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할머니들의 '사업 동의서'에 배꼽 잡다

박학룡 2012. 6. 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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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할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장마 오기 전에 집 앞 골목길 계단을 고치고 싶으시다고, 이웃 할머니들한테 동의서도 받았노라고. '아니, 할머니가 동의서를?' 내심 의아해하며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동의서는 한 장짜리로 뜯어낸 전화번호 수첩이었다.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펼치자 서툰 글씨로 이웃집 할머니들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적혀 있고, 손도장까지 찍혀 있었다. 그동안 여러 종류의 주민동의서를 봐왔지만 이런 동의서는 처음이라 배식배식 웃음이 나왔다.

'다섯이 모이면 골목이 바뀐다'는 서울 성북구 삼선동 장수마을식 주민 공모 사업이다. 집 앞 골목을 조금 보수하고 싶거나 예쁘게 가꾸고 싶은 주민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웃 네 명 이상을 찾아 함께 의견을 제안하면 대안개발연구모임, 마을기업 동네목수와 함께 제안 내용을 실현할 방법을 찾아가는 방식이다. 별도의 예산도 없고, 정해진 주제나 자격 제한도 없다. 지자체나 기관에서 하는 공모와는 차원이 다른 아주 소박한 마을 내 공모 사업이다.

ⓒ동네목수 제공 최씨 할머니 등이 작성한 공모 사업 동의서.

공모를 처음 시작한 4월에는 여성 주민들의 소모임 '여우들의 수다'가 동네카페 옆 골목에 방울토마토를 심겠다고 작은 텃밭 조성을 신청했다. 화분과 흙은 보관하고 있던 걸 사용했고, 방울토마토 모종 구입비로 7000원을 썼다. 현금 7000원으로 저렴하게 해결한 공모 사업이었다.

여러 차례 사무실에 찾아온 할머니

그러던 것이 5월 들어 최씨 할머니를 비롯하여 세 건의 제안이 들어왔다. 다른 두 건은 노인들이 골목길 계단을 걷기가 힘이 드니 의지하고 갈 수 있는 난간을 설치해달라는 것인데 동의서 역시 내용이나 형식이 비슷했다. 아마도 최씨 할머니가 공모 신청한 이야기를 듣고 따라한 듯했다.

세 번째로 접수한 유씨 할머니의 동의서는 공책을 찢어서 서명을 받은 건데, 그래도 주소와 이름을 적은 봉투에 담아서 나름 격식까지 갖췄다.

최씨 할머니의 제안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구청에 민원을 넣어보고, 민원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동네목수와 함께 다시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최씨 할머니가 직접 민원 신청을 낼 수 있도록 전화하는 요령과 함께 구청 토목과 연락처를 알려드렸다. 구청에 전화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설명하는 틈에 할머니는 자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쭉 늘어놓으신다.

ⓒ동네목수 제공 5월 들어 골목 계단에 난간을 설치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할머니의 남편은 나이 77세로 건강했는데 작년에 혈압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단다.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다며 한숨을 쉬신다. 평생 모든 걸 할아버지한테 의지하며 살아 은행에 돈 넣을 줄도 찾을 줄도 몰랐노라고, 갑자기 세상에 혼자 내버려졌으니 그 막막함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며 또 한숨이다. 그래도 지금은 복지관에 청소일을 나가고 있는데, 집 앞 계단을 고치고 싶어 일 안 나가는 날에 나를 만나러 동네목수 사무실에 몇 번을 찾아갔는지 모른다며 어렵게 만나 더 반갑다고 하신다. 바쁘다고 사무실 전화를 돌려놓지 않은 것이 죄송스러웠다.

할머니 댁을 나오려는데 할머니는 또 내 손을 붙잡고 한마디 덧붙이신다. "혼자 남겨져서 모든 걸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막막한 나 같은 늙은이한테는 어떻게 하라고 알려만 줘도 얼마나 고맙고 의지가 되는지 몰라요. 정말로 고마워요." 나는 괜히 코끝이 찡해져서 벽에 붙은 가족사진이 크고 좋아 보인다고 사진 한 장 찍어가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할머니는 가족들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으시고 행복하게 웃으신다.

며칠 후 주말에 최씨 할머니가 동네카페로 찾아오셨다. 오랜만에 친정어머니를 찾아온 딸들한테 동네카페 구경시켜주러 오셨단다. '봐라, 잘해놨쟈?' 마을기업 동네목수가 주민들의 가족이 되어가는 듯했다.

박학룡 (동네목수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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