가로질렀고 벽을 타며 볼 수 없었던 그 맨얼굴, 최고의 장관을 상공에서 고스란히 내려다봤다. 수십 시간이 걸려 수천 m에 이르는 산에 올라 30분 만에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내려오며 자유를 만끽하는 새로운 형태의 탐험을 하며 열정의 고도는 예전처럼 높아졌다.

그는 이제 카누와 자전거로 히말라야 2400km를 또다시 횡단하며 육체를 한계에 부딪치게 하고, 그 끝에 오는 무한한 행복을 맛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히말라야의 행복을 자신만 아는 게 아까워 히말라얀 아트 갤러리에 히말라야를 전시하고 그곳의 예술가들을 초청해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할 목표도 있다. 갤러리 후원자를 모아 히말라야에 도서관을 짓고 책을 선물하고…. 그에게 6000m급 봉우리 수만큼이나 많은 목표가 새 손가락이 돋아나듯 다시 생겨나고 있었다.

"아쉽겠죠. 손끝부터 발끝까지 전해지던 그 전율을 느낄 수 없다는 아쉬움. 늘 마음 깊은 곳에 있겠죠. 그래도 손가락을 잃은 덕분에 히말라야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히말라야는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선물을 주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

진주=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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