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교수의 명랑笑說] 쌓아놓기만 한 책, 표지만 훑다 확 땡길때 읽는 그 맛이란..

2012. 7. 2.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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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저지른 가장 멍청한 짓을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클로버 문고를 버린 일이다. 가세가 기울고 방이 없어지면서 시리얼 넘버 1권인 '유리의 성'부터 100번째였던 '세계 최초의 인간'까지 통째로 버렸다. 정확히는 116권이다. 혹시 여덟 권짜리 '바벨 2세'가 한정판으로 하드 커버본이 나왔던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나는 그게 두 질이나 있었다. 그냥 좋아서 사고 또 샀다.

나는 책이 좋다. 종이 뭉치 조금, 마분지 그리고 풀과 실의 조합으로 이런 어메이징한 것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산 책을 읽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럼 책을 왜 사요, 묻는 분 있으시겠다. 다행히 나 같은 사람을 위한 핑계가 있다. 독서의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가 소리 내어 읽는 음독(音讀)이다. 두 번째는 묵독(默讀)이다. 성 에마뉘엘의 일기에 이런 게 나온다. '오늘 무서운 것을 보았다. 서재에 들어가니 조카가 소리를 내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당시 묵독은 악마의 독서법이었다. 인간에게 허용된 건 12세기에 이르러서다. 마지막이 적독(積讀)이다. 읽지 않고 쌓아놓기만 하는 거다. 그게 무슨 미친 짓이냐고?

책을 바라보고 있으면 친구나 선생이 집 안에 꽉 찬 느낌이다. 사기에 나오는 맹상군은 3000명의 식객을 무기 삼아 세상을 도모했다. 핵심 참모는 열 명 남짓이었을 테니 나머지 2990명은 여벌이겠다. 물론 2군 중에서도 계명구도(鷄鳴狗盜) 같은 대박이 터지기도 한다. 그러니 숫자만 놓고 치자면 나는 우주도 정복할 수 있다. 게다가 얘들은 밥 달란 소리도 안 한다. 그래서 부러운 사람이 다치바나 다카시다. 일본의 무규칙 저술가인 그는 책을 보관하기 위해 빌딩을 세웠다. 그 유명한 고양이 빌딩이다. 나는 책을 쌓아두기 위해 서울에서 멀어지는 방법을 택했다. 서울 나들이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대신 책을 찾기 위해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는 즐거움을 얻었다. 따지 않은 술병과 다를 것이 무엇이요, 다시 물으신다면 실은, 읽는다. 틈틈이 표지만 읽는다. '집 나가면 생고생, 그래도 나간다'같이 시선을 쪼옥 잡아당기는 책도 있고 '윤리21'처럼 알쏭달쏭한 책도 있다. 그러다 갑자기 확 '땡기는' 날이 있다. 그때 빼내 펼친다. 이럴 때 읽어야 제대로 살로 간다. 그러니까 적독은 저장이 아니라 실은 쌓아놓고 표지부터 살살 핥아먹는 미식가적 독서법인 셈이다.

종강을 했다. 방학 때 뭘 하면 이기적으로 좋을까요, 제자들이 묻는다. 읽어라, 하고는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나 폴 존슨의 '모던 타임스'같이 1000페이지 훌쩍 넘어가는 책을 추천한다. 문명의 시작에서 어제까지를 통찰한 책들이다. 전체에 대한 안목이 생기면 작은 지식들은 끼워 넣기만 하면 된다. 1000피스 퍼즐을 맞출 때 전체 그림을 한 번 보고 맞추는 것과 무슨 그림인지도 모르고 맞춰 나가는 것의 차이로 그 실익을 설명한다.

실망한 눈빛이다. 얘들아, 진리는 단순한 거란다. 단순해서 진리이고 쉬워서 진리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하기 어려워서 진리이고 무엇보다 세상에 별 뾰족한 방법 같은 건 없단다. 하나가 손을 든다. 선생님은 저희 나이 때 그 책 다 읽으셨어요? 그걸 다 읽었으면 내가 지금 너희들과 이러고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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