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대최고] '왕년의 득점기계' T-MAC 對 빈스 카터

박순경 인터넷기자 2012. 6. 26.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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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NBA는 센터 시대로 불렸고, 현재는 포인트가드의 전성시대로 불리고 있다. 마이클 조던의 은퇴 이후 '제2의 조던'을 찾던 2000년대는 코비 브라이언트, 앨런 아이버슨, 빈스 카터,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등 뛰어난 슈팅가드들이 데뷔, 스윙맨 시대를 알리며 NBA 인기 부활을 알렸다. 이들 중 '사촌형제' 카터와 맥그레이디는 폭발적인 득점력과 운동능력으로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현재는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코트를 누비며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 Tracy McGrady 33, 203cm

▲ 완전체 폭격기 'T-MAC'

맥그레이디는 1979년 5월 24일 플로리다 주 포크카운티에 있는 '바토'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야구, 풋볼 등 여러 운동을 즐겼다. 특히 야구에 재능이 있어 야구선수를 꿈꿨고, 농구는 그저 즐기는 운동 중 하나였다. 하지만 농구는 그의 운명이었다. 그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앤퍼니 하더웨이(41, 201cm)의 플레이를 본 후 농구 선수의 꿈을 키워 나가게 됐다.

오번대일 고등학교(Auburndale High School)에 진학한 그는 하더웨이의 플레이를 따라하며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All-Around Player)로 성장했다. 3학년 때는 최고의 기량으로 평균 23.1점 1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자주 지각을 하며 선생님과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농구부에서 나오게 됐다.

농구를 그만둘 위기에 처했던 그는 앨비스 스미스의 추천으로 아디다스 ABCD 캠프에 초대되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캠프에서 당시 최고의 고교선수로 꼽히던 '토털 패키지' 라마 오덤(33, 208cm)을 압도하며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마운트 자이언 크리스천 아카데미(Mount Zion Christian Academy)로 전학 간 후에는 조엘 홉킨스 코치의 혹독한 훈련을 묵묵히 따르며 가파르게 성장했다.

그가 이끄는 학교는 전미 최강으로 꼽히던 오크 힐 고등학교를 격파,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오덤에 이어 고교랭킹 2위에 올랐고, 1997년 NBA 신인드래프트에 도전했다. 당시 그를 전체 9순위로 지명한 토론토 랩터스는 고졸 출신인 맥그레이디의 학력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잘나갔던 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맥그레이디는 신인 시절 평균 18.4분 출전 7점 4.2리바운드 1.5어시스트에 그치며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2년차 시절에는 사촌형인 카터가 팀에 들어와 입지가 더욱 좁아져 9.3점 5.7리바운드 2.3어시스트의 평범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그는 1999-2000시즌부터 급성장했다. 데뷔 후 최다인 31.2분을 뛰며 평균 15.4점 6.3리바운드 3.3어시스트 1.1스틸 1.9블록으로 다재다능함을 뽐냈다. 2000-2001 시즌에는 올랜도 매직으로 이적, 확고한 주전이 되었다.

올랜도 시절 그는 2002-2003시즌과 2003-2004시즌 득점왕이 되어, 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인정받았다. 2004-2005시즌에는 휴스턴 로켓츠로 이적해 야오밍과 함께 위력적인 원투펀치를 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부상에 시달리며 더 이상 높이 오르지 못했다. 그는 휴스턴에서의 첫 시즌에 78경기를 출전했지만, 이후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기량도 점점 하락해 저니맨(Journey Man)으로 전락, 뉴욕 닉스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거쳐 2011-2012시즌은 애틀랜타 호크스에서 보냈다.

▲ 35초의 기적 '티맥 타임'

농구는 짧은 시간에도 승부가 뒤집힐 수 있어 그 어떤 스포츠보다 짜릿함과 감동을 선사하는 종목이다. 농구 인기가 절정이던 1990년대, 레지 밀러(47,201cm)는 짧은 시간 내 많은 점수를 몰아넣어 '밀러 타임'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13초만에 8점을 올리는 등 유독 플레이오프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다.

2000년대부터 NBA를 즐겨본 사람이라면 밀러의 '밀러타임'보다 맥그레이디의 '티맥 타임'이 더 인상 깊었을 것이다. 2004년 12월 9일 토요타 센터에서 열린 휴스턴과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경기에서 맥그레이디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연출해냈다.

