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텐트 치고 우리는 마당에 멍석깔고..

2012. 4. 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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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일 합작 연극 '들불'

공원에 텐트로 공연장 치고80년 광주·원전 사고 등 호출'소모된 사람들'의 이야기판

"우리는 장소에다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장소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공간에도 거기서만 쌓여 온 역사가 있는 거잖아요. '안 보이지만, 무언가 모르는 것이 여기에 있다'고 보는 거죠."

지난 6일 광주광역시 치평동 5·18 자유공원에는 파란색 대형 텐트가 새로 솟았다. 높이 6m에 지름 20m, 300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텐트 안에선 한국말과 일본말이 번갈아 나오는 독특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본의 텐트극단 '야전의 달', '독화성'과 광주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마당극단 신명이 함께 준비한 연극 <들불>이다.

연출가 이케우치 분페이(59)의 말마따나 공원 한 켠, 휑했던 마당은 그 자체로 연극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근거가 됐다. 공연 전 강풍으로 천막을 두 번이나 다시 쳐야했고,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이어진 공연 때는 꽃샘추위가 몰아닥쳤다. 그래도 마당 안 텐트에 옹기종기 모인 관객 70여 명은 무릎 담요와 옆 사람 체온을 연료 삼아 3시간을 배우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모두 4장으로 이뤄지는 연극은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한, '톱니바퀴처럼 소모되는 사람들'을 불러 낸다. 지하 700m 탄광에 갇힌 칠레 광부, 위험을 무릅쓰고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일본 노동자, 1980년 광주에서 활동했던 '들불 야학' 사람들, 종일 서서 일하는 김밥가게 점원,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징집돼 인도네시아로 갔다가 현지 독립군을 이끌었던 조선인 '양칠성'까지…. 한꺼번에 모일 수 없는 이들이 텐트 안에서 만나 대화하고, 같이 춤을 추고 노래한다. 소년 '우리'는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지도를 들고 이 인물들의 기억을 따라 여행한다. 일본인 배우는 자연스런 일본말로, 신명 단원들은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각자 이야기하지만 언어 장벽은 없다. 모두 서로의 말을 이해한다. 관객을 위해 일본말 대사가 나올 땐 한국말 자막이 나올 뿐이다.

<들불>의 인물들은 특별한 맥락 없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각자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긴 대사를 쏟아내지만 기억들은 쉬운 말로 정리되진 않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맥락을 파괴하고 의미를 해체하면서 도달한 마지막 장면에서 황홀경을 맛볼 수도 있다. 뇌성마비에 걸린 청년은 환한 불빛 아래 하얀 종이 꽃잎을 맞으면서 아름다운 몸짓을 펼친다. 그는 춤을 추면서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연극은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끌어 모은 뒤 결국 '이 곳, 존재'를 각인시킨다.

'야전의 달'과 '독화성'은 1983년부터 30년 가까이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들불>을 쓰고 연출한 이케우치 분페이와 출연배우 사쿠라이 다이죠가 함께 '바람의 여단'이란 극단을 만든 이래 쪼개졌다가, 합쳐졌다를 반복하면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대중극보다는 종군위안부, 천황제 등을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을 만들어 현지 연극판에서 종종 논쟁을 일으킨다.

운영 방식도 특이하다. 배우·스탭들은 모두 생업이 따로 있다. 신문사 문화부 기자 출신인 이케우치는 출판업계의 프리랜서 편집자다. 다른 단원들도 잡지 기고, 방송국 소품담당 등의 직업을 갖고 있다. 이들은 자비를 털어 극을 준비하고 일본 전역과 대만, 중국 등에서 초청 공연을 하기도 한다. 공연 때마다 매번 다른 극본으로 다른 장소를 찾아 텐트를 짓는다. 연극이 끝나면 텐트는 흔적 없이 해체된다. 한국 공연은 지난 2005년 이후 처음. 극단은 한국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이케우치는 "아마 당시에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많은 정보를 들었을 것"이라며 "동시대의 광주를 겪었다"고 말한다. <들불>이란 제목도 "70년대 말 광주에 '들불'이란 야학 운동이 있었다는 사실과 80년 5·18 항쟁 직전 광주 시내 전남도청 앞에서 나무에 불을 피워 시위했던 일에서 착안해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서울 공연은 11, 12일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에서 열린다. 소셜펀딩 사이트 텀블벅에서 사전에 참가 신청을 하면 된다. http://tumblbug.com/tentmadang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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