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다른 나] 주말 화가로 활동하는 아시아나항공 김유식(49) 차장

취재·정리 2012. 4. 17.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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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기나긴 주말여행.. 항공사 근무의 윤활유죠"

텔레비전은커녕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포장이 안 된 신작로를 따라 수십리는 걸어야 읍내가 나오는 충남 당진 의 한 시골 마을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땅바닥에 뭔가를 그리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해질녘까지 아이는 가족들 얼굴과 동네 뒷산, 개울가 풍경을 그리곤 했습니다. 해외 유명 작품을 따라 그리며 자신의 그림인 양 뿌듯해하기도 하고 어른들이 즐겨 놀던 화투 그림을 그려 귀여움을 독차지하기도 했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 아이는 아시아나항공 에서 항공유 구매 파트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 원유 시세에 맞춰 항공유의 구매량과 가격을 정하고 계약하는 게 주 업무입니다. 항공사가 취항하는 해외 공항에서 비행기 급유를 관리하거나 유럽 영공을 통과하는 비행기의 '탄소 배출권'을 거래하는 일도 맡고 있지요. 항공유 구매는 항공회사 매출액의 35% 이상을 차지할 뿐 아니라 구매 계약에 따라 회사의 손익이 달라지기 때문에 경영에서 매우 민감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직장 밖에서는 여전히 어릴 적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개인 전시회를 세 번 열었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린 실력파 화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이 그냥 좋았습니다. 미술학원에 다니거나 집안에 화가가 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물감을 풀고 캔버스를 마주했을 때의 설렘, 하얀 종이에 조금씩 나만의 세상이 완성되어갈 때 밀려오는 뿌듯함…. 이런 매력에 빠져 중학교 때부터 미술반 활동을 시작해 전국대회에서 우승도 했습니다. 가정 형편상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미술반을 직접 만들었고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할 때도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미술 동아리였습니다.

이렇듯 제 삶의 일부였던 미술은 1990년 아시아나항공에 입사하고 바쁜 항공업무에 적응하면서 차츰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10년쯤 지났을 무렵, 베트남으로 출장을 떠난 제게 미술에 대한 열정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업무를 마치고 숙소 인근의 미술관에 갔다가 이름 모를 화가의 그림을 만났습니다. 붉은색과 금색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하롱베이의 풍경과 현지인들의 삶이 소박하게 그려진 작품을 보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내 손으로 그려보고 싶다"라는 욕구가 샘솟았습니다.

귀국하자마자 다시 붓을 잡았습니다. 몇 가지 목표도 세웠습니다. 먼저 직장생활 속에서도 작품을 위한 나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매년 여름휴가 때는 가족들과 스케치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은 지역 문화와 자연을 체험하고 저는 작품을 마칠 수 있으니 일거양득(一擧兩得)인 셈이지요. 아울러 미술사를 비롯해 다양한 미술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부터는 미술 관련 정보를 소개하는 블로그(http://usikim.blog.me)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블로그는 지금까지 1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았을 정도로 '인기 사이트'로 발전했습니다. 그동안 서울 세종문화회관·덕원미술관·인천종합예술회관 등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2003년에는 고등학교 실업계 교과서 편찬위원으로 1년간 삽화 작업을 맡았습니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연료 절감 활동을 홍보하는 책자를 만들 때에도 삽화를 직접 그렸습니다.

출퇴근이 불규칙한 직장인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려움이 많습니다. 퇴근 후 잠시 시간을 내어 캔버스 앞에 앉더라도 작업에 몰입하려다 보면 금세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제가 고안한 방법이 여러 개의 작품을 동시에 시작하고 매일 저녁마다 캔버스들을 바라보면서 각 작품의 완성된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런 연상 작업을 며칠 동안 계속해서 반복하면 휴일에 좀 더 빨리 작업을 완성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모전에 참여하거나 미술관·박물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미술 공부 방법입니다. 다른 작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화가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떠날 때마다 여유 시간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갑니다.

저는 그림이 있어 직장생활을 더 재미있고 활기차게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주말에 그림을 그리면 식사도 거른 채 작업에 몰입하다 보니 월요일 출근 때면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미술 작업이 집중력을 높이고 자기와 대화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복잡하게 얽힌 문제와 맞닥뜨렸을 땐 이해하기 쉽도록 상황을 도식화해서 해결책을 찾기도 하고요.

제 꿈은 퇴직 후 한적한 시골마을로 돌아가 그림을 맘껏 그리는 것입니다. 어린 학생들을 위한 미술체험 교실도 열 계획입니다. 그림을 감상하고 그리는 것 자체가 미지로 떠나는 여행처럼 정말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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