그는 68-76, 8점차로 뒤진 종료 35초전, 3점포를 꽂아 넣은 것을 시작으로 샌안토니오에 폭격을 가했다. 24.3초를 남기고는 3점슛과 동시에 팀 던컨(36, 211cm)의 반칙을 얻어내 4점 플레이를 완성했다. 이후 한 번 더 3점포를 넣은 그는 종료 직전, 짜릿한 역전골로 역사에 남을 퍼포먼스를 마무리했다.

맥그레이디는 78-80으로 뒤져 패색이 짙던 종료 8초전, 데빈 브라운(34, 196cm)의 공을 스틸해 상대 진영으로 전력질주 했다. 부족한 시간과 점수 차이로 인해 그가 선택한 공격은 3점슛. 그는 마누 지노빌리(35, 198cm)와 토니 파커(30, 188cm)의 수비를 아랑곳 않고 3점포를 림에 꽂아 넣었다.

81-80, 1점차의 극적인 역전승. 맥그레이디가 결승골을 넣은 순간부터 경기장은 팬들의 엄청난 환호로 가득 찼고, 샌안토니오와 휴스턴의 희비는 극명히 엇갈렸다. 맥그레이디가 보여준 35초 동안의 쇼타임은 '티맥타임'으로 불렸고, 그의 건재함을 알린 계기가 되었다.

빈스 카터 | Vince Carter 35, 198cm

▲ 최고의 덩커 'Vinsanity'

카터는 1977년 1월 26일 플로리다 주 데이토나 비치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사였던 어머니와 양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특히 교사인 어머니 덕분에 농구, 축구, 밴드 등 여러 활동을 즐겼는데 특히 농구에 대한 깊은 열정을 보였다.

메인랜드 고등학교(Mainland High School)에 진학한 카터는 1994년 플로리다 지역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플로리다 주 Mr.Basketball을 수상했다. 이어 올-아메리칸 1st팀, 세계 주니어 농구대회 미국 대표로 뽑혀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 또한 1995년 맥도날드 올-아메리칸 고교 올스타전 슬램덩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 최고의 덩커로 이름을 날렸다.

화려한 고교시절을 보낸 카터는 부푼 꿈을 안고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대학교에 진학했지만 1학년 시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최악이었다. 엉덩이 부상, 부족한 수비력으로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7.5점 3.8리바운드 1.3어시스트의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그러던 그는 명장 딘 스미스의 지도아래 숨겨진 재능을 마음껏 뽐냈고, 2,3학년 시절 ACC(Atlantic Coast Conference)토너먼트 2연패를 이끌었다. 아쉽게도 팀 성적은 NCAA 토너먼트 파이널4가 한계였다. 결승에 오르지 못하며 NCAA 정상은 꿈같은 존재였다. 이후 카터는 대학에 졸업하지 않고, NBA 진출을 선언했다.

카터는 1998년 NBA 신인 드래프트 전체 5순위로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된 후 앤트완 재이미슨(36, 206cm)과 트레이드 됐다. 토론토 랩터스에 입단한 그는 매 경기 화끈한 덩크쇼를 선보였고, 덕분에 토론토도 인기구단으로 급부상했다. 또한 평균 18.3점 5.7리바운드 3어시스트 1.1스틸 1.5블록의 성적으로 신인상을 받았다.

정규시즌까지 잘 나가던 카터는 플레이오프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1999-2000시즌 뉴욕 닉스와의 1라운드 대결에서 30%의 낮은 야투 성공률로 부진했다. 팀은 3전 전패로 탈락했다. 이후 토론토는 카터를 비롯한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우승권 전력을 갖추지 못해 매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부상과 떨어지는 팀 성적으로 고심하던 카터는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2004-2005시즌 도중 뉴저지 네츠로 이적했다. 카터를 영입한 뉴저지는 제이슨 키드(39, 193cm), 카터, 리차드 제퍼슨(32, 201cm)으로 이어지는 리그 최고 수준의 트리오를 결성했다. 그들은 키드의 뛰어난 패스를 중심으로 팬들의 눈을 즐겁게 했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우승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3년 연속 플레이오프 2라운드의 벽을 넘지 못했다.

2004-2005시즌부터 2008-2009시즌까지 뉴저지에서 뛴 카터는 올랜도 매직, 피닉스 선즈를 거쳐 현재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Slam Dunk=Vince Carter'

공중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덩크는 농구에서 가장 치명적인 매력으로 꼽힌다. 도미닉 윌킨스(52, 203cm), 클라이드 드렉슬러(50, 201cm) 등 과거스타들은 화려한 덩크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현재는 블레이크 그리핀(23, 208cm)이 2011 NBA 덩크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등 덩크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지금은 그리핀이 최고의 덩커로 불리고 있지만, 그리핀이 NBA에 데뷔하기 전 '덩크=카터'라는 인식이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카터는 데뷔 시즌부터 특유의 점프력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의 비인간적인 덩크는 조던의 은퇴로 스타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했다. 그는 코비(34, 198cm), 아이버슨(37, 183cm), 맥그레이디 등과 함께 2000년대 NBA를 이끌었다.

지금까지 카터가 보여준 수많은 덩크들이 있지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보여준 'Over The Man' 덩크는 카터의 최고 덩크로 꼽힌다. 2000년 9월 25일 미국과 프랑스의 경기. 카터는 리바운드 후 공격하던 상대의 공을 스틸, 골밑으로 돌진했다. 그의 앞에 선 수비수는 218cm의 장신 프레드릭 와이즈. 카터는 와이즈를 뛰어넘어 덩크하는 진기한 광경을 연출했다. 그의 괴물 같은 점프력이 낳은 결과였다. 와이즈는 카터가 덩크를 시도하자 꼼짝하지 못하고 그대로 역사적인 순간의 희생양이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카터는 3년 만에 부활한 2000년 덩크 컨테스트에 출전, 스티브 프랜시스(35, 191cm), 맥그레이디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쳤다. 당시 카터의 경쟁자들이 보여준 덩크는 우승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고난이도였다. 단지 카터의 덩크 실력이 너무 뛰어났을 뿐이다.

카터는 윈드밀, 비트윈 더 렉 덩크 등 웬만한 점프력과 덩크 실력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각종 덩크를 선보였다. 이 대회에서 보여준 카터의 덩크로 팬들의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아졌다. 이후 열린 덩크 콘테스트부터 획기적인 덩크가 아니면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가는 '사촌형제'

운동선수들의 가장 큰 재산은 건강한 신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면 소용없기 때문. 축구계에서는 오웬 하그리브스(31), NBA에서는 앤퍼니 하더웨이(41, 201cm)가 부상에 발목 잡힌 못다 핀 꽃 한 송이의 대표 인물이다.

카터와 맥그레이디는 역대 급의 재능을 가졌던 사촌형제다. 스타 부재로 인기 하락을 겪던 NBA에 단비를 내려준 존재였고,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스타였다. 카터는 덩크, 맥그레이디는 빠른 퍼스트 스텝과 슈팅 능력으로 NBA를 대표하는 스윙맨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들 역시 부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참 인기를 얻던 도중 부상이라는 큰 벽이 농구 인생을 가로막았다. 열심히 재활을 하며 부활을 노렸지만, 부상의 악령을 떨쳐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터는 토론토 시절, 다소 약한 팀 전력으로 플레이오프에서 매년 고배를 마셨다. 2001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아이버슨과 역사에 길이 남을 득점대결을 펼쳤지만, 7차전 끝에 패하며 눈물을 흘렸다. 맥그레이디는 올랜도에서 득점왕에 오르며 최고의 개인 능력을 뽐냈지만, 팀 성적이 받쳐주지 못했다. 또한 부상으로 신음하며 하더웨이의 전철을 밟아 올랜도 1번의 저주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다. 휴스턴에서는 야오밍과 원투펀치를 결성했지만, 부상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현재 카터와 맥그레이디는 계속되는 부상으로 기량 하락이 이어졌고, 이제는 나이가 많아 더 이상 큰 기대를 하기 힘들어졌다. 그들의 경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팬들이 감동을 받을 정도다.

지긋지긋한 부상에 지칠 법도 하지만 그들은 팬들을 위해 선수생활을 그만두지 않고 있다. 가끔씩 보여주는 멋진 플레이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비록 전성기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도 팬들을 위한, 농구에 향한 그들의 열정은 칭찬 받기 충분하다. 그들은 여전히 팬들의 추억 속에 살아있는 최고의 스타다.

사진_ NBA-ASIA, 아디다스 코리아 제공

저작권자 ⓒ 점프볼.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2-06-26 박순경 인터넷기자 ( kblnba95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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